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7] 이정옥(李貞玉) 일심봉천(一心奉天) - 2. 교편생활과 결혼 - 1 1 때는 2차대전 중이었고 동경 폭격의 위험이 날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불안하여 졸업을 중단하고라도 귀국하라는 재촉이었다. 학장은 현해탄이 위험해서 배가 침몰할지도 모르니 가지 말고 남으라고 권고했지만 졸업을 하자마자 귀국했다. 2 그 후 선배 한 분이 서울대학 연구실로 오라고 했으나 나는 교편생활에 더 매력을 느껴 대전 충남여고의 화학 선생으로 부임했다. 왜정 치하에 부임해서 8개월 만에 8•15 해방을 맞이했다. 3 해방 전에는 학생들이 참 불행했다. 학과 교육은 시키지 않고 근로 봉사(勤勞奉仕)라고 해서 공장으로 산으로, 혹은 식량증산이라 해서 밭으로 끌려다니며 쉴 새 없이 온종일 노동만 시켰다. 4 그때 1학년 담임이었지만 노동만 하다가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졸업을 해야 하는 3~4학년 학생들이 더 가여워 보였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촌분을 아껴 공부는 물론 운동 음악 감상 등을 통해 정서와 교양을 쌓고 학생다운 학창생활을 하도록 앞장서서 격려해 주고 지도했다.
5 그리고 기숙사생 200명을 맡은 사감이기 때문에 주말에 달 밝은 밤이면 기숙사생들을 운동장에 나오게 해서 운동경기도 시키고, 3~4학년 학생들에게 보여줄 만한 영화가 있으면 미리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밤에 영화관에도 데리고 가서 감상도 시켜주었다. 왜정 때의 협소하고 폐쇄적인 교육방침을 벗어나 엄격하면서도 자유로운 산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마음 놓고 무한히 발전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6 대전은 타향이고 전주가 내 고향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내가 혹시 모교인 전북여고로 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고 절대로 모교에 가면 안 된다고 미리 다짐을 받는 것이었다. 나도 이 학교를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7 그런데 봄방학이 되어 잠깐 집에 갔더니 부친께서는 모교인 전북여고 교장선생님께 인사라도 하고 가라고 하셨다. 학교로 인사하러 갔다가 나는 교장선생님께 붙들리고 말았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고 충남여고 학생들에게 배신을 한 것 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8 그래서 학생들에게 고별인사를 하게 되면 전교생들이 울고 법석이 일어날 것 같아 교장과 직원 선생님들에게만 인사를 하고 조용히 떠났다. 전북여고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나를 따랐지만 그럴 때마다 충남여고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오랫동안 지울 수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