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바울 역시 일정한 기간 동안 성령의 은밀한 역사와 영적 투쟁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서 죄 사함을 받는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개신교회를 일으킨 마틴 루터의 경험도 그렇고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루터로 하여금 루터가 되게 만든 것은 단순히 그의 스승 스타우비츠가 전해 준 한 마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3,4년 동안 수도원 안에서 홀로 사색과 기도하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으며 진리를 찾아서 방황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감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존 번연의 경우도 그가 죄 사함의 위대한 진리를 깨달은 후에 오히려 1,2년 동안 베드퍼드 감옥에서 외롭게 지내는 단련의 과정이 필요하였다. 진리를 깨달았을 때는 내가 그것을 느끼든지 않든지를 불문하고 나의 신앙적 경험과 성장이 진일보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상관없이 아무리 울고 절규하고 기도하고 매달리며 눈물을 흘려보아도 그것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값싼 감정에 불과하다. 냉정한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 그리고 양심의 결정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어떤 부흥회나 집회도 무가치하다.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서 변화와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의 진리 위에서 부흥하는 일이 필요하다. 감정적 부흥을 조장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요한 웨슬리와 휘트필드의 부흥회 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는데, 감리교회의 선구자들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부흥사가 아니었다. 요한 웨슬리는 매우 논리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목사였다. 그는 진리와는 상관없이 소리만 지르는 감정적 설교가가 아니었다. 그가 진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감리교회가 오늘날까지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오늘날 그의 후예들이 그의 가르침을 땅에 내려 놓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참된 부흥은 이성과 양심이 진리를 심사숙고한 이후에만 올 수 있다. 진리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감정은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다.
감정적 부흥회를 지지하는 목사들은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느낄 수 있는 수단으로 부흥회를 오용하고 있다.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부흥회를 찾아가 절규에 가까운 통성 기도와 시끄러운 음악을 통하여 황홀한 무아지경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텅 빈 마음을 채우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감정적 확신을 얻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현대의 생리학자들은 오늘날 부흥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감정적 변화들을 극단적인 신경 작용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사회심리학자들은 부흥회를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 감정적 기쁨과 행복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부흥회를 이용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넓은 길을 선택하는 이유
사람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될 자이면서도 죄를 짓는다. 깨끗하게 살아야 할 의무와 그렇게 살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함을 잃어버린다. 천사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짐승의 수준까지 떨어져서 헤맨다. 올라가면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내려가면 지옥의 자식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무한한 영광과 무한한 타락 이 둘 중 어느 것도 인간이 이를 수 있는 형편이다.
내려가기는 쉽게 생각되고 올라가기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그러나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양심의 가책이 있고 후회와 불행이 있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도 결코 쉽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길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고 성경 말씀의 뒷받침이 있으며 죄로부터의 구원이 있고 간간히 쉬어갈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있지만 육체의 끊임없는 방해가 있고 세상이 유혹을 던지기 때문에 올라가는 길도 쉽다고 말할 수는 없는 길이다. 두 길 모두 어려운 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바는 행하지 않고 자꾸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게 되는 경험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모두 두 개의 나 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나는 또 하나의 나와 늘 싸우고 있다. 참으로 인생은 전쟁과 투쟁의 연속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음과 같은 세네카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전쟁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투쟁이 너무나 길고 힘들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쟁하기를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투쟁이 힘들고 전쟁에서의 패배가 싫기 때문에 아예 그것을 잊어버리기 원한다. 성령께서 양심을 괴롭혀 주는 것이 싫고 다가오는 유혹과 육체의 욕심에 맞서서 싸우기가 싫기 때문에 쉬운 구원을 찾아서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 다닌다. 이런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 소위 말하는 부흥회이다. 그곳에는 죄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으며 계명도 없고 순종도 없으며 극기와 인내도 없다. 오직 감정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지만 그곳은 내려가는 길로 연결되어 있는 넓은 길이다. 육체와 유혹이 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넓은 길이다. 존 번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가끔 개와 고양이의 신세를 부러워했다. 왜냐하면 개나 고양이에게는 사람이 겪어야 할 선과 악의 싸움과 투쟁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존 번연 역시 두 개의 내가 싸우는 전쟁이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구원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선과 악의 전쟁을 포기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면 거기서 구원의 평안과 승리가 얻어진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3-24).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인데,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길을 걷기 원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때문에 그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넓고 평탄한 길을 선택할 것이며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좁은 길은 감정적인 길이 아니다. 그 길은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 다음 인내와 극기로서 걸어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진리가 있고 죄를 버림으로써 얻는 평안이 있으며 은은한 성령의 인정하심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심령의 참된 부흥을 경험한 사람은 주저 없이 좁은 길을 걷기로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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