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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는 쉼터가 있습니까?
33: 12-23
12.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15.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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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쥐를 가지고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쥐들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 놓고 생활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쥐들은 어느 순간에까지는 새끼도 낳고 서로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숫자가 많아지니까 생식활동도 중단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새끼가 태어나도 얼마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좁은 공간 안에 쥐들을 많이 넣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서로 싸우고 물고 죽이는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반사회적이고 혼란스러운 행동을 ‘행동 파멸’(behavioral sink)이라고 부릅니다.
왜 쥐들이 좁은 공간에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일까요? 그것을 실험했던 심리학자들은 ‘쥐들이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화가 나서 파괴적인 행동을 한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쥐나 동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도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자기만의 공간이 침범당했다고 생각되면 몹시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 자기만의 공간을 심리학에서는 ‘개인 공간’(personal space)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의자가 많은 공원에 아무도 없이 혼자 앉아 있는데, 낯선 사람이 오더니 그 많은 의자를 놔두고 내가 앉아 있는 의자에 와서 앉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혹 자기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기도 합니다. 분명 그 사람이 자기 옆에 앉는 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데도, 자신만의 공간이 침범당한 것처럼 불쾌하게 생각이 듭니다.
남자분들은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가면 소변기가 여러 개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새로 들어온 사람은 한 사람이 서 있는 바로 그 옆 소변기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붐빌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한가할 때에는 꼭 한 칸 떨어져서 사용하거나 멀리 있는 것을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 곁에 바짝 붙어 있으면 서로가 불편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두 무의식적으로 ‘개인 공간’이라고 부르는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기 때문입니다. 남의 집이 아무리 잘 꾸며진 멋진 집이라 하더라고 별로 볼품없는 내 집만큼 편안하지 못합니다. 나를 위한 나만의 공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에게 공간이라는 장소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창세기 2:8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간이 안식할 수 있는 ‘에덴동산’이라는 공간을 마련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장소에 있는 한 언제나 행복했습니다. 모든 것에 만족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만의 공간’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쩌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가서 살았는데, 아들을 낳자마자 에녹성이라는 성을 쌓았습니다. 자신들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가인의 후예인 우리 인간들도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것도 자주 더 큰 공간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단칸방에 살던 사람은 방 두 칸짜리를 얻어 이사를 합니다. 전세를 살던 사람은 자기 집을 갖고 싶어서 아파트를 삽니다. 처음에는 20평짜리에 살다가 그것도 좁다고 생각해서 30평, 40평으로 이사를 합니다. 20평에 살아도 전혀 불편이 없는데도 더 넓은 곳을 원합니다.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마음, 나만의 공간을 더 확보라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넓은 공간을 확보한다고 우리가 행복하고, 영혼이 쉼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은 그렇게 넓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쉼터라는 공간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돌아오는 사이에, 산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죄악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3,000명 가량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습니다. 백성의 죽음을 가슴아프게 바라보던 모세는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만일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려면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는 하나님의 진노가 다소 누그러졌습니다. 그리고 33장에 오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다소 누그러지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셔야 합니다.’ 모세의 간절한 기도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함께 하겠다는 약속의 징표로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본문 18절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20절에서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모세에게 한 장소를 지정하여 주십니다. 그 곳에 서면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할 것이지만, 등은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21절에 보면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틈 사이에 두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덮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공간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지정하여 주신 공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보고 싶어 하는 모세에게 “한 곳(한 공간)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반석 틈에 두시고 당신의 손으로 그를 덮어 주셨습니다.
물론 지리적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지정하여 주신 그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그 바위틈을,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머물면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던 그로 그 곳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모세의 장소와 엘리야의 장소가 정확하게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엘리야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곳에서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9:1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섰으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곳을 엘리야에게 지정하여 주신 장소라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 분이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장소를 지정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거룩한 장소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투자 가치가 있는 공간, 내게 뭔가 큰 이익을 줄 수 있는 공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공간은 결코 넓은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그 공간을 “반석 틈”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위 사이에 자그마한 공간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공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장소도 결코 넓은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호렙산에 있는 한 작은 동굴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 넓은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늘 보다 넓은 장소를 갖고 싶어 합니다. 공간이 넓을수록 우리의 삶이 보다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화처럼 잘 아는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목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입니다.
소작농이었던 ‘빠흠’이라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농부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땅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어떤 농부로부터 ‘살기 좋고 기름진 땅을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재산을 다 정리하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곳 촌장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의 조건은 ‘1,000루불만 내면 하루 동안 걸어 다닌 땅을 모두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단 그 날 해가 넘어가기 전에 출발한 그 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다음날 빠흠은 땅을 자치하기 위해서 들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열심히 좋은 땅들을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다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더 멀리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숨가쁘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지면으로 막 숨고 있을 때, 빠흠은 드디어 처음 출발했던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욕심을 부려서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숨 가쁘게 뛰어 하루 종일 돌아다녔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빠흠을 위해서는 그가 누울 수 있는 6척 구덩이만이 필요하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빠흠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농부 빠흠처럼, 오늘 우리도 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의 온 인생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좁은 바위 틈!’ 그곳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위하여 마련해 두신 공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필요한 공간은 그렇게 큰 공간이 아닙니다. 엘리야의 동굴처럼, 그리고 모세의 바위틈처럼 그 공간은 지극히 작은 공간일 뿐입니다.
세 번째로, 모세의 공간은 “하나님 곁에 있는” 자리였습니다.
2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마련해 주신 공간은 하나님 곁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모세의 자리가 하나님 곁에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하
심 아래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준비된 하나님 곁의 한 작은 바위틈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손으로 감싸시고 보호해 주시는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장소가 진정으로 우리의 쉼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참된 안식을 얻지 못하였다’는 성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의 품안에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말씀에서도, 인간이 참된 안식과 쉼을 얻는 그 하나님의 품을 “하나님의 곁에 있는 작은 바위 틈”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이라는 공간을 주셨듯이,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 뿐만 아니라 젊은이나 나이 많이 드신 노인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에까지 우리에게는 어떤 형태로든지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공간을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공간, 어떤 장소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공간, 어떤 장소를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투자 가치가 있는 공간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수 있는 장소를 갖기 원한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2,000년 전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찾아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묵으실 여관 하나 없었습니다. 세상은 창조주를 모실 방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모시기를 거절하고 대신 마굿간으로 쫓아냈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필요한 공간을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외양간과 말구유를 하나님의 장소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공간을 갖지 못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탄식하신 분이 우리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로 내어쫓기고, 산으로 내어 쫓기어서 거기에서 밤을 지새우곤 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으실 때에도 자신의 공간이 없어서 남의 무덤을 빌어 장사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당신만의 공간을 갖지 못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공간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당신을 위한 공간이 없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영원한 공간을 마련하시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4: 2-3절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당신의 영원한 공간이 있으셨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당신의 공간 하나 갖지 않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 영원한 공간을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에 영원한 처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하늘의 영원한 처소를 바라보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지금 안식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모세에게 ‘바위 틈’이라는 은혜의 공간을 주셨듯이,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산에 있는 한 작은 동굴을 하나님과 만나는 공간으로 주셨듯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장소를 주십니다. 우리의 피곤하고 지친 영혼과 몸이 쉴 수 있는 안식처요 쉼터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만의 공간, 나만의 쉼터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쉼터를 찾으셨습니까?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평안과 안식과 쉼을 얻을 수 있는 참된 쉼터를 발견하셨습니까? 아직 그 쉼터를 찾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아직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의 공간으로 주신 바로 그 쉼터를 찾지 못하셨다면, 오늘 거룩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이 성전을 떠나시기 전에 그 쉼터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의 공간, 영혼의 쉼터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세 가지 쉼터를 허락하셨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에게 주신 우리만의 공간, 은혜의 장소는 ‘가정’이라는 쉼터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만들어 주신 최초의 제도입니다. 안식일보다도, 또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보다도 먼저 주신 아름다운 제도요 쉼터가 바로 가정입니다.
밖에서 아무리 힘들고 짜증나는 일이 있더라도, 가정에 들어오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고 가정의 따스함 속에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가정은 우리의 쉼터입니다. 지친 몸과 마음이 안식을 얻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쉼터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나와 우리 식구 모두에게 우리의 가정인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안겨다 주는 쉼터입니까? 때로 우리의 가정이 우리를 더욱 피곤하게 하거나 피하고 싶은 장소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쉼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가정이 범죄로 인하여 무참히 깨어져버렸듯이, 우리의 가정이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의 가정이 여전히 우리의 진정한 쉼터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루 빨리 가정의 쉼터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정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진정한 쉼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에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공간, 또 하나의 쉼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자리입니다. 모세가 성막에 들어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 위에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히 임하였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던 이사야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도중에 영광의 하나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전은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자리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주시는 장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이 성전에 들어오실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나만의 공간에 들어온 것처럼 아늑하고 푸근한 느낌이 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 주신 은혜의 장소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는 성전에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집에 가득한 것을 이사야처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곳이 우리에게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전 안에서 세상의 욕망과 죄악을 찌꺼기들이 깨끗이 씻기어지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걱정과 고민을 가득 안고 찾아왔어도 이 성전을 떠날 때에는 마치 천사와 같이 모든 걱정을 훌훌 벗어버리고 하늘에서 주어지는 기쁨을 가득 안고 돌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의 쉼터가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떠나가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런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확실한 은혜의 장소, 쉼터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 무엇도 이곳에서는 우리를 쫓아낼 수 없는, 가장 확실한 나와 우리만의 공간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쉼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 바로 곁에 있는 우리의 쉼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주실 공간과 장소를 예비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장소와 공간에 막힌 담들을 다 헐어버리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공간이요 우리의 영원한 쉼터가 되어 주십니다. 이 세상의 어떤 권력에도 제한받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의 여관에 있는 우리의 쉼터입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매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우리가 내 인생의 여정에서 쉼터를 갖고 싶어도 쉼터를 찾지 못해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진 채 고뇌가 가득한 생을 살아가시는 분에게 우리 주님은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확실한 쉼터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 가정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분,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서조차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앞에서도 내 영혼이 평강을 발견할 수 없으신 분들에게도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쉼터가 되어 주십니다.
여러분! 힘든 세상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진정한 평강을 원하십니까? 아직도 내 삶에서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쉼터를 찾지 못하셨습니까? 우리의 쉼터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쉼터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위틈에 두시고 당신의 손으로 친히 보호하셨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쉼터를 마련하시고 누구든지 그 안으로 들어오는 자를 보호하시고 영원한 안식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쉼터가 있어야 합니다. 지치고 피곤한 영혼이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넓은 지리적 장소에서 우리의 공간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참된 안식처, 쉼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욕심의 자리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간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그 공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쉼터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모세를 당신의 손으로 덮어 보호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쉼터에서 두 손으로 우리를 덮어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성전에 잘 오셨습니다. 그냥 돌아가지 마시고 우리를 넓고 크신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영원한 쉼터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된 인생과 영혼의 쉼터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기쁨을 안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주간 동안, 아니 평생 동안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쉼터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귀하신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신 여러분의 심령과 한 주간의 삶에 늘 함께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