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11, 어떤 연단 (Ⅱ)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지성(헌금)을 마련하기위해 연단(행상으로 물건파는 일을 말하는데 ‘연단을 받는다’고 표현함)을 받고 있었다. 같은 또래의 청년 ‘에열’이라고 명명을 받은 심재선이라는 '사상8교회'의 신도 한명과 배짱이 맞아서 전국을 돌면서 연단을 받기로 하고 부산을 출발했다. 그는 나보다 두어살 년배인데 혀가 조금 짧은지 기분 나쁜 일을 당하거나 생뚱맞은 사람을 만나면 ‘개때끼(개새끼)’ 하면서 입술을 실룩이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에열’이라는 명명도 참 특이했다. 이런 이름이 성경의 어디에 있었던가, 기억이 전혀 없다. 이 친구와 거의 한달 가까운 긴 여정을 계획하고 여름방학을 기해 부산을 떠났다. 물론 그는 가짜 학생이었고 적당한 학교의 복장을 장만해서 학생처럼 위장을 해서 나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위장의 명수였던 당시 동방교에서는 그런일은 다반사였다. 지성(헌금)을 많이 바치기 위해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둘이서 서로를 의지하면서 부산을 출발했는데 가방의 쟈크를 열어서 펼치면 여러 가지 볼펜이며 손톱깍이, 껌, 비누등이 들어 있었다. 물건을 가득 채워가지고 경주, 포항쪽의 동해방면으로 진출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차장 누나에게 고학생이라고 떼를 쓰면 무임승차가 가능한 시절이었다.
도착하는 도시마다 번화가로 가서 다방, 술집, 가게들에 들어가서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쓴 채로 가방을 열어보이고 필요한 것을 사달라고 하면 고학생인줄 알고 고생이 많다고 하면서 웃돈을 더 얹어 사주는 것이다. 고생한다고 열심히 하라고 하면서 격려를 받기도 한다. 아침은 숙소에서 적당히 떼우고 점심은 간단하게 사먹기도 하지만 저녁 식사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늦은 저녁시간에 시장통 식당에 들어가면 팔고 남은 밥과 반찬을 양껏 먹으라고 주시는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잠은 지방에 있는 세칭 동방교의 지교회를 찾아들어가 자면 된다. 부산을 출발할 때 미리 연락처와 주소를 대충 알아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에 그 지방의 지교회를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또 그곳을 떠나면서 다음에 가게 될 도시의 동방교 장소를 미리 알아가지고 출발을 하는 것이다.
가방을 들고 이곳저곳을 찾아 장사를 하고, 즉 연단을 받고 늦은 시각에 동방교의 지교회를 찾아가면 성민이 연단받는다고 수고가 많다고 하면서 환대를 해주고 부산지방 지교회들의 안부와 소식을 묻기도 하고 동방교의 교주 할아버지 노광공의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하며서 서로 격려를 하고 신앙의 다짐을 주고 받기도 하는 것이다.
또 이곳 저곳의 소문을 듣고 소문을 전해 주기도 하면서. . . 같은 할아버지(?)의 손자들이니까. 지교회가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면 일반 교회나 절간을 찾아 들어가 하룻밤 숙박을 해결하기도 한다. 팔 물건이 떨어지면 어느 도시든 도매상을 찾아가 가방에 채워 넣으면 된다. 그렇게 공짜버스를 타고 공짜 밥을 얻어먹고 새우잠을 자면서 물건을 팔아 그 돈을 한푼도 나를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고 알뜰하게 모아서 지성으로 바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었다.
동해, 삼척을 거쳐 안동, 대구방면으로 다시 내려와 기차를 타고 천안, 대전방면으로 이동하면서 연단을 받고 있었다. 요새로 말하면 낭만어린 무전여행쯤 될라나. . . 기차 무임승차도 다 방법이 있다. 열차의 차장이 꼭 표 검사를 해서 기차표에 ‘찰칵’ 철인으로 표식을 해주던 시절이라 열차표 검사가 시작되고 저쪽 칸에서 검표 차장이 보이면 다음 칸으로 계속 밀려 나가다가 어느 역에 정차하게 되면 얼른 내려서 검표가 끝난 뒤칸으로 잽싸게 올라타는 방법이다.
웬만하면 무사히 통과하게 되는데 하차할 도시에 도착하면 제일 앞칸이나 뒤칸으로 내려 그늘진 곳에 숨어있다가 천천이 철길을 걸어 울타리나 담을 지나쳐 철길 밖으로 나가면 되는 것이다. 대전역에 내려 몇 번이나 성공한 그 방법데로 나가려다가 그만 철도공안 사무실 앞을 통과하는 순간에 친구와 같이 덜컥 잡히고 말았다.
공안사무실에 밤새도록 억류당하고 조서를 작성해서 새벽녘에 도착한 닭장차에 실려 대전지방법원 즉결재판에 회부되었다. 밤새 수집(?)된 각양각색의 잡범들과 같이 앉아 즉결재판을 기다리는데 재판석에 앉은 판사도 건수가 너무 많다보니 지겹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서류 한번 사람 얼굴 한번 슬쩍 보더니 ‘구류 며칠’ 하면서 방망이를 두드리고는 다음, 다음을 외치고 있었다.
친구는 ‘구류 1일’을 선고 받았다. 다음은 내 차례, 서류를 보고 얼굴을 슬쩍 보더니 똑 같은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훈방’하고 소리치고는 방망이를 두드리는게 아닌가, 참 희한도 했다. 한 사람은 ‘구류 1일’, 바로 뒤에 있던 또 다른 사람에게는 ‘훈방’이라니. . . 그때 그 판사님! 대법관에 오르셨는지, 부디 만수무강 하소서.
나는 즉결재판에서 ‘훈방’ 처리되어 바로 그곳을 나오게 되었고, 대전 시내에서 연단을 계속하다가 대전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를 하루 살고 나오는 친구를 다시 만나 수원, 안양, 서울, 인천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와 전주, 광주, 목포, 진주등 서남해를 돌아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나를 위해서는 붕어빵 하나도 사 먹지않고 알뜰이 챙겨 제법 많은 액수의 지성금을 갖다 바쳤다.
아. . . 지성(헌금)을 구하기 위해 천리를 마다않고 산천을 헤매던 그야말로 투지의 무전여행이었다. 이단 사이비종교 세칭 동방교에 미친 철없던 한 시절,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그 용기만큼은 가상한 시절이었다.
이런 저런 연단(행상)으로 바친 지성(헌금)이 상당한 금액이었을 것이다. 이런 공로(?)가 동방교의 고위 간부들에게 인정되고 그것이 누적 되어 동방교의 기준으로 볼때 믿음이 상당히 솟아난 성민(동방교의 신도를 일컫는 명칭)으로 간주 되었을까,
나는 세월이 얼마큼 흘러 부산경남지방의 세칭 동방교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초량12교회'의 전도사로 차출되었고 또 얼마후 상부의 부름으로 동방교의 총본부라 할 수 있는 서울의 용산에 소재했던 대기처 수원정으로 불려 올라가게 되었는데 차츰 그 기록도 이어갈 생각이다.
첫댓글
동방교의 대기처는 ㅇㅇ루, ㅇㅇ대, ㅇㅇ정.. 이렇게 중국집 이름같은 곳이 대부분이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 루, 정, 대는 옛날에 왕들이 머물던 곳이고, 성민들은 왕의 씨들이기에 그런 명칭을 쓴다고 해서 아! 그렇구나 하며 탄복을 했던 어리석은 기억이 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