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김복동
풍경화도 아닌 것이 인물화도 아닌 특이한 액자 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유년 시절 아버지의 방 아랫사랑 벽에 걸려있는 무채색의 액자였는데 하루에도 이 액자를 보기 위해 여러 번 사랑방을 드나들곤 했다.
눈여겨보면 액자에 박혀있는 반들반들하면서도 오돌토돌한 조각들이 다른 액자와 비교가 되었다. 좀 보태 말하면 고급스럽고 입체적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머리를 굴려봐도 도무지 그 속은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아버지가 금강산 여행에서 사 오신 액자라는데 이중으로 된 은빛 테두리에 그 배경을 보면 금강산의 겨울 풍경이다. 많은 눈이 내린 개골산, 미인송으로 칭송받는 자작나무 숲. 가지각색의 나무들도 동화작용을 끝내고 숨죽이는 휴식시간이다. 그 고요 속으로 걸어가는 의인화 된 한 영혼의 그림자가 흐릿하고 그 멀리 산 절벽에는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집 한 채, 오돌토돌하게 생긴 형상들은 금강산에 내린 많은 눈과 깊은 겨울을 충분히 상상하게 했다.
세상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알지 못하던 시기에 액자를 통해 처음으로 낱말을 익히기 시작했다. 우리 집 뒷동산만 알았지 금강산은 처음 듣는 산 이름이었고 자작나무 역시 생경한 이름이었다. 암자나 스님도 그랬다.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이런 단어들이 머리로 가슴으로 지남철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자작나무는 왜 그런지 사람을 꼼짝 못 하게 하는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줄지어 서 있는 미끈한 몸매, 자작이라는 이름도 가슴에 착 안긴다. 조건 없는 이 마력에 나는 꼼짝없이 반하게 되었고 언제가 될지 모르나 더 크면 금강산엘 꼭 가서 자작나무 숲을 거닐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게 되었다. 꿈을 꾸는 동안은 행복할 수 있었으나 그 기간은 얼마 못 가 깨지고 말았다.
어린 눈동자에 박힌 금강산, 자작나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은 8.15광복과 동시에 신변의 변화와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알게 모르게 시나브로 잊어갔다. 아버지도 우리 곁을 떠나 신지 오래되었고 그렇지만 가끔은 그 모습 그리울 때면 가뭇해지는 옛날의 기억이 오롯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긴 잠에서 깨어나는 액자의 출현은 어떤 의미로 보든 반가운 존재랄 수 있겠다. 아버지가 옆에 계신다면 옛날에 풀지 못했던 궁금증에 대해 여쭈어보고 싶고 많고 많은 물건 중에 왜 하필 무채색의 액자를 사셨느냐고, 이왕이면 눈이 번쩍 뜨이는 광채 나는 선물을 사 오시지 하면서 투정도 부리고 싶다.
아서라. 옛날 그 액자는 금강산에서 판매하는 선물 중에서 제일 귀한 대접을 받았던 공예품이란다. 금강산에 자생하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금강산 특산물인데 너도 이제는 세월을 먹을 만치 먹었을 테니 그 안목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느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꼼꼼히 들여다보면 액자에 담긴 의문이 풀릴 것이다. 형상화한 그림을 보면 암자와 스님이 보이지만 소리도 있단다. 당신을 기다리겠다는 꽃말을 가진 자작나무는 단단하고 곧아서 여러 각 나라에서 영험한 나무라며 신성시하고 있단다. 그냥은 들리지 않지만 잘 들어보면 숨어 있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희한하다. 꿈을 꾸고 있나? 이것은 꿈속에서 듣는 분명한 환청이다.
아버지의 의중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오래전에 풀지 못했던 그 실체를 알아가며 조금씩 다가가게 되었다.
시베리아가 고향인 자작나무는 한대성 수종으로 우리나라 고산이나 추운 지방에서만 자라는 나무다. 표피는 하얗고 광채가 나며 나무의 껍질은 가로로 잘 벗겨지는 특성이 있다. 그 껍질은 종이처럼 얇아서 공예품을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고 한다.
액자를 보고 내가 짐작하는 것은 껍질은 기름기가 많아 물감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단점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다만 검은 반점이 얇은 껍질과 조화를 이루어 부치고 덧대어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이를 틀에 끼워 입체적인 공예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알쏭달쏭 나를 애먹이던 조각 요것들이 반들반들 광이 나는 자작나무 껍질이었다는 것, 미술보다 더 공이 많이든 작품임을 비로써 알게 되었다.
귀족으로 불리는 자작나무는 강원도 인제 원대리와 횡성 그리고 평창에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금강산 자작나무와의 만남은 영영 글렀고 그렇다고 마음만 먹으면 가볼 수 있는 이 지역에도 아직 못 가고 있다. 시간의 속도는 마음의 속도라고 하는데 바쁘게 흐르는 시간을 알고도 남을 내가 너 뭐하냐고 묻는다.
액자 속 행간에서 읽지 못했던 부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는 불심이 깊었던 할머니의 아들이었음을 생각하면 불교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였음을 알겠다. 음력 10월 상달이면 스님들은 동안거에 들어가게 되고 시월 열엿새부터 다음 해 정월 보름까지 스님들은 한곳에 머물면서 수행을 한다. 하얀 도화지 위에 함박눈 내린 순결한 개골산. 의인화된 영혼의 모자이크, 보덕암에서 들려오는 염불 소리, 싸늘한 세상에서 하늘까지 닿을 수 있는 범종 소리, 아마도 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액자는 마음의 기도처였으리란 추측도 해볼 수가 있다.
많은 날을 애착하게 했던 판타지아! 다리에 힘 있을 때 길 떠날 채비는 하고 있으나 자작나무의 마중이 언제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