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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토론 속기한 파일 올립니다. 주제에 맞춰서 약간 편집 했습니다.
편하게 보시라고 아래에 붙여넣기도 해둡니다.
이걸 정리해서 연진이가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기로 했죠?
근데 어떤 형식으로 써야할지 고민되네요... 기자의 역량에 맡겨도 될까요? ㅋ
그래도 몇가지 제안을 해보자면...
일단 가장 간편하게 아래의 내용 그대로를 문장만 손봐서 싣는 거죠. 토론 전문을 싣는다고 소개하고...
아니면 주제별로 이런 의견도 나왔고, 이런 의견도 나왔다는 식으로, 마치 토론회에 다녀온 기자가 보도하는 것처럼...
아니면 아예 재구성하는 거죠. 2009년 현재에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현대사와 고민을 접목시켜서, 발제문 썼던 것처럼...
어찌됐든 기자의 역량에 맡기지요 ^0^
다른 발제자 분들도 곧 차례가 돌아올테니 고민해두시길 ㅋㅋ
2009년 7월 11일 새사연 대학생 모임 여름방학 세미나
■ 참석자
수연/ 성진/ 도년/ 하나/ 민우/ 재희/ 연진/ 미선/ 민수/ 성환
■ 발제 - 연진
1) 건준과 인민위원회의 활동
- 자생적 민주주의의 싹
- 친일파와 미군에 의해 실패했음
2) 친일파
- 한국사회에서 기득권을 놓친 적이 없는 그들
3) 4.19혁명
- 정권에 대한 민중의 최초 승리 경험
- 지식인만의 혁명이라는 평가
- 우리가 배울 점
■ 세미나 속기
1. 건준과 인민위원회
1) 소감을 말해볼까요?
- 연진 : 충격적!! 7차 교육과정, 이과 출신으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음. 인민위원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럼 혹시 빨갱이?’라는 생각을 했음. 하지만 공부를 더 해보면서 용어가 생소할 뿐이지 좌익이나 우익으로 나눠지는 운동이 아니며 민주주의와 국민에 의한 정치, 대동단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 그런데 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나? 답답함. 이런 노력을 좌절시킨 친일파에 대한 처단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는 것이 안타까움.
- 하나 : 교과서에 나오지만, 현대사 부분을 수업에서 가르치지는 않음. 현대사의 인물들이 아직 살아있어서 배우지 못하도록 하는 것!!
- 성진 : 의도적인 배치가 아닐까? 시간적으로도, 분량상으로도. 지금은 현대사 과목이 따로 있음.
- 재희 : 수능에도 안 나오니까
- 연진 : 이런 것을 가르치는 곳이 없음. 하지만 우리 역사의 엄청난 경험!! 특히 인민위원회는 전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음. 지역 공동체와 국가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면서 적절히 조화를 이룬 경험.
- 성진 : ‘인민’이란 말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음. 여운형에 대한 레포트를 쓴 적이 있음, 좌우합작을 주장했던 것은 훌륭하다고 생각.
- 연진 : 여운형에 대한 평가 두 가지, ‘좌우합작을 위해 끝까지 노력해서 훌륭하다와 그래서 오히려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해서 무능했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들어주면서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는 평가도 있음.
- 미선 : 수업에서 김대중 정부는 행정적 기술이 없어서 원하는 바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들었음. 건준에서도 행정적 기술의 아쉬움을 느꼈음. 친일파와 이기적 세력은 어떻게든 목표를 이루어내고 마는데, 진짜 애국세력은 열정은 높지만 실현능력은 부족한 게 아닐까?
- 수연 : 어떻게 이렇게 해방 후 순식간에 자치적인 조직을 만들 수 있었을까?
- 민우 : 국내에 있던 여운형은 패망을 직감하고 3,4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음. 지역조직도 만들고 있었음. 미리 준비하고 있었음. 무능력했던 것이 아님. 지도자 여론 조사를 봐도 민중들 사이에서는 좌우대립이 없었음. 모두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2) 실패의 이유는 무엇일까?
- 도년 : 좌우합작 자체가 양날의 칼을 가지고 있었음. 분단을 앞둔 상황에서 친일잔재 청산에 대한 입장이 좌우 간의 극명한 쟁점이었던 것 같음. 분단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와의 대립이라고 평가하지만, 실제 문제는 친일잔재 청산에 대한 대립일 것. 친일파는 자본가와 지주들과 연관되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누어진 것. 민족주의 우파도 친일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음. 이 문제에 합의하지 못하니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
중앙과 지방 간의 괴리 역시 문제. 구심점이 없는 형태, 조직력을 발휘할 수 없음. 국가라는 것 자체는 중앙과 지방 간의 민주적 연결이 중요한데... 이 역시 지도부의 좌우합작이라는 타협적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여운형 조차도 “지난 날의 아픈 것을 묻어두자, 쓸데없이 거리를 돌아다니지 말아라...”라고 말하며 민중들의 자생적 에너지를 막으려고 했던 것.
이로써 건준은 사상과 조직을 모두 놓쳤던 것!!
- 연진 : 좌우합작에서 합의할 수 없던 지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 충분한 논의가 있었다면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충분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은 것이 바로 미군임.
또한 도년 선배의 지적은 지도부의 역량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둔 것이 아닌가? 개별 단위의 자발적 조직들이 서로 연계하는 역량이 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인 것 같음. 9월 6일에 인공이 수립되었는데, 해방 후 20일 만에 국가를 세운 것, 왜냐하면 미국이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외세가 겪게 될 위기를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 국가를 세우려던 게 아닐까?
- 민수 : 지역에까지 인민위원회 같은 조직이 건설된 동기는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거창한 목표보다, 삶에 대한 의지가 크지 않았을까? 무기력한 일제 시대의 끝에서 민중들이 갑자기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토지개혁 등의 실제적 문제 때문일 것. 하지만 중앙에 있던 지도부는 민중들의 열망을 제대로 읽지 못했음. 그 때 좌우합작에 집착하는 대신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을 빨리 했었다면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 도년 : 저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 때문이라고 생각함. 다만 인민위원회가 인기를 얻을 수 있고, 여운형이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의 남한사회 좌파가 민중들의 삶에 대한 열망, 즉 토지개혁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 가장 부합하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 당시 인민위원회 강령에 의하면 남녀평등,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 등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민중이 빠진 좌우합작을 했을까? 전술적 오류라고 생각. 민족주의 우파는 친일문제에 대해 단호하지 못했음. 김구도 “친일파를 민족으로서 포용해야 한다” 고 말했음. 민중들 입장에서 이 부분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 민중의 자생적 열망을 권력화해서 국가를 장악하는 방향이 되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음.
- 연진 : 여운형 역시 친일청산보다 치안유지와 건국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 도년 : 민중과 자기 계급의 요구를 파악하지 못한 시행착오일 것, 결국 이후에 계급에 바탕을 둔 근로인민당을 만들었음.
- 재희 : 발언 하나로 친일파 문제에 소극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나? 제가 생각하는 실패 원인은,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권력을 만들어내는 작업부터 시작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따라서 건준은 권력을 만들어 내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좌우합작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음. 권력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미군정에게 빼앗길 수 없어서 급하게 인공을 건설했지만 결국 뺏겼음.
- 도년 : 민족주의 우파세력은 친일파를 두둔할 만한 실질적 기반이 있었음. 그들에게 친일파 청산을 기대했던 것이 문제. 단순히 권력을 만들고,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누구를 위한 권력,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피착취계급으로부터 나오는 국가권력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 단순히 권력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는 않음.
- 성환 : 미군정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건준과 인공은 조급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음. 건준일 때는 치안유지와 건국에 중점을 두면서 정치적 색이 없었으나 우파를 흡수하지 못한 인공은 좌파적 색을 갖고 있었음. 때문에 미군정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 그런 게 문제이지 않을까?
- 민우 : 좌우합작의 오류에 대해 평가할 때, 실패했다고 평가하기 보다는 이런 노력이 있었다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함. 이런 역사조차 없었다면 더 안타까웠을 듯, 좌우합작을 평가하는데 인색할 필요는 없음.
- 연진 : 해방 후의 성과로 좌우합작 시도 외에도 사람들의 열망, 거국적 건국, 지역단위 민주주의 실현 등의 성과가 있었음. 그런 욕구들이 미군정에 의해서 말살되었음.
3) 친일파는 어떻게 다시 살아났을가?
- 성진 : 궁금한 게 있음. 해방된 직후에는 친일파가 모두 몸을 숨기고 있었음. 본래 우파도 친일파 처단에 합의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우파와 친일파가 손을 잡게 되었을까?
좌우합작에서 서로 합의할 수 없는 선이 있어서 망했다.
- 민우 :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파도 친일청산에 합의했음. 미군정이 들어오고 찬탁반탁 문제로 인해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게 되었음.
- 성진 : 친일파가 우파로 들어갔다? 그 과정에 대한 설명 듣고 싶음.
- 연진 : 친일파는 땅부자, 재력가들이었고 그래서 해방 후에 몸을 숨기는 것도 그래서 가능했음. 친탁반탁으로 인해 친일파가 새로운 껍질을 쓰고 부활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의 재력도 유용하게 활용되었을 것. 건전한 우파들은 모두 제거되었음. 행정능력을 우수하게 여긴 미군에게 친일파가 중용되었음, 대표적인 것이 친일경찰.
- 연진 : 이승만의 유상몰수 정책 역시 친일파를 부활하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 수연 : 하루빨리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이승만이 자기기반 확보를 위해서 친일파를 다시 살렸음
- 민우 :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친일파를 끌어들인 것이 가장 큰 원인. 이승만도 일본을 싫어했음. 좌우합작도 미군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충분히 잘 할 수 있었을 것. 결국 외세의 개입이 가장 큰 문제!!
2. 친일청산에 대하여
1) 자신이 조사해온 친일파 소개(?)
- 수연 : 민족문제연구소에서 8월 15일에 친일인명사전이 나오는데, 그 작업의 일환으로 제일 처음 발표된 예정자 명단이 3090명 이었고 그 명단에 박정희와 사립대학교 초대 총장, 장차관, 문화계인물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음. 이 중에서 특히 예술계에 있는 사람들에 관심이 갖음. 다른 분야보다 많이 안 알려졌다고 생각됨. 특히 홍난파, 현제명 등 교과서에 나오는 사람들의 친일행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 이들은 음악을 통해 전쟁권유, 친일협조 하는 노래 제작했음.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 때 불려진 ‘희망의 나라’라는 노래도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을 찬양하는 친일음악. 군수공장과 전선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는 악단에도 관여했음. 이들은 본격적 친일 행위 이전부터 민족음악계량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음악이 서양음악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퍼뜨렸음.
미술가 중에서는 운보 김기창을 꼽고 싶은데 그는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음. 자신이 뛰어났기 때문에 친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함. 미술가들은 전쟁에 참여한 일본군과 그들을 지원하는 조선인의 모습 등을 그림으로 남김. 김경승이라는 조각가 역시 친일파인데 김구, 안창호, 안중근, 국회 내 이순신, 세종대왕 등 국가 기념적 동상의 대부분을 세웠으며 국가에서 문화훈장을 수여하기도 함.
예술가들의 친일 행위가 다른 것보다 악질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조선인들의 희망을 빼앗았기 때문임. 게다가 잘 알려지지 않으면서 여전히 이들의 작품이 교과서에도 실려있고, 심지어 국회에도 들어와 있는 현실 때문임.
- 민수 : 친일파 중에서도 현재 사회에서까지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임. 이들의 친일행위는 현재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침. 미국놈 앞잡이 시절 만난 백선엽이라는 사람은 미국인들에게도 한국군대의 아버지로 추앙받았음.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의 선배이며 한국군에서 아직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물. 박정희를 인정하고 살려준 인물, 이런 사람이 아직까지 공식적인 외교 채널을 통해서 인정을 받는 것이 씁쓸함.
- 미선 : 인촌 김성수 역시 친일파로 꼽힘. 그러나 그의 친일행적은 표면적인 것일 뿐 실제로는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는 주장도 있음. 따라서 친일행적과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들을 모두 교과서에 기록하는 것이 필요. 무조건 친일파라고 배척하기 보다는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는 것이 필요함.
- 연진 : ‘레드 콤플렉스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조중동을 친일파로 꼽은 손석춘 원장님의 주장에 동감함. 조중동은 해방 후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반성을 했어야 함. 전국민을 호도했던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 반성을 하지는 못할망정 여전히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음. 친일행적이 너무 컸기 때문에 민중들의 여론이 두려워서, 해방 이후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신속하게 복간할 수 없었다고 함. 지금이라도 하루 빨리 폐간되었으면 좋겠음.
- 재희 : 저는 유인촌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인 유치진, 유치환을 조사했음. 유치진은 연극계의 거두이고, 유치환은 유명한 시인. 피는 어디 갈 수 없나 싶다. 유인촌 같은 사람이 자기 할아버지가 친일이라는 잘못된 행적을 저질렀다고 제대로 이야기하고 반성할 수 있겠는가.
- 민우 : 유치진, 유치환에 대한 논쟁은 여전함. 작품에 대한 해석이 분분. 근대문학은 이광수에서 시작함. 이광수는 근대문학의 기틀을 모두 마련했다고 평가받음. 그러나 친일행위를 했음. 최남선의 북계문화론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친일은 친일일 뿐. 혹여 그들의 친일에 악질적인 면이 없었다 해도 친일행위 그 자체는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친일을 했어도 친일은 친일.
- 하나 : 하지만 그 시대의 말단 공무원, 순사, 교사는 친일파로 분류해서는 안될 것.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정말 대단한 의지를 가졌던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만을 있을지언정 당시 사회에 순응해서 살았을 것. 친일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 후의 말단 공무원이 되고 교사가 되고 순사가 되는 것. 보통 사람들의 어쩔 수 없었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너그러움을 가질 필요가 있음.
- 도년 :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 선생 역시 친일파였음. 애국가를 만든 작가마저 친일파인 사회. 예술가, 문화인들, 근대적 문학, 예술을 주창했던 사람들이 친일파가 대부분. 우리의 굴절된 근대화를 보여준 것이 아닐까. 개개인의 친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악질적 친일은 자본이 아닐까.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서 착취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에서 조아려줄수 있는 사람이 필요함. 자본의 세계적 팽창 과정에서 친일도 자연스럽게 등장함. 자본가 이익에 기반한 우익 민족주의자는 친일파와 종이 한 장 차이.
2) 친일파의 기준과 처단에 대한 기준
- 수연 : 모든 친일 행위를 평가함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본인 스스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필수적이어야 함.
- 연진 : 한홍구 선생의 시각에 찬성. 남을 해하면서까지 자신의 영달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진짜 악질 친일파. 또한 현재까지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평가해야 함.
- 민우 : 민중은 제외해야 함. 일제 하에서 살았건, 이승만, 박정희 아래에서 살았건 민중의 처지는 마찬가지임. 친일파라는 말보다 일제부역세력이라고 명확히 지적할 필요가 있음.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이 죄인.
- 도년 : 친일여부에 대해서 관료적 위치가 얼마나 높았느냐 혹은 낮았느냐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
- 수연 : 반민특위가 세웠던 친일파의 기준에는 작위를 받거나 중추원이나 군경 등의 기관에서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 독립운동 방해했던 사람들이 포함됨.
- 민우 : 친일파로 꼽히기도 하면서 민족자본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김성수나 박흥식 등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고 함.
- 수연 : 현정은, 홍라희의 할아버지도 독립자금을 지원했다고도 하고 친일을 했다고도 하는 등 평가가 엇갈림.
- 미선 : 때문에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것 보다는 그들의 행적 자체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함.
3. 4.19혁명에 대해서
1) 4.19가 미완의 혁명이며, 학생과 지식인만의 혁명이라는 평에 대해서
- 연진 : 보면서 놀랐던 점이 초중고딩이 먼저 시위에 나서면서 대학생들을 비판함. 이를 두고 지식인만의 4.19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음. 대학생을 지식인이라는 특권계층으로 봐야하는지도 문제.
- 민우 : 4.19가 미완의 혁명이라 해도 4.19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 것. 4.19는 5.18, 6월 항쟁으로 이어짐.
- 재희 : 이승만 하야의 결정적 요인은 미군.
- 성진 : 미군이 만약 이승만을 밀어줬다면 4.19는 실패했을 것.
- 하나 : 실패했을지라도 의미는 있었을 것.
- 도년 : 미국이 이승만 하야를 방관했던 이유는 독재타도를 넘어서 체제변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승만의 반일주의로 인한 미국의 한미일 동맹에 걸림돌이 됨.
하나 : 미완의 혁명인 이유는 혁명 이후가 잘 수습되지 않았기 때문. 다시 말해 그 이후를 수습하기 위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 전쟁 이후였던 탓에 조직화, 정치세력화를 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던 듯.
연진 : 지금도 같은 상황, 우리도 준비해야 함. 대안과 대안세력이 있어야 함.
민우 : 지금도 죽 쒀서 개 줄판.
재희 : 엠비 내려오고 근혜 올라오는 판.
성진 : 목표는 대통령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림이어야 함.
하나 : 베네수엘라 혁명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인터뷰를 본 적 있음.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차베스를 영웅이 아니라 혁명에서 하나의 역할-정부 침투라는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 인식. 쉽게 말해 민중이 차베스를 이용하는 것. 영웅이 필요하다기보다는 결집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
민수 : 국가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제대로 된 민의를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건준 역시 국가에 대해 너무 집착했기 때문. 국가주의에 대한 경계.
연진 :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됨. 국가는 차악.
하나 : 누군가의 죽음으로 혁명이 촉발되는 역사적 경험이 많음, 그런데 지금은 왜 안 그럴까? 용산참사 등은 왜 잊혀지고 있을까?
수연 : 4.19가 학생들의 혁명이었다는 비판에 대해 4.19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었던 부산대학교 이대우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음. 겉으로 보기에 4.19는 학생 혁명이지만 본질은 농민혁명이었다고 주장. 전쟁과 원조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농산물을 저가로 공급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농민들의 빈곤은 다른 계층보다 심화되었음. 불만이 쌓이고 있었음. 이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해옴. 이들이 이농1세대. 이들의 자식들이 이농2세대. 이농2세대가 4.19의 주역이라 불리는 학생들이었음. 이들은 농촌을 떠나 온, 한 때 농민이었던 부모들의 불만과 원망을 잘 알고 있었음. 이렇듯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불만이 농촌과 도시 빈민가에 가득찬 상태에서 부정부패가 터졌던 것이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