오랜만에 걷고 싶었다. 생각이 많았고, 정리할게 많아서. 그저 쉬운 걸음을 원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힘든 걸음도 원한 건 아나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지침과 여유가 공존하는 걸음. 딱 그 정도의 걸음을 원했다. 처음엔 올레길을 걸을까 생각했다. 올레길은 적어도 '본전'은 뽑으니까. 하지만, 여러 코스 중 한 가지 길을 정하다 보니, 새로운 길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갑마장길. 총 20km로 이루어진 길인데, 그 안에 10km의 걸음으로 갈 수 있는 '쫄븐 갑마장길'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0km 안에는 조랑말체험공원부터 따라비오름, 대록산, 그리고 유채꽃프라자도 있어 걸음에 다채로움을 선사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떠난 조금은 낯설면서도 신선한 길. 쫄븐 갑마장길의 추억은 꽤나 다채로웠고, 신비로웠다.
짧다 말하기엔 조금은 힘든
쫄븐 갑마장길
조랑말체험공원 - 따라비오름 - 잣성길 - 국궁장 - 큰사슴이오름(대록산) - 유채꽃프라자 - 꽃머체 - 행기머체 - 조랑말체험공원
갑마장길 코스는 가시리 마을 내에 위치한 가시리 디자인 카페 [한가름[을 출발하여 가시리 사거리를 지나고, 설오름과 하잣성길, 따라비오름을 이어 통과한다. 또한 간장과 중잣성길, 큰사슴이오름(대록산)을 지나면 가시천이 나오고 이후 꽃머체와 행기머체를 통과한다. 이후 목장 길을 따라 냇거림, 서잣성길, 해림 목장을 지나오면 안좌동이 보이고 다시 가시리 사거리를 통과하여 가시리 디자인 카페로 돌아오게 된다. 길이는 약 20.2km로 보통 시간당 3에서 4킬로미터를 걷는다 생각했을 때, 약 7시간에서 6시간이 소요되는 코스이다.
여기서 쫄븐 갑마장길은 딱 절반을 걷는 코스이다. 가시리 조랑말체험공원을 시작으로 따라비오름, 잣성길, 큰사슴이오름(대록산)을 지나 유채꽃프라자와 꽃머체, 행기머체를 끝으로 다시 조랑말체험공원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길이로는 10킬로가 조금 넘는다 하지만, 높은 오름을 두 개 올라야 하기 때문에 3시간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이 소요된다.
조랑말체험공원에서 시작하다
제주하면 떠오르는 말. 봄에는 유채꽃이 활짝 피어 반기고, 가을에는 억새가 하늘하늘 흔들리는 이곳부터 걸음을 시작했다. 말들과 인사하고 시작한 걸음. 숲으로 들어서는 쫄븐 갑마장길 초입의 모습에 조금은 긴장되었지만, 한적한 모습에 확실히 생각을 정리하기엔 좋을 거라 판단이 들었다.
험난하다 느껴지는 순간, 따라비오름
쫄븐 갑마장길에 들어선 뒤 깊은 숲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구불구불 원시림으로 이루어진 숲과 옆으로 고여있는 가시천은 마치 머체왓숲길과도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 천천히 거닐며 생각을 정리할 때, 하나의 표지판을 만났다. 바로 따라비오름으로 향하는 이정표. 가을이면 오름의 여왕으로서 아름다운 억새가 사랑스럽게 피는 이곳. 하지만, 명성만큼이나 오르는 길을 가팔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는 기분이 느낄 무렵, 겨우 정상에 도착했고, 숨을 헐떡인 끝에 그래도 올랐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보이는 풍경. 따라비오름의 경이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미친 듯이 광활한 초록 초원과 황금빛 억새의 향연. 이 모든 게 바로 따라비오름에 있었다.
따라비오름 너머 잣성길과 국궁장
따라비오름에서 휴식을 조금 취한 뒤,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넘어 초록빛의 야초지를 지나 도착한 잣성길. 편백나무로 가득했던 길 위에 겹겹이 쌓인 돌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실 잣성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몰랐는데, 이번 걸음을 통해 잣성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3km가 조금 넘는 길을 천천히 거닐며, 국궁장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하고, 대록산을 향해 오르는 걸음. 그 끝에 나는 만났다. 큰사슴이오름이라 불리는 대록산을.
잣성
겹담ㅍ구조의 두 줄로 된 돌담으로 해발에 따라, 상잣성, 중잣성, 하잣성으로 나뉜다. 간장이라고 불리는 잣성은 하천이 없는 제주지역 중산간 목초지에 경계 구분을 위해 축조된 돌담이다. 조선 후기에 설치된 3개의 산마장 중 녹산장과 산장의 경계로서 가시리 마을 공동 목장ㅍ내에는 갑마장과 1429년 세종ㅍ때 축조된 국영목장인 10소장의 경계선을 따라 6km 정도의 제주도 최대의 간장이 자리하고 있다. 가시리는 축조 당시 원형 대부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세 종류의 간장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대록산을 지나 유채꽃프라자로
잣성과 국궁장을 지나 도착한 대록산. 대록산은 내게 낯설면서도 처음 가보는 장소였다. 그렇기에 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멀리서 보아도 따라비오름만큼이나 높은 대록산. 따라비에서 헐떡인 것만큼 또 헐떡여야 된다는 사실에 꽤나 힘들었다. 천천히 걷고 오르며 숨을 고르고 겨우 도착한 정상. 하지만, 오른 만큼 역시나 아름다운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황금빛 억새가 사랑스럽게 펼쳐진 대록산. 다음 가을이 기다려지는 풍경은 정말 그 어느 순간보다 아름다웠다.
마지막 걸음
대록산을 지나 도착한 유채꽃프라자. 억새의 명소답게 이곳은 아름다운 억새풀들로 사랑스럽게 빛났다. 천천히 황금빛 향연을 느끼며 거닌 걸음. 유채꽃프라자에 발이 닿으니 곧 걸음도 끝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정리도 끝날 무렵, 꽤나 어려웠던 걸음은 다음 스텝을 밟을 힘을 주는 듯했다. 모든 괜찮을 거 같은 걸음의 끝. 유채꽃프라자를 지나 꽃머체까지 만난 뒤 걸음은 끝이 났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쫄븐 갑마장길은 제주를 걷는 트레킹 코스 중 궁극의 코스라고. 그 정도로 힘이 드는 걸음이지만, 분명 배울 것도 많고 사랑스럽기도 했던 걸음. 생각의 정리가 필요하다면 이곳을 걸어보자. 쫄븐 갑마장길이 다 괜찮다 말해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