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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지혜의 생생한 형상들
―이선희의 시세계
이은봉(시인, 대전문학관 관장)
최근 들어 대한민국의 많은 예술이 속박과 질곡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시도 뒤죽박죽 뒤섞인 채 아픔과 괴로움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아픔과 괴로움의 터널을 지나면 대한민국의 현실에 새롭고 산뜻한 시가 찾아올 수 있을까. 나로서는 쉽게 짐작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시인들이 시를 나날의 역사적 현재로부터 너무 멀리 도피시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시인들이 자신이 처한 역사적 현재를 잃어버린 채 헤매다 보니 시가 제대로 된 방향을 모색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다.
이제 시인들은 시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위한 나날의 진실 혹은 지혜를 탐구하지 않아도 되는가. 나로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요즈음 들어 시인들이 사람살이 진실 혹은 지혜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오늘의 시가 비판적 미래 전망과 함께하는 역사적 현재를 잃어버리고 데서 오는 듯도 싶다.
역사적 현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잃어버린다는 것이기도 하고, 깨어 있는 일상의 사람살이를 잃어버린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객관적 현실이 지니고 있는 섬세한 세부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최근의 한국시이다. 깨어 있는 삶의 구체적인 장면들보다 미몽의 관념적인 의식들이나 무의식들이 상대적으로 전경화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시라는 것이다.
요즈음의 한국시에 상대적으로 외적 구상(具象)이 약화되고 내적 추상(抽象)이 강화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아마도 이는 지금의 한국시가 남보다는 나에, 타자보다는 자아에 집착해 있는 데서 기인하는 듯도 싶다. 개별적 자아 내면의 의식이나 무의식에 지나칠 정도로 함몰되어 있는 것이 최근의 한국시라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시가 갖고 있는 이러한 모습, 곧 중용을 잃고 있는 모습으로는 한글을 사용하는 예술인구 일반과 심미적으로 호흡하기 어려워 보인다. 독자와의 심미적인 호흡과는 무관한 채 시라는 이름으로 거기 그냥 기투되어 있기만 하면 시라는 존재가 제대로 제 역할을 하거나 기능을 하거나 하기 힘들다. 따라서 정작 필요한 것은 외적 구상의 맹목적인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구상과 함께하는 깨어 있는 의미망의 확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깨어 있는 의미망의 확보가 오늘의 시대와 발맞춰 펼쳐지는 사람살이의 올곧은 진실 혹은 지혜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를테면 오늘의 시가 새롭게 전개되는 지금의 현실에 합당한 정작의 진실 혹은 지혜를 섬세하면서도 구체적인 형상으로 담아낼 수 있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시인 이선희의 이번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은 다름 아닌 이러한 맥락에서 상대적으로 돋보인다. 섬세하면서도 구체적인 형상으로 새롭게 펼쳐내는 사람살이의 진실 혹은 지혜를 설득력 있게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 이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과 함께하고 있는 그의 시들은 시인의 예민하고 섬세한 관찰력에 의지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예민하고 섬세한 관찰력이라고 했지만 그의 시에서 이는 곧바로 통찰력과 통한다. 사실적 형상을 사실적 형상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그와 동시에 사람살이의 진리나 지혜를 한순간에 포착해내는 통찰력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이번 시집과 함께하는 그의 시라는 것이다. 그럼 일단은 다음의 시부터 꼼꼼히 읽어보자.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을
무엇을 쑤셔 넣으면 한없이 들어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비뚤어지게 서 있는 것이
희끗희끗 때 묻은 것이
울퉁불퉁 늘어진 것이
벌써 여러 곳을 거쳐 왔을
바퀴 달린 가죽가방
여행의 경유지나 기착점을 모르는 채
속이 열릴 때까지 지퍼를 닫고 굴러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낡은 바퀴로 끝까지 가 보겠다며
공항 대기실, 의자 옆에 손들고 서 있는
바퀴 달린 가죽가방
―「바퀴 달린 가죽가방」 전문
이 시는 “공항 대기실, 의자 옆에” 놓여 있는 “바퀴 달린 가죽가방”을 묘사하고 진술하는 데 초점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시에 진술되어 있는 “바퀴 달린 가죽가방”은 그저 “바퀴 달린 가죽가방”일 따름이다. 하지만 거듭해 읽다가 보면 이 시에서의 “바퀴 달린 가죽가방”이 시인 저 자신을 상징하는 이미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의 경유지나 기착점을 모르는 채/속이 열릴 때까지 지퍼를 닫고 굴러갈/바퀴 달린 가죽가방”이 주어진 삶의 “끝까지 가 보”려는 시인 자신의 객관상관물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사람살이의 고샅고샅에서 만나는 생활의 도구들로부터도 쉽게 저 자신의 현존적 실재나 사람살이의 진실 혹은 지혜를 발견하고는 한다. 그의 시의 이러한 특징은 벽에 붙어 있는 시계로부터 삶의 ‘경전’을 깨닫고 있는 「시계 경전」 같은 시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자신의 시를 통해 “흰 바람벽이 받들어 모신다/수시로 올려다보는 시계는/때때로 약이 되기도 하는 경전”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 것이 시인 이선희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시계의 “초침 분침 시침”이 “따끔한 침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위의 시들에서 시인이 저 자신의 현존적 실재나 사람살이의 진실 혹은 지혜를 깨닫고 있는 ‘가죽가방’이나 ‘시계’는 공히 일상의 나날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소품들이거나 사물들이다. 생활의 이곳저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소품들 혹은 사물들을 매개로 저 자신의 현존적 실재나 사람살이의 진실 혹은 지혜를 깨닫고 있는 것이 시인 이선희의 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날의 사람살이 함께하는 다양한 소품들이나 사물들을 매개로 저 자신의 현존적 실재나 사람살이의 진실 혹은 지혜를 탐구해온 것이 그의 시라는 것이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면은 다음의 예에 의해서도 익히 확인이 된다.
반경 안에서 움직이는 것들에만 반응하는 습성이 있다
반경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에 의해서만 밝아진다
더러는 헛것으로 밝아지기도 하고
가끔은 착각으로 밝아지기도 한다
반경 안에 들어와 팔을 휘젓는 물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필요 없이 반응하거나 너무 늦은 반응으로 자주 의심을 산다
혼자 켜지고 꺼진다
울다가 웃는다 혼자
좀처럼 반경 안으로 들어서려 하지 않는 물체를 기다린다
오래전부터 준비 완료 상태로 어둠 속에서 늙고 있다
―「센서 등」 전문
이 시에서도 시인은 나날의 일상에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소품들이나 사물들로부터 깨닫는 저 자신의 현존적 실재, 나아가 사람살이의 진실이나 지혜를 포착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소품들이나 사물들이 이 시의 경우에는 물론 ‘현관의 센서 등’을 뜻한다. 그렇다. 이 시에서 ‘현관의 센서 등’은 “반경 안에서 움직이는 것들에만 반응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반경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에 의해서만 밝아”지는 것이 센서 등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현관의 센서 등’이 “더러는 헛것으로 밝아지기도 하고/가끔은 착각으로 밝아지기도 한다”는 것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반경 안에 들어와 팔을 휘젓는 물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필요 없이 반응하거나 너무 늦은 반응으로 자주 의심을” 사기도 하는 것이 ‘센서 등’이라는 얘기이다.
이 시의 여기쯤 읽다가 보면 예의 ‘현관의 센서 등’이 시인 저 자신의 객관상관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인이 저 자신의 현존적 실재에 대한 깨달음을 ‘센서 등’에 빗대어 노래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센서 등’을 두고 “혼자 켜지고 꺼진다/울다가 웃는다 혼자”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에 이르러 좀 더 구체적으로 징험이 된다. “좀처럼 반경 안으로 들어서려 하지 않는 물체를 기다”리는 ‘센서 등’, 곧 “오래전부터 준비 완료 상태로 어둠 속에서 늙고 있”는 ‘현관의 센서 등’으로부터 진실하고 지혜로운 모습의 시인 자신의 모습을 읽기는 어렵지 않다.
이 시에 드러나 있는 ‘현관의 센서 등’에서 읽을 수 있는 시인의 진실이 얼마나 지혜롭게 저 자신을 현현해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덧붙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앞의 시 「바퀴 달린 가죽가방」에서도 시인의 진실이 포착하고 있는 지혜로운 삶의 국면들이 익히 확인된 바 있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의 소품들이나 사물들로부터 깨닫는 시인 자신의 진실하고 지혜로운 모습은 「마른미역」 같은 작품에서 이내 확인이 된다. “바싹 쪼그라들어 있”는 “까칠하게 마른미역”, 즉 “물에 넣으니 금세 부풀어 오”르는 마른미역에서도 시인 저 자신이 깨닫고 있는 진실하고 지혜로운 현존적 실재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의 소품들이나 사물로부터 깨닫는 시인 자신의 진실하고도 지혜로운 모습은 「엄마의 칼」과 같은 작품에도 여실하게 드러나 있어 관심을 끈다. “밭에서 시금치를 캐고 있”는 엄마의 “뭉툭해진 칼”에서, 곧 엄마에 의해 “밭고랑에 던져둔” “흙이 묻은 칼”에서 저 자신의 현존적 실재를 진실하면서도 지혜롭게 깨닫고 있는 것이 시인 이선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사람살이의 이런저런 소품들이나 사물들로부터 저 자신의 진실한 현존적 실재만을 엿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예의 소품들이나 사물들로부터 비롯되는 엉뚱한 발상을 통해 사람살이 일반이 지니고 있는 비극적 상황을 압축해내기도 하는 것이 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회원카드 신용카드 대출카드로
흥청망청 재미나게 살았다
어느 날 옐로카드 레드카드가
그를 낭떠러지로 밀어붙였다
이제 술과 꽃과 음식이 자동으로
배달되는 검은 카드 한 장 앞에 꽂았다
―「비석」 전문
이 시의 제목은 비석이다. 하지만 이 시의 본문에 비석이라는 어휘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다. 서두를 장식하는 “회원카드 신용카드 대출카드”로부터, 나아가 “배달되는 검은 카드”로부터 그저 우회적으로 비석을 연상해낼 수 있을 뿐인 것이 그의 이 시이다. 그렇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단말기에 꽂혀 있는 신용카드로부터 반석 위에 꽂혀 있는 비석을 연상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으로 지금 이곳 사람들이 처한 사람살이의 현실을 응축해내고 있다. “회원카드 신용카드 대출카드”로 “흥청망청 재미나게 살”다가 그것이 “어느 날 옐로카드 레드카드가” 되어 “낭떠러지로” 떨어뜨리는 사람살이의 현실 말이다. 물론 이 시의 말미에 표현되어 있는 “이제 술과 꽃과 음식이 자동으로/배달되는 검은 카드 한 장 앞에 꽂았다”는 말로 비석을 연상시키고 있는 대목도 두루 관심을 끈다.
일상의 이런저런 소품들이나 사물들로부터 깨닫는 시인 자신의 현존적 실재나 사람살이의 진실 혹은 지혜는 「함정에 빠진 소」, 「빨래 일가족」, 「오렌지 부처」 등의 시에서도 확인이 된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다른 한편으로 이들 소품들이나 사물들로부터 가까운 사람들의 삶을 발견하기도 하고 깨닫기도 하고 한다. 「박태기」 같은 시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특이한 꽃을 피우는 이 ‘박태기’로부터 시인이 “그를 위해 밥을 하고/그를 위해 꽃이 되고 싶”은 “넉넉한 사랑”을 발견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을 막 패대기쳤을 것 같은 박태기는
굵은 근육도 없고 키도 작으면서
성질만 불같은 남자네
커다란 그늘이 있는 나무가 아니네
사철 푸른 나무도 아니네
하트 모양 잎사귀가 달리는
넉넉한 사랑이 가득한 나무네
그를 위해 밥을 하고
그를 위해 꽃이 되고 싶네
그의 몸에 달라붙어 간지럼을 태우다가
주렁주렁 그의 열매를 낳고 싶네
그의 하트 잎사귀가 커지면
그 속에 아예 들어가 살고 싶네
―「박태기」 전문
이 시에서 ‘박태기’는 서두부터 ‘성질만 불같은 남자’로 의인화된다. “삶을 막 패대기쳤을 것 같은”, “굵은 근육도 없고 키도 작으면서/성질만 불같은 남자” 말이다. “커다란 그늘이 있는 나무가 아니”고 “사철 푸른 나무도 아닌” 박태기! 그래도 그가 보기에는 이 ‘박태기’가 “하트 모양 잎사귀가 달리는/넉넉한 사랑이 가득한 나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몸에 달라붙어 간지럼을 태우다가/주렁주렁 그의 열매를 낳고 싶”은 박태기, 사람의 이름 같기도 한 이 박태기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을 듯싶다. “그의 하트 잎사귀가 커지면/그 속에 아예 들어가 살고 싶”은 남자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이들 구절로 미루어 보면 시인이 “아예 들어가 살고 싶”은 남자는 더없이 행복할 것으로 보인다. “그를 위해 밥을 하고/그를 위해 꽃이 되고 싶”은 여자가 늘 곁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살이의 이런저런 소품들이나 사물들로부터 그는 저 자신만이 아니라 적잖은 타자들도 깨닫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은 이들 소품들이나 사물들로부터 긍정적이고 모범적인 타자를 발견하고 있는 시부터 함께 읽어보기로 하자.
각이 있거나 볼품없이 길쭉하지 않다
너무 둥글지 않아 쉽게 굴러다니지도 않는다
얇고 매끈한 껍질 벗겨 먹기가 쉽다
그렇지만 자기 빛깔은 분명하다
적당히 작아 만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속에 많은 씨앗도 있다
쉽게 상하지 않을 근육은 두툼하다
알고 보면 내면에 여백도 있어
너무 진하지 않게 향기도 낼 줄 안다
―「참외의 조건」 전문
이 시 역시 자연물로서의 참외 그 자체보다는 참외로 상징되는 어떤 인물형상을 함축하는데 초점이 있다. 물론 이 시에 참외로 상징되어 있는 사람으로부터 시인 저 자신의 진실하고 지혜로운 인물형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시인 저 자신의 진실하고 지혜로운 인물형상보다는 참외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너무 진하지 않게 향기도 낼 줄” 아는 어떤 객관적 사람을 그리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해야 옳다. 이때의 어떤 인물형상을 시인은 “각이 있거나 볼품없이 길쭉하지 않”은 참외의 모습으로 드러낸다. 이때의 인물형상은 그뿐만 아니라 “너무 둥글지 않아 쉽게 굴러다니지도 않는” 넉넉한 존재이다. “벗겨 먹기가 쉽”기는 하지만 “자기 빛깔은 분명”한 인물형상 말이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염두에 두고 시인은 “적당히 작아 만만해 보이기도 하지만/속에 많은 씨앗도 있”는 이 인물형상을 창조했을까. “쉽게 상하지 않을 근육”이 “두툼”한 이 사람 말이다. 시인이 보기에는 “알고 보면 내면에 여백도 있어/너무 진하지 않게 향기도 낼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자연의 사물인 참외로부터 그가 발견하는 긍정적이고 모범적인 인물형상은 “벗겨 먹기가 쉽다”는 등의 표현으로 보아 어렵거나 낯설지 않은 친근한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그가 그려내는 긍정적이고 모범적인 사람은 「장미의 의도」, 「파」, 「딱따구리 식당」과 같은 시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이 된다. 이들 시는 공히 사람살이의 소품들이나 사물들을 소재로 삼고 있거니와, 이들 사람살이의 소품들이나 사물들로부터 삶의 진실한 형상들을 발견하고 있는 그의 솜씨는 실로 놀랍다. 사람살이의 사물들이나 일상의 소품들로부타 일상의 나날이 지니고 있는 진실한 가치나 올곧은 의지를 발견하거나 깨닫고 있는 것이 시인 이선희라는 것이다. 다음의 시야말로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가시 하나쯤 달고 펼쳐진 길 묵묵히 걸어가는 줄기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쉽게 짓이겨지지 않고 한 철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억센 이파리로 살고자 했을 것이다
어쩌다 불쑥불쑥 내밀어지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얼굴 쑥스러웠을 것이다
고된 노동의 냄새를 숨기려 엉뚱한 향수를 뿌리고 한참을 휘청거렸을 것이다
자꾸 의도에서 벗어나는 삶에 무던히도 온몸을 흔들었을 것이다
색깔을 바꾸어가며 살랑대는 뻔뻔한 얼굴이 만발했을 때였을 것이다
믿는 구석이나 되어주자고 줄기와 이파리는 더 진해지고 더 굵어졌을 것이다
―「장미의 의도」 전문
이 시에서도 또한 시인 이선희는 장미 그 자체를 그려내는 데 초점을 두지 않는다. 시인에 의해 창조된 장미로 상징되는 어떤 사람의 의지나 바람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시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어떤 사람이 그가 생각하는 긍정적이고 모범적인 인물형상이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장미로 상징되는 예의 인물형상은 일단 먼저 “가시 하나쯤 달고 펼쳐진 길 묵묵히 걸어가는 줄기가 되고 싶”은 존재이다. 시인이 보기에는 “ 쉽게 짓이겨지지 않고 한 철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억센 이파리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쑥스럽지만 “어쩌다 불쑥불쑥 내밀어지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그라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긍정적이고 모범적인 인간, 완벽하지는 않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은 인간형상을 시인은 지금 이 시에서 ‘장미의 의도’라는 이름으로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 이선희가 장미로부터 “고된 노동의 냄새를 숨기려 엉뚱한 향수를 뿌리고 한참을 휘청거렸을” 수도 있는 인물형상을 창조해내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한편으로 그는 장미로 상징되는 이 인물형상이 “자꾸 의도에서 벗어나는 삶에 무던히도 온몸을 흔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색깔을 바꾸어가며 살랑대는 뻔뻔한 얼굴이 만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도 구태여 시인이 저 자신의 시에서 이들 인물형상을 창조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물론 여기서 그 까닭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시인 또한 저 자신이 바라고 기대하는 진실하고도 순수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장미’로부터 깨닫고 있는 예의 인물형상은 시인이 세상을 향해 바라고 기대하는 긍정적이고도 모범적인 인물형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조금쯤 돌려 생각하면 이때의 긍정적이고도 모범적인 인물형상은 그가 저 자신을 향해 바라고 기대하는 긍정적이고도 모범적인 인물형상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인물형상은 그의 다른 시에도 잘 나타나 있어 좀 더 주목을 요한다. 다음의 예는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돋보이는 시라고도 할 수 있다.
대충 토막 쳐져 국물만 빼내도 그만이다
송송 썰려 당신에게 스며들다가
어슷어슷 썰려
누구의 보색으로 살아도 그만이다
메인으로 매운맛을 내며
종종 따끔한 쓴맛도 보여주고
뒷맛은 의외의 단맛으로 갈무리하고 싶다
뿌리 자르고, 누런 잎 떼어내고
손과 발 깨끗하게 씻고 나선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서슬 푸른 줄기
진액 농도로 잘릴지언정 허리 굽히지 않는다
―「파」 전문
이 시는 제목 그대로 흔히 음식의 양념으로 쓰이는 ‘파’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의 다른 많은 시가 그렇듯이 이 시에서의 ‘파’도 의인화되어 있는 자연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의인화된 사물이라는 것은 여기서의 ‘파’도 또한 인물형상을 상징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파’로 상징되는 인물형상은 ‘파’로 상징되는 인물형상인 만큼 사람살이에서 양념의 기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양념의 기능을 하며 사는 사람도 매우 중요하기 마련이고 또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가 비록 “대충 토막 쳐져 국물만 빼내도 그만”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송송 썰려 당신에게 스며들다가/어슷어슷 썰려/누구의 보색으로 살아도 그만”인 사람이 다름 아닌 양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양념의 역할을 하며 사는 사람을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역할을 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부른들 어떠랴. 시인은 이처럼 봉사하고 희생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 곧 양념의 역할을 하며 사는 사람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 실제로는 시인 저 자신이 양념의 역할을 하며, 곧 봉사와 희생의 역할을 하며 살고 싶어 하는 지도 모른다. 그가 이 시에서 “메인으로 매운맛을 내며/종종 따끔한 쓴맛도 보여주고/뒷맛은 의외의 단맛으로 갈무리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심지어 저 자신의 삶이 “뿌리 자르고, 누런 잎 떼어내고/손과 발 깨끗하게 씻고 나”서기를 바랄 정도이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서슬 푸른 줄기/진액 농도로 잘릴지언정 허리 굽히지 않”고 사는 삶 말이다. 그의 이러한 삶이 진실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바탕으로 바르고 옳은 세상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처럼 자신의 시를 통해 일상의 무수한 소품들과 사물들로부터 사람살이의 정작의 인물형상을 깨닫고 발견하며 진실 혹은 지혜를 추구해온 것이 시인 이선희이다. 예의 소품들이나 사물들이 더러는 문명의 것이고 더러는 자연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모든 것들이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이는 능력, 곧 인간으로 치환해 받아들이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시인 이선희이다. 그의 시에서 이들 소품들이나 사물들은 사람과 대등하고 동등하게 대접받고 있거니와, 이는 그가 그것들로부터 늘 고귀한 생명을 깨닫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들 생명을 소중하게 받들고 모시지 않고 인류의 미래는 물론 지구 공동체의 미래도 밝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있겠는가.(2022.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