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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무엘상 16:14-23절.
제목: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데 나를 써 주소서.
서론>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 독특한 말이 있습니다. 섭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라는 말을 쓰지만,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섭리와는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윤회사상, 곧 전생을 믿습니다. 그래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말은, 방금 자기와 옷깃을 스친 사람이 전생에 인연이 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섭리란,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그것들을 보존하고 다스려 가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섭리 앞에 붙는 수식어구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듣기에는 섭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겠지만, 그렇게 깊이 와닿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쉽게 풀어 설명하면,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의 행동과 사람의 행동이 일치될 때 또는 일치된 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그분의 경륜으로 어떤 일을 계획하신 것을 이루어 나가시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성취하였을 때, 섭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보여주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섭리를 어떻게 이루어가시는 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해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는 데 나를 써 주소서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와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악인도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데 사용하십니다(14-16절). 제가 앞서 섭리란 무엇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까? 하나님의 행동이 사람의 행동과 일치될 때 또는 된 것을 섭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방금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는 표현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14절 마지막 문장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부리신 악령이라는 말씀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영감받은 사무엘서를 기록한 저자가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사울 왕이 악령이 들어 괴로움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듭되는 사울 왕의 불순종에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그를 버리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자리를 사울보다 나은 자를 찾아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들 다윗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다윗은 공개적으로 그 인물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사울은 왕위에서 물러날 자입니다. 떠나야 할 자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다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를 기름 부어 왕 삼을 때 임했던 성령이 떠나고 무엇이 그를 번뇌케 했다고, 말씀합니까? 악령이 그에게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악령은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윗을 왕 삼으시려는 데 악령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령뿐만 아니라 여기 악한 자가 또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사울입니다. 그러면 사울도 악인입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인은 아닌 것이 확실하고, 악인이라면 사울이 무슨 나쁜 짓을 했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악인은, 무고한 사람을 마구잡이로 데려다가 희롱하고 재물과 몸을 빼앗는 사람도 악인이지만, 진짜 악인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 마음이 완고해서 끝까지 듣지 않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그런 말씀이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대표적인 말씀이 시편 1편입니다.
그리고 시편 10편 4절은 악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여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사울이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악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몇 번이고 거역한 불순종한 악인입니다. 그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 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백성에게 본이 되어야 할 왕이 하나님께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이제 떠나야 합니다. 물러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는데, 다윗의 손으로 피를 묻히게 하지 않습니다. 다윗 또한 그런 인물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사울 왕 앞에 다윗을 데려다 놓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령을 통해서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악령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이러하신데,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보다 먼저 나섭니다. 수금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령을 퇴치하게 하시라는 청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신하들에게 지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울에게 지시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수금 잘 타는 사람을 찾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령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 섭리하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험한 세상, 험악한 세상, 거친 세상, 풍랑이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나온 삶 중에 또한 앞으로 남은 삶 중에 악한 일, 악한 환경, 악한 사람을 만났을 것이며 또한 만날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인들을, 악한 일을 악한 환경을 겪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하심 때문입니다. 세상에 평안함, 세상이 가져다주는 부요함, 세상이 가져다주는 즐거움, 기쁨, 감사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안주해 있으면, 애굽을 못 떠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 종살이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4대 만에 나오리라는 말씀대로 애굽 땅에 종살이하고 있었지만, 모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땅을 떠날 마음도, 의지도, 약해있었습니다.
요셉이 국무총리로 있었을 때 고센 땅에서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그 땅이 가져다주는 평안함, 애굽 땅의 풍요로움, 세상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에, 기쁨에 감사에 젖어서 애굽에 푹 빠져 있을 때 세상에 푹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바로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을 심히 학대하고 더 고통스럽게 하니, 이제는 애굽 땅에서 나가고 싶을 때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못 살겠다고 매일 밤 목 놓아 울부짖은 것입니다. 악한 왕, 악한 환경을 일으켜서 애굽 땅을 떠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는 부자들, 권력자들, 세상이 가져다주는 안락함, 부요함, 즐거움에 빠져 사는 이들에게 가서 전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가 천국인데 당신은 이런 천국 생활해 봤느냐?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인생길, 험악하다고, 거칠다고, 가지지 못했다고, 누리지 못했다고, 이 세상은 나쁜 놈 천지라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인내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17-20절).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가 형통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악한 일, 악한 환경을 겪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17-20절을 보시면, 그냥 보기에는 이새가 자기 아들 다윗을 사울의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서 사울에게로 보내는 내용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백성들이 요구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백성 중 하나인 이새가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 같이 사무엘상 8장 11절-12절, 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의 아들들을 데려 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12,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16절에,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 다운 소년과 나귀 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아버지 이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막내 아들 다윗을 보내는 것이 썩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킬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경 기자는 사울이 이새의 아들을 데려오라고 한 것은 국가의 큰일을 맡기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시면, 나를 위하여 구해 오고, 나를 위해 데려오라고 합니다. 사울의 명령은 나라를 위해서 이새의 아들을 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큰일을 맡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의 명령은 오직 자기만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가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은 자기 개인의 일이지만, 또 국가적으로도 큰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라는 공동체를 뜻하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왕권을 자기를 위해서 행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령에 의해 괴로움을 당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라의 백성이 알면, 사울이 왕으로서 버림받았다는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왕 앞에서 모셔선 충직한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수금 잘 타는 사람을 구하게 하시라고 청원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새는 자기 아들을 사울에게 갖다가 바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막내 다윗을 사울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으십니다. 그 섭리하심은 한 소년의 입을 통해서 말해지고 있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입니다.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 아멘.
이 장면을 보고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앞으로 어떤 장면이 예상되십니까? 이새가 자기 아들 다윗을 사울에게 갖다가 바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로 이야기하면, 앞으로 전개가 세드엔딩이 아니라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예상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나쁜 놈 전성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자가, 의인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고 세드엔딩으로 끝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세드엔딩작품을 하나 말씀드리면, 가을동화에 나오는 여주인공 은서는 백혈병으로 사망하고 남자 주인공 준서도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며 드라마는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한국에서만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류바람을 타고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보다 악인이 더 인기가 있고, 상도 주인공을 연기했던 사람보다 악역을 연기한 배우가 더 좋은 상을 받는 것이 이 세상이고 사람들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세드엔딩이 아니라 해피엔딩입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해피엔딩의 예가 요셉 이야기입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애굽에 노예살이하던 히브리 소년이 애굽에 총리가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는데, 그 끝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 이야기의 핵심은 창세기 50장 12절 말씀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리라 하셨나니” 아멘. 이 모두가 자신이 이처럼 고난을 겪은 것은 다 누구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곧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의인이 비참한 삶으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형통하고 악인이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결말입니다. 설사 사람들이 볼 때 이 세상에서 의인이 고통당하고 마지막이 세드엔딩의 삶을 살다갔다고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잠언 14장 32절 말씀에 보시면, 의인은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면,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대로 우리를 끝내지 않게 하십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산 이들, 고난을 참고 믿음을 지킨 승리한 의인들, 주를 위해 순교한 이들은 영원한 세상에서 해피하게 살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잠언 24장 1절은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잠언 21장 4절 말씀에 그것은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함께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얼마나 잘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형통할지 모르지만, 지옥 불심판이 준비돼 있습니다. 세드엔딩의 마무리될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악행을 그치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십니다. 또한 의인들은 악인들의 형통을 기뻐하지도 말고 그런 사람에게 덕볼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섭리는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21-23절). 여러분, 사람은 꿈을 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꿈은 현재의 고단한 삶을 버티게 하고, 포기하지 않게 합니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는 유행가처럼, 지금은 어두움 속에 웅크리고 있지만, 빛을 볼 날을 꿈꾸며, 무명의 가수 지망생도, 재수생도, 일용직 노동자도, 작가들도 다 꿈을 꿉니다.
그러나 꿈을 꾼다고 모두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어떨까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또한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그 일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은 바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러나게 일하지 아니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뒤를 되돌아보니 그 일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평소에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는 것을 좋아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양을 치면서 무료한 시간을 수금을 타면서 보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 추측이라기보다는 다윗이 쓴 시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쓴 시편 중 대표적인 시편 중 23편은 그가 자기 양을 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셨는지, 양 떼를 지키기 위해 사자와 곰과 싸울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 썼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윗이 한 말에서 양치기 소년으로 있을 때를 추억하고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 3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이제 이 말씀과 시편 23편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쉬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150편의 시편 중에 표제어가 다윗의 이름으로 된 시만 73편이나 됩니다. 그 시들 중에 이 23편은 다윗이 자기 양떼를 치고 먹인 것을 경험으로 한 시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에게도 꿈이 있었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꿈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 삼으려는 이유입니다. 사울을 페위하시고 다윗을 왕 삼으시려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다윗 개인의 꿈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섭리이셨습니다. 바로 그의 혈통을 따라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부른 것입니다.
바로 다윗의 꿈을 이루어 주시려고, 그를 수금을 탈 줄 알게 하시고, 또 용기를 준 것입니다. 사자와 곰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주셨고, 양떼를 자기 목숨처럼 지키는 목자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수금을 타는 악사들은 많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병을 낫게 하는 이는 수금만 탈 줄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된 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로 그 소년이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 부었던 이새의 아들 다윗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다윗을 준비시켜 오신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어서 사울 왕 앞에 나타났고, 때마침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할 때 다윗은 손으로 수금을 타서 악령을 퇴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즉시 상쾌하여 나았지만, 악령이 그에게서 완전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고자 하시는 데 사울이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데 악인은 사용하지만, 그를 통해서 섭리를 이루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의로운 자, 경건한 자,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 곧 다윗을 통해서 이루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바라는 것, 꿈이 이루어졌을 때,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때 더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려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의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었고, 매일의 삶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이 손으로 탄 수금은 다윗이 평소 몸에 지녔던 수금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울의 처소에는 그보다 더 좋은 수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수금을 탔다면 사울에게 붙어서 그를 괴롭히는 악령은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두 귀신을 떠나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을 믿어야 하고, 그 이름의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과 박수 시몬은 예수 이름을 빙자해서 귀신을 축사했지만,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귀신에게 덮어씌움을 당했습니다.
예수 이름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신 예수 이름을 죄악 가운데 있는 자는 악한 귀신을 축사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해를 표어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는 올해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섭리를 이루기까지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또 그 악인의 덕을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의로운 종 다윗을 통해서 섭리를 이루신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시어 올해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