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상 남의 집을 종종 방문한 적이 있다. 공인중개사의 일이 그것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에는 부산에서 처음으로 분양한 대형 평수만의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이삼십 평 대의 아파트가 주류를 이루는 곳에, 사는 사람이 육십 평대에서 팔십 평 대의 아파트 실내안내를 한 것이다.
탁 트인 바다는 햇살에 반짝였고 시시때때 변화하는 물결까지도 보였다. 수평선 위에는 배들이 유유자적 쉬고 있었다. 초록의 섬과 해안의 굴곡 하나하나가 클로즈업되어 한 장의 작품사진이 되었다. 파라다이스! 그곳은 그 단어가 어울렸다.
전망보다도 나를 흥분 시킨 것은 인테리어도 구조도 아닌 실내의 크기였다. 작은 방이나 안방에서 사람이 부르면 들리기나 할까. 휴대폰으로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닌지, 혹 위험에 처했을 때 비명이라도 지르면 들리기나 할런지.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네댓 개의 방을 안내할 때면 이런 집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직업은 무엇일까. 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수 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삼 년 정도 일을 하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유대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엉겨진 등나무처럼 유연히 몸을 틀어 자기들끼리 몸을 비볐다. 소리 없이 매끄럽게, 천천히 그러나 날쌔게, 어느새 저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성안에 끼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똑같은 집을 구했다. 허기진 사람처럼, 조갈증 환자같이 절대적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그곳은 자신들의 자존심이자 브랜드였다.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내 마음의 출렁임도 태풍 매미의 속도처럼 빨라만 갔다. 한바탕 휘젓고 간 태풍 뒤에 남은 것은, 내 안에서 겨워 낸 쓰레기더미들이었다. 내 속같이 썩은 해초들, 부초처럼 떠오른 스티로폼, 욕망의 비늘인 양 널브러져 말라버린 하얀 소금기 들이었다. 헛구역질이 났다. 왼쪽 이마가 동전 크기만큼 아파왔다. 후빈 마음의 깊이만큼 입속에서는 궤양이 자라고 또 스러졌다.
그리웠다. 서까래가 훤히 보이는 시골집을 꿈꾸었다. 드문드문 볏짚이 보이는 흙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두어 평의 작은 방은 장작 불꽃으로 자글거리게 하고 뜨거운 방에 서러운 등을 뉘여 한껏 울었으면 했다. 서리 낀 뼈마디가 노곤해질 때까지 누워 천정을 보며 빗살 놀이도 하며, 창호지 문 사이로 들어온 순한 햇살을 따라 유영하는 먼지의 놀음을 보리라. 뒤란 댓병 속을 울리는 새하얀 바람의 공명을 들어봐야지. 그러다 잠이 들었다.
순한 눈을 가진 암소가 누운 모양으로 집은 창호지 문만 뽀얗다. 살구나무 아래에는 소녀를 기다리는 나무로 만든 시소와 그네가 저 혼자 바람을 타며 헤적질을 한다. 아버지가 손수 깎아 만들어 주신 놀이터는 오직 우리 집에만 있다. 살구꽃이 살풋 콧등을 간지를 때 그네를 타는 이이는 살구꽃보다 더 붉은 뺨으로 발 구름을 했다.
중년의 한 여자가 있다. 강아지 한 마리를 언제나 안고 다니는 여자다. 소파 방석 위에 아이를 앉히듯 강아지를 올린다. 아들과 딸은 이제 너무 자라 부모를 보러 올 시간이 없다. 남편은 언제나 사업과 골프모임, 업무에 바쁘다. 그녀는 사우나 회원권으로 실컷 목욕을 하고 마사지도 받는다. 네일 아트로 화려하게 손 치장도 한다. 바다가 보이는 라운지에서 차도 마셔본다. 하지만 시간은 겨우 오후 두 시를 넘기기 어렵다.
너무나 큰 그녀의 집은 값비싼 가구로 질식할 듯 좁다. 할 일 없는 그녀가 모아들인 갖가지 시간의 시체들이 널려 있다. 체온을 잃어버린 집은 개들의 영역 표시로 축축하다. 집은 있으나 마음이 머물 자리 한 뼘 없는 곳에서 극한 절망에 빠진다. 온몸을 동그랗게 말아 한껏 작아지는 그녀는 달팽이가 몸을 감추듯 고개를 접는다.
사람들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그저 바람을 막아주고 하루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부의 상징이 될 수도 있고 과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이에게는 가족과의 오순도순 정을 나누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안식의 터가 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그저 무겁고 지친 몸을, 뉘일 방 한 칸이 집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물려받은 번듯한 집 한 채일 수도 있고 아끼고 모아 몇 년 만에 장만한 첫 집일 수도 있고 내 집 마련을 꿈꾸며 내일을 준비하는 세 들어 사는 사람도 있다. 계층의 상징이든 마음의 안식처이든 팍팍한 삶의 현실이든 집 없이 하루를 살기는 어렵다.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집을 이고 가는 그녀가 녹초가 된 달팽이가 되었다. 그녀의 등 위에 작지만 딱 맞은 집을 씌워 본다. 연약해서 생채기 잘나는 그녀를 감싸 안아줄, 하루의 이야기를 속살거릴 수 있는, 더듬이를 세워 기분은 읽어 줄 수 있는 집 하나 얹어 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만으로 머문다. 그녀는 큰 집을 절대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아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그녀를 안타까운 눈빛만으로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창밖의 고층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진심을 묻고 있다.
첫댓글 아침부터 마음이 짠 해 집니다. 넓고 화려한 집을 가졌다고 모두가 행복한 삶 이랄 수가 있을까요?
오래전에 아이파크에 가 본 적이 있답니다. 거실에서 제일 끝방 까지는 아물거려 잘 보이지가 않더군요. 가족중의 누군가가 죽어나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오싹하여 그만 나오고 말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데이빗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