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독인가 두레박인가 돌멩이인가
“정상에 머무르지 않는 진짜 이유가……
"갈증이 사라질까 두려워서야. 내겐 갈증이 필요하다네. 나는 그것을 두레박 같은 갈증이라고 불러. 두레박은 물을 푸면 비워야 해. 그래서 영원히 물을 풀 수 있어. 독은 차면 그만이잖나. 채우는 게 목적이니까. 반면 두레박은 물의 갈증을 만들지.”
"그게 그 물질의 속성이니까요."
"두레박의 속성이지. 영원히 채울 수 없다는 것. 나는 사람들 지나가는 거 보면 딱 감이 와!
'저 사람은 두레박이구나! 저 사람은 물이구나!'
물독들은 제 인생을 남만큼 물로 채우겠다고 아웅다웅하며 살아. 반면 두레박들은 눈이 반짝반짝해. 좀 까칠하고 불만도 많고 빨리 걷지, 딱 두레박이야. 두레박들은 원하는 거 줘도 금방 딴 거 할 사람들이야. 붙들려고 하면 떠나버려 지적 보헤미안인 거라. 내가 늘 말하는 우물 파는 사람들이라네.”
“나 자신이 물독인가 두레박인가. 아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그렇지. 두레박 스타일은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직업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야. 인생이 변화무쌍해서 '나는 왜 이럴까' 곧잘 후회는 해도 자살은 안 해. 다음이 또 있으니까. 그런데 물독은 다 채우면 허무해진다네. 예를 들어 부부가 인생 올인하고 빚내서 아파트 한 칸 마련했어. 이사하면 그다음에 뭘 할 거야?"
"남들처럼 새 기구 넣어야죠. 욕망은 매일매일 새살처럼 자라나니까요."
"남 쫓아가는 욕망은 물독도 두레박도 아니고 돌멩이라네. 아름답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그 갈증을 자기 안에서 만들어내지 못하면 돌멩이처럼 되는 거야. 문제 하나 내지. 자네 앞에 열두 개의문이 있다고 상상해보게나. 한 개는 행복의 문이고 나머지는 지옥의 문이야. 하나의 문을 선택해서 들어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어렵네요. 우물쭈물하며 시간만 보낼 것 같습니다."
“행복의 문이 저 앞에 있지만, 잘못 열었다가는 떨어져 죽을 테니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겠다는 거지?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의 문바깥만 서성거리는 사람,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자의 태도지,
그런데 정반대가 있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행복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죽어라 올라가 거기 가면 또 행복은 다른 산꼭대기에 있다고 해. 이 사람은 계속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거야. 사람은 그렇게두 종류야. 가만히 앉아 어딘가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부산하게 행복의 뒤꽁무니를 쫓아 뛰어다니는 사람."
“선생님은 어느 쪽이신가요?"
"나는 산도 올라가고 호수도 건너가지."
“거기에 행복이 있었나요?"
"나에게 행복은 완벽한 글 하나를 쓰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계속 쓰는 것이고.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은 실패한 글이라네. 지금까지 완성된 성인들 중에 글을 쓴 사람은 없어. 예수님이 글을 썼나? 공자가 글을 썼나?다 그 제자들이 쓴 거지. 역설적으로 말하면 쓰여진 글은 완성되지 못한글이야. 성경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인간이 쓴 글이고 세상의 모든 경전, 문자로 쓰여진 것은 결국 완성되지 못한 그림자의 흔적일 뿐이네. 나 또한 완성할 수 없으니 행복에 닿을 수 없어. 그저 끝없이 쓰는 것이 행복인 동시에 갈증이고 쾌락이고 고통이야. 어찌 보면 고통이 목적이 돼버린 셈이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189~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