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빌리다 외 4편
정해영
몇 년을 앓고 난 뒤 장애를 얻은 그녀,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주인이 따로 있는 빌린 몸, 되돌려 줄 것을 생각하고 아끼고 헤아 렸어야 했다고, 불편한 하루를 뒤척이는 일은 바다보다 혹한 보다 다스리기가 어렵다 했다
경사 진 밭을 일구며 흙속을 몇 바퀴나 돌아 나온 강물의 노래에 흥건히 가슴 적신 적 있었지만 받은 대로 온전히 돌려주지 못하는 몸, 찢겨지거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물건처럼 가엾다 했다
늘 새롭게 흐르는 생명의 강에 한 발을 담그고 그 분 앞에 설 것을 생각하는 밤, 밑바닥을 긁고 또 긁어 하얀 박꽃 몇 송이 피운다고
평평하고 납작한 오후
수성시장 모퉁이
오래된 쌀가게 할머니
손님이 오면
품이 넉넉한 웃음을 얹어
한 됫박 봉긋이 담아 올렸다
펑미레로 고봉을 날려버린다
한 되를 맞추고
깎여나간 여분은
흰 새처럼 날아갔다
어둠이 평등하듯
바람이 공평하듯
공산품에 쓰인 규격처럼
숫자로 채워지면
온전한 생인 줄 알았는데
삶에 누런 잎이 생긴다
하고 싶은 일을
꿈으로 쌓아 올린 고봉
평미레로 날아가고
평평하고 납작한 오후
딱 한 되다
말이 시시하다
불일암 올라가는 산 길
한 자리에서 수 백 년을
버텨온 소나무를 지나
계곡을 돌고 돌아
나무와 돌과 어린 풀들을
키우는 물소리를 들으면
옆집 젊은 부부가
야반도주를 했다는,
핏덩이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갔다는
사람의 말이 시시하다
나뭇가지가 휘청
휘어지는 것은
조계산에서 굴러 내려온
보름달 때문이 아니라
아래 가지에
햇볕을 나눠 주기 위해서라는
나무의 말을
도토리 줍듯 줍는다
숲속의 선한 빛이
마음을 맑힌다
뼈와 살이 깨끗해 진다
나무아래 솔향을
폈다 오무렸다 하는
작은 버섯
소란스런 세상에 내놓을
말의 우산 같다
응시
정해영
바람이 분다
아늑한 실내 한 모퉁이
돌에 새긴
긴 머리카락이 날리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무지개가 뜬다는
빅토리아 폭포 구릉에서
자란 돌의 머리카락
정과 끌을 쥔
장인의 손에
치렁치렁 감겨
나왔는데
광폭한 생의 덩어리를
쪼개
하루하루를 디자인한
신의 손이 저럴까
무겁고 완강한 돌이
미풍에 날릴 때까지
두드리고 매만지고
쪼갠 흔적으로
예술인줄 몰라
예술이 된 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슬쩍 쓸어 올리고 있다
흰 밤
정해영
가느다란 한 줄기 생각
끊어지지 않는 밤
어둠에 귀를 기울인다
검은 공중을 찢어
흰 목련 꽃송이를 꺼내는
소리
밤이여
칼날보다 정교하게
나누어 디오
이 오래된 근심의
머리와 꼬리
오른쪽과 왼쪽을
끊어질 듯 끊어 지지
않는 한 생각에
밤의 머리가 하얗다
등단지 애지
등단년도 2009년
작품집 시집< 왼쪽이 쓸쓸하다 >
2014년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2021년 제19회 애지문학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