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재봉틀
신아문예대학 수필가 구연식
나의 어머니 새댁시절의 유일한 유품인 재봉틀이 남아있다. 어머니는 실오라기와 관련된 것들을 늘 가까이하셨다. 처녀 시절에는 서울에 있는 ‘경성방직 주식회사’에서 1940년대 초반까지 근무하셨다. 결혼 후에도 모시와 삼베 그리고 무명천과 관련된 길쌈도 늘 함께 하셨다. 그래서인지 새댁때는 재봉틀을 장만하셔서 삯바느질도 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어느 날 시골집 창고 문을 여니 봉창 사이로 햇빛 한 줄기가 비추는데 거미줄에 뒤엉켜 우두커니 앉아있는 어머니와 재봉틀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세간들을 정리한다고 처마 끝에 잠깐 놓아두었는지, 재봉틀 나무 부분이 빗물에 부풀려져 너덜너덜해졌다. 순간 소홀히 하여 잃어버린 아버지의 짐바리 자전거가 생각났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아들 집을 찾아왔는데 너무 일찍 오셔서 문을 열 수가 없자 날이 새도록 처마 끝에서 비를 맞으며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셨다. 옷은 젖어서 덜덜 떨다가 들어오신 어머니 모습처럼 재봉틀이 보여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나는 재봉틀의 먼지를 털고 수건으로 닦아서 승용차 뒷좌석에 실었다. 생전에 어머니를 모시듯 아파트로 와서 거실 옆 내 눈높이 베란다에 놓았다. 어머니는 눈썰미가 있으시고 손끝이 야무져서 어지간한 생활 의복은 직접 옷을 만드셨다. 어머니의 재봉은 수준급은 아니어도 그 시절 양복점은 큰 도시 쪽에나 있었고, 옷 수선집은 생각도 못했던 때라 어머니의 재봉틀 부업은 괜찮은 편이었다. 당시 마을 앞에는 육군 27연대 영외 숙영지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군인들의 피복은 몸의 치수에 맞게 호수가 나오지 않아서 구럭 같은 군복을 몸에 맞게 줄여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 어머니의 재봉 솜씨가 군부대까지 알려져서 군인 아저씨들이 우리 집에 와서 옷 수선을 맡기셨다. 나는 가끔 방과 후에는 어머니가 수선한 군복을 부대 앞 정문에서 아저씨에게 갖다 드리고 삯을 받아 오기도 했다.
특히 여름철 모시 등거리나 삼베 잠방이는 어머니가 주로 만드시는 옷이어서 우리 집은 물론, 동네 사람들도 가끔 어머니에게 주문하여 입기도 했다. 나는 추석이나 설이 제일 싫었다. 어머니는 시장 포목점에 가셔서 양복 옷감을 떠다가 재단하셔서 나의 양복을 지어주셨다. 어쩐지 어머니의 실력이 미덥지 않아 사람들이 내 옷만 쳐다보는 것 같아 학교 갈 때는 윗도리를 벗어서 들고만 다녔다. 누구 옷보다도 정성과 사랑으로 한 땀 한 땀 박음질하여 만드신 옷이었을 텐데 철부지 시절 투정만 부리고 빨리 닳아 없어지기만 바랐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가 지어주신 옷을 즐거이 입고 다녔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바지의 엉덩이나 무르팍에 구멍이 뚫리면, 안쪽에 다른 옷감을 대고 눈에 띄게 옷 색깔과 대칭되는 실로 네모진 거미집 모양의 무늬로 박음질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내 옷은 물론 친구들 옷까지 내가 어머니 재봉틀로 해주거나, 놀다가 뜯어진 옷도 꿰매 입을 정도로 어머니 재봉틀을 좋아했다. 난이도가 적은 신주머니와 자투리 헝겊 조각을 요리조리 이어서 밥상보까지 만들기도 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너는 여자가 될려다가 남자가 되었냐며’ 어머니 따라하는 짓이 흐뭇하셨던 모양이다.
세상은 산업사회로 급변하면서 사회의 모든 의식주문화도 산업사회 형태로 변하여 옷도 맞춤옷에서 기성복으로 바뀌었다. 어느 도시나 가장 번화가에는 양복점이 즐비하는 것이 상가구조의 기본이었으나, 지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양복점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제는 뜯어지고 해진 옷을 웬만한 비싼 옷이 아니면 수선해 입지 않고 버리거나, 세탁소에 부탁해서 고쳐 입는 세상이 되었다. 어머니의 재봉틀도 언제부터인가 안방에서 사랑방 구석으로 옮겨졌다.
어머니의 한참 시절에는 힘차게 재봉틀 발판을 누르시면 작은 벨트는 돌림 바퀴에 전달되어 노루발은 계속 옷감을 뒤로 밀어냈고 재봉틀 바늘은 쉴 새 없이 드르륵드르륵 박음질을 계속했다. 어머니의 힘찬 발목 놀림과 재봉틀의 박음질 소리가 어우러졌다. 어머니가 만드신 옷이 그리도 좋으신지 아버지는 걸쳐 입으시고 담배 한 모금을 빠시며 흐뭇해 하셨다. 명절 때마다 내 옷을 손수 지어주셨던 어머니가 떠나가시니 이제는 앙상한 재봉틀만 그대로 쉬고 있다.
어머니의 재봉틀보다 먼저 옮겨온 길쌈도구들도 옹기종기 모여있다. 삼베나 모시껍질을 얇게 벗겼던 모시칼(삼 톱), 작은 실오라기에 풀을 먹였던 베솔(풀 솔), 날줄을 고정해 주는 바디, 날줄에 씨줄을 엮어주는 베북(실 통), 날줄과 씨줄을 촘촘히 엮어주는 바디집 등 베틀만 없지 거의 가져왔다.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사용했을 길쌈도구와 어머니 새댁 시절부터 사용하신 재봉틀이 같은 주인을 모셔서인지 정답게 어우러져 있다. 달그락달그락 느리고 여유 있는 나무 마찰음의 베틀 소리와 드르륵드르륵 잽싸고 생동감 있는 금속음의 재봉틀 소리가 교대하면서 나를 잠재우고 있다. 나는 어머니의 재봉틀과 길쌈도구를 보며 어머니를 회상할 수 있어서 좋다.
(2020.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