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에서 사육신, 동작충효길
1.심훈 생가 터
아득히 먼 날의 이야기 같다
학교 다닐 때 심훈의 상록수와 이광수의 무정을 모르면 책을 읽지 않은 것처럼
대화에 끼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우연히 심훈의 생가터가 후암동에서
멀지 않은 한강대교 건너 흑석동에 있음을
알고는 곧장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우중충한 날씨의 황사가 겹쳐
황사 마스크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
서울역, 동작역, 흑석역으로 연결하여
천주교 흑석동 성당을 찾아갔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곳곳에 선거 현수막이 걸렸는데
이 지역엔 국민의 힘 나경원과
더불어 민주당 류삼영의 현수막이
자기를 보아 달라며 애절하게 펄럭거린다.
2.천주교 흑석동 성당
나에게 성당은 건축사적인 의미로 다가와
아주 오래된 명동 성당이나 약현성당,
인천의 답동 성당을 자주 보다가
현대식 건물의 흑석동 성당을 보니
오히려 낯설고 생경하였다
신자 분의 신앙의 울타리나 성전으로
보지 않고 건축사와 문화적 시각으로
바라본 탓일 게다
성당 입구 왼쪽에 작은 표지석에
심훈 생가터와 일대기가 적혀있다.
"심훈은(1901~1936)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었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과 함께 퇴학 당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수학하다가 1924년
귀국했다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 영화
'먼동이 틀 때', 시 '그날이 오면', 소설
'상록수' 등의 작품을 남겼다" 라고.
3.시
심훈의 대표 시를 읽으면서
우리 주변의 똑똑하고 독창적인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모두 자신의 삶을
가장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날이 오면/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4.효사정 공원 유래
큰 길을 건너 강변 쪽으로 나가가면
올림픽대로 위의 효사정 공원을 만난다.
효사정은 효도의 상징으로
한강을 바라보는 수 많은 정자 중에
경관이 제일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 '노한'의 별장이었다.
명불허전, 한강의 풍경은 그림 같은데
흐린 날씨와 황사로 가시거리가 짧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이곳에 정자를 짓고 3 년간 시묘를 했으며
때때로 개성에 묘를 쓴 부친을 추모하였다
정자 주변을 제외하고는 노한 보다는
심훈의 공원처럼 심훈의 기록과 작품,
이야기가 곳곳에 게시되어 있었다
이곳만 찬찬히 둘러보면 심훈의 삶을
제대로 알 수 있을 만큼 적어놓았다.
5.공숙공 노환 이야기
노환은(1376~1443) 조선 초기 문신으로
좌의정 '민제'의 사위로
태종과는 동서지간이었다.
1408 년 한성부윤을 하던 다음 해에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신극혜와
함께 종친을 이간하고 불충의 언동이
있었다고 유배되어 사사되자
연좌에 걸려1409 년 파직 당하였다.
그 후 양주 별장에서 은거하였는데
세종 4 년에 상왕 태종이
'노한이 민씨에게 장가들었다고
고신까지 거두게 된 것은
그의 죄가 아니니 급히 불러들이라' 라는
전교에 의하여 다시 한성부윤으로 복관되어
나중에 우의정을 마지막으로
벼슬을 내려놓았다.
6.심훈 문학길
한강의 흐름을 따라가는 뚝길처럼
효사정 공원에서 한강대교 가는 길에는
심훈의 이야기가 곳곳에 걸려있는
오솔길을 걸으면 왼쪽엔 현충원 길
발아래는 올림픽대로 차량의 소음이
만만치 않았다
이 소음만 차단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훈 문학 길의 끝까지 걸어
한강대교를 걸어서 용산역, 삼각지 거쳐
서울역까지 갈까 하다가
사육신 묘가 떠올랐다.
지나가면서 늘 가봐야지 했는데
방향을 사육신 역사 공원으로 정하니
발길이 한결 가벼워지고 빨라진다
한강대교로 가는 교차로에서
동작충효길의 팻말이 보인다.
그리고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용양봉서정의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들렀다 가기로 한다
7.용양봉서정 이야기
정조가 노들나루의 배다리를 건너
이곳정자에 올라서 바라보니
북쪽으로는 산이 우뚝하고,
동쪽에서는 한강이 흘러나오는 모습이
용이 뛰놀고, 봉황이 나는 듯하다고 하여
‘용양봉저정(龍驤鳳翥)'이라고 이름 지었다
석단 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목조 단청 기와집으로
정조가 수원에 있는 현륭원에 행차 길에
쉬어가는 곳으로
가마를 타고 한강 주교를 건넌 정조는
이 용양봉저정에서 잠시 머물러
휴식 취하고 점심을 들곤 했다.
서정소라고도 불렸던 이곳에는
당시 노들강(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일을 하는 주교사와 주교 대장도 있었다.
이 건물은 견실하고 단아한
정조 대의 행궁 건축으로 주위에는
일부 건물의 기단부와 주초석이
아직도 남아있어 당초에는 정문과
두어 채의 다른 건물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간통 단층인 이 용양봉저정은
온돌구조로 견실하게 지어졌다.
이 정자 안으로 들어가 벽에 걸린
정조의 화성능행도와 일정
그리고 배다리 등의 기록이 있었다.
편안히 좌정하여 정조의 눈으로 한강을
내려다보니 강물은 예나제나 소리 없이
흐르는데 사람은 이리 많이 바뀌는구나.
8.배다리 정조와 정약용
정조는 해마다 아버지의 능이 있는 수원 화성으로 참배를 갔는데, 그 사이에는 폭 600M가 넘는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수천 명의 사람과 수백 필의 말이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는 배다리를 만들기 위해 정조는 다리를 관리하는 관청인 주교사를 설치, 정약용을 책임자로 배정했다.
정약용은 36척의 배를 엇갈려 두고 그 위에 가로 목과 세로 목을 연결해 칡끈으로 단단히 고정했으며 수평을 맞추기 위해 판자를 씌워 흙과 잔디로 포장했다.
정자를 나와 사육신 묘로 향한다
9.노들나루 공원
9호선 노들역으로 내려가서
노들나루 공원 입구로 나아왔다.
봄을 부르는 여러 꽃 중에서 자목련이 봉우리를 북쪽을 향해 새처럼 앉아 있다.
북향화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이곳에서 사육신묘까지는 작은 길로
이어져 있어 시끄러운 차도로 걷지 않아도
된다
노들나루는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사이에 있었는데, 서울로 통하는 한강의 나루터 중에서도 충청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군대가 머무는 진이 설치되었던 나루이다.
‘노들’의 의미는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동작구 본동 일대이다. 여기에 있던 나루터를 ‘노들나루’라고 불렀는데, 이를 한자어로 바꾼 것이 노량진이다.
조선 초기에 세종과 세조는 온양온천으로 휴양하러 행차 시 이용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숙종의 영릉 행차와 강남에 위치한 태종, 세종, 중종, 효종의 국장에도 이용되었다. 특히,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을 수원에 마련하고 능행에 노들나루를 이용하였다.
이 때문에 노들나루에도 한강나루·삼전도에서와 같이 배다리가 놓이게 되었고, 정조는 이를 위하여 주교사라는 전담 관청을 설치하였다. 연산군 때는 이곳의 나루만을 통행하도록 하고 나머지 한강의 모든 나루를 봉쇄하기도 하였다.
10.사육신 역사공원
오솔길과 아파트 사이를 걸어 목적지에
도달했다. 맨발의 충동을 자제한 걸음이다
사육신묘 주변의 흙길엔 맨발로 조심스레
걷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하여, 1691년(숙종 17) 이곳에 민절서원을 세우고, 1782년(정조 6)에는 신도비를 세웠다. 서울시는 1955년 그 자리에 육각의 사육신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수축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응부만 묻혔으나, 1977∼1978년 사육신묘역 정화사업 때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가묘도 추봉하였다.
사육신 역시관이 올 3 월 중순경에
재단장하여 문을 열었다.
조선 전기의 권력 투쟁의 아우성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충과 효가 최고의 선이었던 시대와
요즘 시대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시 충효의 화두를 물고 공원을 나왔다
11.노량진 먹걸이/수산시장
노량진 수산 시장에 들러 횟감을 구매하여
식당으로 가면 실비로 요리해 주니
혼자보다 나중에 누구와 이곳에서
술잔 기울여 한잔 할까 생각하다가
1호선 노량진 역사로 들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