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만에 치러진 길제(吉祭)
영천이씨 효절공
농암 이현보 종가
종가의 많은 제례 중에 길제(吉祭)라는 의례가 있다. 길제는 일반 사람들에게 낯설기만 한 말이다. 사당이 있는 대종가라야 행할 수 있고 한 대에 한 번 있는 제례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3년상을 치르고 사당에 들어가려면 사당에 있던 제일 어른인 5대조 할아버지는 자신의 자리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사당을 떠나야 한다. 이때 사당에서 5대조 할아버지의 신주를 내보내고 새로 아버지의 신주를 모시는 의식과, 또 새로운 제주의 이름을 새겨야 하는 의식을 행하는데 이를 모두 길제라 한다. 이는 4대조 이상은 제사를 모시지 못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의식이다. 옛 왕가의 법도에 따른다면 왕위를 물려주는 ‘대관식’과 같은 것이다. 길제는 지난 10월 8일 안동시 도산면 운곡동 긍구당(肯構堂) 사당에서 치러졌다. 긍구당은 조선시대 강호(江湖) 문학의 서장을 열었던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7) 선생의 종가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길제를 통해 우리의 제례 문화를 다시금 살펴본다.
가문의 ‘대관식’ 길제
보랏빛 들국화가 담장 없는 고택을 가려주듯 해맑게 피어 있는 영천 이씨 종가 긍구당 앞마당에는 가문의 큰 행사인 길제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문중 어른들의 도포 자락들이 펄럭였다.
16대 종손 이용구(李龍九) 옹이 지난 98년 91세로 세상을 떠나 3년상인 대상(大祥)과 담제( 祭)를 지낸 후 신주가 사당으로 들어가는 큰 의식을 치르는 날이다. 지금까지 후손들로부터 제사를 받아 온 5대조 할아버지는 새로 들어오는 후손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는 체천(遞遷) 의식은 영혼이나마 자신이 살았던 집, 사당을 떠나 본인의 무덤 곁에 신주가 묻히게 되는 것이다. 사당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제례를 받고는 이제 일 년에 한 번 가을에 자신의 무덤에서 지내는 세일사(歲一祀)만 받게 된다. 사당에서 떠난 5대조 자리에는 그 아랫대인 증조 할아버지가, 증조 할아버지 자리에는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자리에는 아버지 신주가 모셔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주였던 부모가 돌아가셨으니 그 아들이 제주가 된다는 것을 신주에 다시 새기게 되는 개제주(改題主)도 해야 한다.
이런 의식들이 모두 길제에 포함된다. 길제의 ‘길(吉)’이란 자손이 있어 조상을 섬길 수 있다는 의미에서 슬픈 제사가 아니라 길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댁의 길제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행한 이후 75년 만이었다.
길제의 제주는 17대 종손인 이성원(李性源·47) 씨. 신주에 이름을 바꾸는 의식은 하루 전에 해두었다. 이날은 불천위인 농암 선생의 신주를 포함한 여섯 분의 신주에 각각 제물을 올리고 제주가 바뀌었다는 고유제를 올리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문중 사람들이 참석해 한 대가 바뀌는 소중한 의식을 지켜보았다. 제례는 기제사에 준했다.
종부의 길제복 ‘원삼 족두리’
이날 2백여 명의 문중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하면서도 장엄하게 행해진 길제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혼례 때 입는 원삼 족두리 차림으로 참석한 종부 이원정(李源定·42) 씨. 종가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주부인 종부에게 두 번째 술잔을 올리게 했다.
종부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사당으로 들어왔다. 엄숙하던 사당 안이 종부의 옷차림으로 갑자기 환해졌다. 종부는 여섯 분의 신주 각각에 술을 올리고 네 번씩 절을 했다. 모두 24번의 큰절을 했다. 앞으로 사당에 계신 선조들의 제물을 정성껏 준비하며 가문의 영예를 위해 힘쓰겠다는 무언의 약속이다.
종부가 길제 때 혼례복을 입은 것은 초상이 난 이후 이날부터는 화려한 옷을 입어도 무방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례의 시작은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는 일부터다. 3년상을 치를 때까지 상복을 입어야 한다. 3년상이 지나면 흰 옷 차림으로 있다가 길제를 지낸 이후부터는 화복(華服)을 입는다고 <예서>에도 나와 있다. 또한 사당의 조상은 물론 문중 사람들 앞에서 대를 이어 조상을 성심껏 모실 것과 문중의 대들보인 종손과 종부의 위엄을 대례복으로 차별화해 보여주는 것이다. 종손은 갓과 하얀 모시 도포 차림이다.
어느 댁 종부는 시집가자마자 시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복을 입기 시작해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까지 차례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12년을 상복으로 지냈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색깔 고운 옷이 너무 입고 싶어 밤에 몰래 입다가 문중의 법도를 어겼다고 쫓겨날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3일장으로 끝나는 요즘, 전통적인 상례와 엄격한 제례 풍습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젊은 세대들의 눈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풍습일 게다.
익히지 않은 날고기를 올리는 길제 음식
이날 제물은 제상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풍성했다. 불천위 제상을 비롯해 여섯 개의 상 위에는 음식이 가득했다. 제물은 일반 제례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제례 음식의 진수인 적(炙)은 모두 익히지 않은 날것으로 쓰는 것이 이색적으로 보였다. 혈식군자(血食君子)라 하여 군자에게는 날것을 올린다는 뜻이다. 또 식혜를 엿기름에 삭히지 않고 밥을 둥근 접시에 담아 다시마로 고명을 올린 것도 다른 가문에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것이었다.
신주로부터 맨 앞줄에는 밥과 국, 수저와 술잔이 놓였다. 콩시루편 위에 잡과편, 조악, 화전, 흑임자 고물을 묻힌 깨 구리편을 웃기떡으로 소담하게 쌓아 올렸다. 편청이라 하여 꿀을 놓았고 편적이라는 배추전도 놓였다.
두 번째 줄에는 메국수라 하여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칼국수를 만들어 건지만 담고 그 위에는 다시마를 고명으로 올렸다. 작은 명태를 적 받침으로 깔고 고등어, 방어, 상어, 조기, 쇠고기 순으로 쌓아 올렸다. 적에 들어간 고기들은 모두 날것으로 꼬치에 꿰었다. 맨 위에는 온 마리 닭을 약간 익혀서 배가 위로 가게 놓았다.
적을 가운데에 두고 양 옆으로는 다섯 가지 탕을 놓았다. 탕은 문어, 명태, 방어, 상어, 홍합, 쇠고기를 넣어 따로 끓였다. 각각의 그릇에 담아 생선탕 세 그릇은 동쪽에, 고기탕은 서쪽에 놓아 어동육서(魚東肉西)로 자리를 정했다. 세 번째 줄에는 메좌반이라 하여 방어 2접시를 놓았지만 역시 날것이다. 그 옆으로 청장을 놓았다.
나물은 다섯 가지로 각각의 그릇에 담았다. 재료는 삶은 배추(숙주), 무, 도라지, 고사리, 토란대를 썼다. 밥식혜와 물김치도 올린다. 마지막 줄에는 과일이 있었다. 서쪽으로 밤, 감, 땅콩과 호두를 올리고 가운데는 시절 과일로 수박을 놓았다. 사과와 배는 아래위만 잘라 놓았다. 대추는 살짝 삶아 집청과 설탕을 넣어 졸인 다음 깨를 묻혀 담았다.
조동율서(棗東栗西)로 올린다 했다. 대구포가 과일줄 동쪽 끝에 놓인 것도 여느 집과 달랐다. 술은 집에서 담가 올리기도 하는데 이날은 청주를 썼다.
이렇게 가짓수가 많은 음식을 정갈하게 장만하는 제수품이 이어져 왔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 음식이 보존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종가의 길제를 지켜보면서 죽고 나서도 조상을 이렇게 극진히 모시는 민족이 지구상에서 또 있을까 싶었다. 엄숙하게 장례를 치르고 또 3년 동안 빈소에서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식사를 올린다. 소상, 대상을 거쳐 담제, 길제까지 아홉 번의 큰 제사를 받고 나면 사당에 모셔져 4대에 걸쳐 최소한 1백20년 동안은 살아 있는 양 일 년에 몇 번씩 제사를 올리는 민족이었기에 우리가 문화 민족으로서 자리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 제례 속에 우리의 음식 문화, 복식 문화, 규범 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긍구당의 내력
풍년 9월 하늘 아래 / 노인들을 청내로 모셨네
서리 서리 백발들이 손잡은 주변 / 단풍 국화가 가득하네
나누어 수작하는 자리 / 내외청에 음악이 이어지네
색동옷 입고 술잔 앞에 춤추는 사람 괴이하다 하지 마라
태수 양친이 또한 자리에 계심이다.
농암 선생이 안동부사 시절 부모님을 모시고 경로 잔치를 치르고 남긴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이란 4백80년 전의 시다. 화산은 옛 안동의 이름. 농암 선생은 여기서 부모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긍구당은 영천 이씨가 안동에 입향했던 때 지어진 고택이다. 고택의 원래 자리는 안동군 도산면 분천동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물에 잠겨 사당과 함께 1975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지금도 안동 지방에서는 부내 종가로 더 알려져 있을 만큼 분천동 시절의 긍구당은 유명했다. 긍구당에서 농암 선생이 태어났다고 하니 고택의 나이는 미루어 짐작된다. 이곳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분강서원에는 농암 선생의 초상화가 봉안돼 있다. 농암 선생이 46세 때 부모님을 위해 지었다는 ‘날을 아낀다’는 뜻의 애일당(愛日堂)도 긍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전돼 있다.
종가의 안채는 안동시 옥정동에 옮겨져 종손이 살고 있다. 길원여고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종손 성원 씨는 흩어져 있는 종가의 유적을 한곳으로 모아 복원하기 위해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에 터를 닦고 있으며 ‘농암 선생 유적 복원사업 후원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퇴계 선생이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죽음을 애도하는 글과 그의 행적을 지어 바치기도 한 학자이자 대시인인 농암 선생은 그의 사후에 나라에서 내린 ‘효절공(孝節公)’이란 시호가 말해주듯 효심이 극진했다. 그가 남긴 ‘화산양로연’은 보물로 지정될 만큼 귀한 자료이다. ‘화산양로연도’에는 단풍이 붉게 물든 풍광 좋은 야외에 천막을 치고 남녀 천민을 구별하지 않고 노인들을 초청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엄격한 신분 사회였던 사회 분위기로 보아 분명 획기적인 일이다. 그림에는 남자는 야외에서 천막을 치고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에 연회석이 마련됐고, 여자들은 실내인 듯 지붕이 보인다. 시녀들이 음식을 나르고 화롯불에 탕을 데우는 모습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식탁 문화가 발달된 지금의 주부들이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개개인이 음식상을 따로 받고 있는 모습이다. 상다리의 높이로 신분을 구별한 듯도 보이지만 분명히 독상을 받고 있다.
고향의 부내 절벽에 물 부딪치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그 바위를 차라리 ‘귀머거리 바위’라고 해서 ‘농암’이라고 이름짓고 그것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는 그의 탈속한 정신 세계는 유명한 ‘어부가’의 발문에 붙여 쓴 퇴계 선생의 글이 대변하고 있다.
“농암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분강가로 염퇴했다.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회포를 물외(物外)에 붙였다. 때로 조각배를 타고 물안개 낀 강 위에서 즐겁게 시를 읊조리거나 낚시 바위 위를 배회하며 물새와 고기를 벗하여 망기지락(忘機知樂)했으니, 그 강호지락(江湖之樂)의 진을 터득한 것이다…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다. 아, 선생은 이미 그 진락을 얻은 것이다.”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풍경이라 제목을 붙인 ‘강호문학연구소’에서 펴낸 도록에서 농암 선생의 시 세계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