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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입니다.
대통령선거일과 맞물려 있는 주간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국가를 위하여 당파를 버리고
헌신할 수 있는 지도자가 선출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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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자)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루카 3,10-18]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늘 하느님의 마음이 알쏭달쏭합니다. 그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주일학교 시절 “하느님은 우리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신다”는 설명에 감격하여 토를 달지 않던 믿음의 순수를 잃은 증거라 싶어 부끄럽습니다.
오늘 스바니야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고백에 또 마음이 아리송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기에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는 일방적 사랑을 선포할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기 힘들었습니다. 오직 인간을 ‘위해서’ 인간들 ‘때문에’ 기뻐하시며 당신께서 우리의 전부를 책임지시고 해결해주시는 대책 없는 사랑을 무엇에 견주어 이해해야 할까요.
크신 사랑을 ‘알듯 말듯’ 이런 듯도 하고 저런 듯도 하여 말문이 막힌 제 꼴을 가엾이 여기신 주님께서 사도 바오로를 ‘선생님’으로 보내 주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 2독서가 일깨워주는 믿음의 정석을 깊이 새깁니다. ‘믿음으로’ 주님 안에서 오직 기뻐하며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것을 다짐합니다.
성경 말씀은 주님께서 선포하신 진리입니다. 강론도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당신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일깨우고 변화시키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성경 말씀이나 강론을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생각지 않습니다. 뻔하고 지루한 ‘잔소리’로 여깁니다.
이 때문에 믿음의 초심을 잃습니다. 그분을 향한 길에서 멈추어 방황합니다. 결국 이정표를 잃고 목적지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과 세상 사이를 오락가락 헤매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는 그분의 당부를 등경 속에 묻은 채, 어둠 속을 표류하듯 제자리만 뱅뱅 돕니다.
인간에게는 싸우고 이겨서 빼앗아 쟁취하려는 동물적 근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동물적 행위를 성찰할 때, 누구나 가책을 느낍니다. 과하고 지나친 자신의 행동에 양심이 콕콕 찔려서 후회하고 반성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을 찾은 사람들이 기가 팍 꺾여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며 해결책을 구한 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에도 이스라엘 민중들의 삶의 자세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옷을 두벌 가진 사람’도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모두 똑같이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세상 모르는 순진한 소리’에 잠시 잠깐 그들의 양심이 흔들렸을 뿐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매일, 수없이 그분께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묻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여쭙지만 여태 ‘생각만’ 간절한 우리 형편에서는, 도무지 퇴박할 명분이 없습니다.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게으르며 세상 이치에서 그분처럼 순진해지기를 거부하는 우리이니, 유구무언입니다. 예로부터 내내, 진리의 말씀을 대하는 허술한 인간의 심사를 살피며 마음만 씁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간의 양심은 ‘바르게 살아가라’는 근본적인 윤리가 “마음에 쓰여 진 것”(로마 2,15)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영성가는 양심을 “하느님께서 파송한 ‘주님의 사자’이며 인간에게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는 도구”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 우리 모두가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허술히 대한 일들로 인해서 양심이 쿡쿡 찔리는 아픔을 겪게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마음이 아파서 참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은총이 있기를 청하겠습니다.
지금 내 삶에서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말씀으로 일깨우시는 분, 어떻게 고쳐야 할지 강론으로 직방 일러주시는 그분의 지침을 귀담아듣지 않은 허물이 고쳐지기를 원하겠습니다. 매 주일 허약한 영혼에 말씀의 영양소를 공급받는 건강한 믿음인이 되기를 소원하겠습니다.
대림, 온 세상이 그분을 주목합니다. 이웃에게 그분의 축복을 전하고 그분 자녀의 행복을 전할 수 있는 최적의 때입니다. 우리 모두, 크신 그분의 능력을 ‘내 것처럼’ 누리는 기쁨을 자랑하면 좋겠습니다. 그분께 선물 받은 사랑을 왕창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보이지 않아 알쏭달쏭하다고, 들리지 않아 아리송하다고 갸웃거리는 세상에 그분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는 사랑의 병기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장재봉 신부 (가톨릭 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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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7일 (월) (자)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17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성탄도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미사 독서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읽을 때에는 괜히 신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말을 듣는 신자들이 지루해할 것이라는 노파심 때문이었습니다. 최영미 시인은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쓰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허무하다. 그치? 어릴 적, 끝없이 계속되는 동사의 수를 세다 잠든 적이 있다.”
가계의 영속과 씨족의 유대를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족보가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조선 시대가 그랬습니다.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족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문중에서 부끄러운 사람은 의도적으로 족보에서 빼 버리고, 자랑삼을 만한 벼슬을 한 사람은 사실 이상으로 과장해 온 것이 우리나라 족보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부끄러운 선조의 이름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왜 그런지 궁금합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잘못과 허물로 물든 인간을 도구로 당신의 구원 역사를 펼쳐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곡선을 가지고 직선을 그리시는 분이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오, 복된 죄!”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로써 구원으로 이끄셨던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지나온 우리 삶의 과정을 조용히 들여다봅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흔적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12월 18일 (화) (자)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8-24
『그대 만난 뒤 삶에 눈떴네』라는 책은 삶과 치유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담은 실화입니다. 이 책은 질병의 고통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내용 가운데 특히 ‘조각 그림 맞추기’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공감을 느꼈습니다. 그림 조각들에서 밝지 않은 색깔이나 예쁘지 않은 모양의 조각이라고 해서 그것을 빼어 버린다면 절대 그 그림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도 일종의 조각 그림 맞추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그림 조각을 완성하려면 어둡고 예쁘지 않은 그림 조각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생은 많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조각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조각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버린다면, 인생의 전체 그림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기쁘고 행복한 순간만을 인정하고, 실패와 좌절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은 거부한다면, 우리 인생의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가 없습니다. 잊고 싶고 감추고 싶은 마지막 한 조각까지도 우리 삶의 한 부분입니다. 그 마지막 한 조각으로 마침내 우리 인생의 그림이 완성됩니다. 고통과 슬픔이라는 삶의 조각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요셉은 이해하기 힘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혼인도 하기 전에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삼았을 때에 찾아오는 앞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까지도 자기 삶의 한 부분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자신의 삶의 조각 그림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셉의 삶으로 맞추어 놓은 조각 그림을 참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12월 19일 (수) (자)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5-25
필리핀의 마닐라 시내 한복판에는 커다란 성(城)이 하나 있습니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하던 시절, 스페인 군대는 성벽을 쌓고 그 안에 작은 도시를 만들어 식민지 통치자들과 군대를 거주하게 했습니다. 성안에는 요새가 있는데, 그곳은 스페인 군대의 본부가 있던 곳이자, 필리핀의 국민적 영웅 호세 리잘이 감옥에 갇혔다가 처형된 곳입니다. 독립운동가인 리잘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35세에 처형되고 맙니다. 필리핀에서는 그가 처형된 날을 국경일로 정하여 조국을 사랑한 그의 애국심을 기리고 있습니다.
리잘이 처형되기 전날, 그는 조국을 위해 유서 같은 긴 시를 썼는데, ‘마지막 인사’(Mi ultimo adios)입니다. 다음은 감옥 벽에 적혀 있는 그 시의 일부입니다.
잘 있거라,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여./ 나의 이 슬프고 암울한 인생을/ 기꺼이 너를 위해 바치리니/ 더욱 빛나고, 더욱 신선하고, 더욱 꽃핀 세월이 오도록/ 이 한목숨 바치리다.
저는 이 시가 적힌 벽 앞에서 한참 동안 깊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무릇 한 나라의 지도자란, 조국을 위하여 자신의 최후의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태우는 사람이어야 하는구나!’
오늘은 우리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뽑는 날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그 기대에 대한 결과는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12월 20일 (목) (자) 대림 제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26-38
부모의 눈에는 자기 자녀가 가장 소중합니다. 자녀가 공부를 못해도, 설령 잘생기지 못했어도 그렇습니다. 부모의 마음에 담겨 있는 사랑 때문입니다. 문득 언젠가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꽃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내 안에 꽃이 자라나야 한다.” 돈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꽃을 보면 ‘저건 얼마짜리이지?’ 하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아름다운 마음이 없다면 꽃을 보아도 무덤덤합니다.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 사람 마음에 아름다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욕심이 많고 이기적인 사람을 그림으로 그릴 때에는 고약하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성모님을 묘사한 예술 작품은 모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모님께 담겨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사심(私心)을 조금도 품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의 관심은 오직 하느님의 뜻이었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은, 모든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만을 추구하며 사신 성모님에게서 발견한 최고의 미를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꽃향기처럼 그 삶의 향기가 퍼져 나갑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바로 나에게서 시작됩니다. 이 세상이 선해서 내가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한 내가 모여 세상을 선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아름다운 마음을 키울 때, 그것이 이웃에게 전해지고, 결국 세상에 이릅니다.
12월 21일 (금) (자) 대림 제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39-45
우리는 어려움이나 고통은 되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다른 이에게 드러내는 것은 약한 모습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고통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힘든 일이나 고통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줍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고 할 때 외로움과 슬픔은 더욱 깊어집니다. 고통이나 슬픔, 병이나 약함은 혼자만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아닙니다. 고통이나 약함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 인’(人)이라는 한자를 풀이해 보면, 두 사람이 기대어 있는 모습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기대어 살고,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고독한 섬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사는 존재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유다 산골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 두 여인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하는 가운데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하면서 자신들의 어깨에 지워진 짐의 무게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두 여인은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촌 간의 우애로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두 여인은 유다 산골에서 서로 용기를 주며 구세사의 꿈을 키워 갔을 것입니다.
12월 22일 (토)[(자)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46-56
우리는 다른 이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기쁨을 느낍니다. 더욱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에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 받은 사랑과 신뢰에 대한 환희의 노래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사하며 사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앤서니 퀸이 주연한 ‘길’이라는 오래전의 흑백 영화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 잠파노가 유치장에 들어가자 주인공의 여자 친구인 젤소미나는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자 주인공의 친구가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어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젤소미나,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어. 이 돌멩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세상 모든 것에도 의미가 있을 수 없어.”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면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요?
‘마리아의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려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낮고 천한 우리를 보살피시면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궁핍과 질병, 두려움과 불안 등 온갖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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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제 기도가 무엇인가요?
[문]
본당에서 떼제 기도를 합니다. 은은한 분위기에서 기도하는 게 좋기는 한데, 정작 떼제 기도가 뭔지 모르겠어요.
[답]
조명을 어둡게 하고 촛불을 켠 성전에서 접한 떼제공동체 기도모임이 낯설 수도 있겠네요. 흔히 떼제 기도로 부르는 공동체 기도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드리기 위해서는 떼제공동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떼제공동체는 1940년 설립된 국제 수도회 이름입니다. 떼제는 이 공동체가 자리한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 이름입니다. 떼제공동체는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화해의 길을 찾고, 또 이를 통해 인류의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오늘날 떼제공동체는 30개국 출신 100여 명의 형제들로 이뤄지는데, 그들은 가톨릭 및 다양한 개신교회 출신입니다.
공동체의 핵심적인 말 가운데 하나는 '신뢰'입니다. 인간의 고통도 비참도 바라지 않으시며 사랑만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는 마음의 평화를 주는 원천입니다. 동시에 인간들 사이의 신뢰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떼제공동체 설립자 로제 수사는 "신뢰의 숨결은 마음의 사막에 꽃이 피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이지요.
한국에서는 '떼제미사', '떼제기도'로 부르지만, 떼제공동체는 이 기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떼제공동체 기도는 침묵과 더불어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기도 방식의 하나인 이유입니다. 형식보다는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본질이 중요한 셈이지요.
성전을 어둡게 하는 것 역시 편안한 분위기에서 기도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와 성화, 성서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촛불을 켜고 꽃으로 장식하는 것 역시 기도 중에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지요. 기도 참가자들이 모두 같은 쪽을 보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분이 그리스도인 이유입니다.
떼제공동체 기도 중 '떼제의 노래' 역시 편안한 기도 분위기처럼 따라 부르기 쉽게 반복되는 형태입니다. 하지만 묵상을 위해서는 노래를 정확하게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전체 기도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참가자들은 기도회 전에 미리 연습을 해두는 것도 좋겠지요.
떼제공동체에 대해 조금은 답이 됐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음 공동체 기도는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 : 백영민기자(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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