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굴곡진 한일관계와 과거사의 비극을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불의에 맞서 싸우는 길을 선택한 선조들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널리 알리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후대의 책무다.
현대사 큰 발자취 남긴 죽산 선생
조국독립투쟁에 앞장선 불굴의 혁명가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죽산 조봉암 선생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60년이 흘렀다. 2011년 1월. 대한민국 대법원은 조봉암 선생의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지만, 죽산 선생의 명예회복은 아직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이념의 경계를 넘어 한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조봉암 선생이 세상을 떠난 7월 31일을 앞두고, 죽산 선생의 일생을 재조명 해 본다.
▲죽산 조봉암 선생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 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조봉암 선생의 유언)
1899년 9월 25일.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조봉암은 1911년 강화초등학교 졸업 후 농업보습학교를 진학하지만 극심한 가난으로 학업을 포기한다. 생계를 위해 강화군청 사환으로 복무하던 조봉암은 강화읍교회(현 강화중앙교회) 청년단의 중심이 되어 1919년 3월 18일 강화만세시위에 참가한다.
이후 조봉암은 강화읍교회 청년단 동지들인 구연준, 김한영, 김영희, 주창일, 조구원, 고제몽, 오영섭 등과 3차 만세시위를 준비하는데, '예수교도 8인조'로 불린 이 비밀결사대는 일경에 의해 전원 검거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에 시달린 조봉암은 수감생활을 계기로 독립투사의 길을 결의한다.
▲인천 고려정미소 앞의 조봉암 (맨 왼쪽의 흰옷 입은 사람이 조봉암 선생)
1921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간 조봉암은 엿장수를 하며 세이소쿠 영어 학교와 주오대학을 수학한다. 박열, 김약수, 원종린과 아나키스트 모임 흑도회를 조직한 조봉암은 니가타현 사마노가와댐 공사장에서 일어난 조선인노동자 집단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투쟁을 진행하지만, 아나키스트의 관념적 유희에 실망을 하여 사회주의 항일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1922년 소련에서 열린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에서 한국인 공산주의자 대표로 참석한 조봉암은 12월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지만, 다음 해 폐결핵으로 중퇴하고 비밀리에 귀국한다. 귀국 후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과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한 조봉암은 이후 상하이 코민테른 간부로서 독립운동에 힘쓴다.
▲조봉암 선생의 첫사랑 김이옥 여사와 장녀 조호정
“수감생활과 석방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집안이 풍비박산 납니다. 1939년에 가석방되고 보니 가족들은 다 흩어지고, 딸 조호정은 인천의 먼 친척에게 보내져 의탁 중이었지요. 조봉암 선생의 활동 근거가 상해다 보니 국내에서는 도움을 받을 지인이 많지 않았나 봅니다. 인천에서 정미소 하는 사람들이 조봉암 선생을 도와주었는데요, 이 분들 중에 사회주의계열이 많았나 봐요. 호구지책으로 조합장이 되었는데, 기관장으로서 방위성금을 낸 것이 문제가 되어 독립유공자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조봉암 선생이 정말 친일을 했다면 1945년 1월에 불량선인(일제가 자신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인을 이르던 말)으로 지목되어 예비검속이 되었겠습니까. 죽산 연구자라면 누구나 한 목소리로, 조봉암 선생의 친일흔적은 찾을 수 없다고 단언 합니다.”
1948년 초대 농림부장관 취임
조호정 여사의 손주사위인 (사)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유수현 이사는 서훈 추서가 이뤄지지 못한 현실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1945년 8월 15일. 헌병대 감방에서 광복을 맞이한 조봉암 선생은 석방 되자마자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한다. 인천민주주의민족전선 회장으로 활동하던 조봉암 선생은 폭력혁명을 제창하는 볼셰비즘에 실망하고 ‘친애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란 서신을 띄우게 된다. 이 서신은 주한미군 CIC방첩대에 의해 윤색되어 언론에 공개 되었는데, 그 결과 조봉암은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게 된다.
▲헌법기초의원
▲농지개혁법 표
조봉암 선생은 극좌와 극우 모두를 배척하고, 최초의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1948년 초대 농림부장관에 취임한 조봉암 선생은 농지개혁법을 입안하고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기반을 다진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은 빈농의 나라, 지주의 나라였습니다. 식민지 지주제 하에서 소작농은 수확량의 60%를 지주에게 지대로 바쳐야 했지요. 이러한 불합리한 구조에서 조봉함 선생이 소농위주의 농지개혁을 실시 한 것입니다. 땅이 생긴 자작농들은 신이 나서 일을 했고, 농업생산성의 상승으로 축적된 잉여재산은 자식교육으로 이어집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기반이 마련 된 것이죠. 옛 어르신들 중에, 내 자식 학교는 죽산 선생이 보냈다고 말씀 하시는 분들이 있으세요. 한국전쟁 때 기록을 보면, 한 미군 장교가 엄동설한에 제대로 의복도 갖추지 못한 한국군에게 왜 이렇게 열심히 보초를 서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한국군은 지켜야 할 땅이 있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조봉암 선생의 토지개혁은 대한민국의 유례없는 경제성장의 기원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1951년 5월 8일 제2대 국회의장단(조봉암, 신익희, 윤치영)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국회에서 의사진행을 하는 국회부의장 조봉암(부산 무덕관)
유수현 이사에 따르면 조봉암 선생의 업적은 이 뿐이 아니다.
인천 병구에서 무소속으로 2대 총선에 당선된 조봉암 선생은 국회부의장이 되어 한국전쟁 발발 후 국회의 품의를 지켰다고 한다. 가족을 지키는 대신 국회 기밀서류를 싣고 남하한 조봉암 선생. 그 때문에 정작 서울에 남은 첫 번째 부인 김조이 여사는 납북 되어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조봉암 선생은 2등으로 낙선한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 등록에 실패한 조봉암 선생은 다시 1956년에 ‘책임정치 수립, 수탈 없는 경제 실현, 평화통일 성취’등을 내걸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 논의 중에 신익희 후보가 사망하게 되고, 이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290여만 표 차이로 2등으로 낙선하게 된다.
▲진보당의 정견을 소개하기 위해 창간했던 중앙정치 표지
▲대통령 선거당시 홍보물
두 차례의 대선 도전으로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의 존재가 장기 집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 평화통일론은 북진 통일이라는 국시의 위반이며, 간첩과 접선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한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장택상과 윤치영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7월 30일 재심 청구가 기각 되고, 7월 31일 오전 11시, 마침내 사형이 집행 된다.
“동료 분들이 시신을 모시러 갔더니, 빨리 장사를 지내라고 압력을 가했답니다. 모시고 온 다음날 망우리 묘지를 갔는데, 자리가 하나 딱 남아 있었대요. 누군가 준비했다가 못쓰게 된 묘지였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그 곳에 안장을 하게 되었죠. 장례식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강제 해산을 시켰죠.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 선생의 처형에 대해 철저하게 언론 통제를 했고, 언론들은 침묵하게 됩니다. 유족들은 묘지 앞에 백비(白碑)를 세웠습니다. 대게 비석에는 살아온 내력이나 공적을 새기기 마련이지만, 분하고 원통하여 할 말을 잃었기 때문에 비문 제작을 거부 한 것입니다.”
유 이사가 들려준 백비(白碑)이야기는 해방 이후 더 큰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 했던 독립지사들의 신산한 삶을 상징하는 것 같아 더욱 애달프게 느껴졌다.
▲백비 (강화뉴스제공)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사회주의계열 독립투사로서, 해방 이후에는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서, 1950년대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진보정당의 지도자로서 역사가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마다 맞서 싸웠던 죽산 조봉암 선생.
백비 앞에 서서 조봉암 선생이 소망했던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복지사회의 꿈을 결코 잊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