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7년 5월 3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1948년 12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내 나이 ‘한 살 반’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흔하디 흔한 도민증(道民證) 사진 한 장도 남긴 것이 없어서 좋은 화가를 만나도
나는 아버지의 초상을 그리게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의 무덤에서 백 미터도 채 안 떨어진 생가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 무의식에는 찍혀 있을 테지만 내 의식으로는 그것을 재생할 수 없다. 사춘기 때부터 아버지의 사진 한 장이
그렇게 가지고 싶었다. 주위 어른들은, 일본에는 아버지의 사진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숙부댁을 자주 드나들었고, 징용 근로자가 아닌 자유 근로자로 일본에서 일한
경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 쉰 살이 거의 다 되어서야, 숙부가 살던 오사카 위성도시 후세시(布施市)를 찾아갔다.
‘아라카와 산초메(荒川三丁目)’…어린 시절 동요의 노랫말처럼 외고 다니던 숙부님댁 주소다.
숙부는 재일교포 북송을 지휘하던 사회주의자였다. 며칠을 머물면서 뒤졌지만 나는 끝내 아버지의 사진은 물론
돌아가신 숙부와, 사촌 형제들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돌아오기 전날 밤, 깊숙한 데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숙소를 함께 쓰던 사람은 내가 ‘소처럼’ 울더라고 했다. 나의 아버지는 나를 두고 멀리 떠난 분이 아니다.
돌아가신 분일 뿐이다. 아버지의 사진을 갖고 싶다는 생각,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아버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아비 찾기‘ 이야기는 언제나 내 마음 깊은 데를 울린다. ‘아비 찾기’는 결국 ‘나 찾기’다.
‘동명왕편’에 따르면, 어머니 예씨부인이 남쪽으로 떠난 아버지 주몽을 찾아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유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버지는 임금이신데 아들인 저는 남의 신하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저 비록 재주 없는 아이이기는 하나 심히
부끄럽습니다(아버지 찾아 떠나겠습니다).”
어머니 예씨부인은 아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 준다.
“너의 아버지가 떠나면서, 만일에 아들을 낳거든 들려주라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아버지는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 밑(칠릉석상송하·七稜石上松下)에다 신표(信標)를 숨겨 두었으니, 능히 이것을 찾아내어 나에게 오는
자가 있으면 아들이라 할 것’이라고 했다.”
‘동명왕편’의 유리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유리가 산골짜기를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지쳐서 돌아온 유리의 귀에, 기둥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가서 살펴 보니, 주춧돌을 타고 선 기둥은 모서리가 일곱이었다,
과연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기둥 밑으로 구멍이 있었다.
바로 그 구멍에서, 칼토막을 찾아내고 유리는 크게 기뻐했다.…유리는 그 칼토막을 가지고 고구려로 가서 주몽왕께
바쳤다. 왕이, 자신이 가진 칼토막을 꺼내어, 유리가 가져온 칼토막과 맞추니, 피가 흐르면서 이어져 한 자루의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 물었다.
‘네가 실로 내 아들이라면 어떤 신성(神聖)함을 지니고 있느냐?’
그 말을 듣고 유리가 공중으로 몸을 솟구치자 해에 이르렀다. 왕은 유리의 신이(神異)함을 기특하게 여기고
태자로 삼았다….”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동명왕편’에는 ‘일곱 마루 일곱 골짜기, 돌 위의 소나무(칠령칠곡석상지송·七嶺七谷石上之松)’로 기록되어 있다.
‘상징’을 뜻하는 영어 ‘심벌(symbol)’은 고대 그리스 말 ‘쉼볼레인’(symbollein)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맞추어 본다’는 뜻이다. ‘거울을 깬다’는 뜻을 지닌 ‘파경’(破鏡)과 아주 비슷한 말이다.
‘죽고 못 사는’ 사람들이 어쩔 수없이 헤어질 때 한쪽씩 나누어 갖기 위해 거울을 깨트린 다음 이를 나누어 신표로
삼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맞추어 보기 위해, 금생(今生)에 안 되면 후손들에게라도 서로 맞추어 보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모양인데,
그 ‘파경’이 지금은 ‘이혼’의 대명사로 잘못 쓰인다.
‘쉼볼레인’은 그렇게 깨트린 접시나 동전 같은 것을 서로 ‘맞추어 보기’다. 주몽과 유리가 부러진 칼토막 둘을 맞추어
보는 현장에서 우리는 바로 ‘상징’이라는 말의 뿌리를 만난다.
테세우스, 칼과 가죽신을 찾아내다.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와 쌍벽을 이루는 그리스의 영웅이다. 적국의 미궁(迷宮)으로 들어가 반우반인(半牛半人)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죽인 영웅, 들어가면 아무도 살아나올 수 없는 미궁에서 적국 공주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덕분에 살아나온 영웅이다.
그리스인 플루타르코스(영어로는 ‘플루타크‘)가 쓴 ‘영웅 열전’의 ‘테세우스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아테나이 왕 아이게우스는 도시국가 이웃 나라를 방문했지만 술은 마실 수 없었다.
그 까닭은, ‘아테나이로 돌아가기까지는 포도주 부대의 끈을 풀지 말라’는 신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웃 나라의 현명한 왕 피테우스는 아이게우스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는 딸과 동침하게 했다…잠자리를 함께 한
여인이 그 나라 공주라는 것을 아침에야 안 아이게우스는 공주가 아들을 낳을 것임을 예감했다.
아이게우스는 아테나이로 떠나기 직전, 장정 서넛이 들어도 들릴까 말까한 왕궁 객사의 섬돌 한 귀퉁이를 들고 돌
놓였던 자리에다 가죽신 한 켤레와 칼 한 자루를 놓고는 돌을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이트라에게 은밀
하게 당부했다.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제 근본을 궁금해 할 나이가 되거든 아비 찾아 떠나 보내세요.
내가 섬돌 밑에다 신표(token)를 감추어 두었으니, 제 힘으로 섬돌을 들만한 힘이 생기거든 보내세요.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보내세요.’
테세우스는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아들이 자신의 근본을 궁금해 할 나이가 되자) 어머니 아이트라는 섬돌이
있는 곳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서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테세우스는 쉽게 섬돌을 들고는 밑에 숨겨져 있던 칼과 가죽신을 꺼내어… 길을 떠났다….”
유리 신화와 테세우스 신화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소지한 자의 신분을 증명하는 ‘신표’다. 바로 상징이다.
유리가 주몽의 아들임을 상징하는 칼은 정확하게는 칼토막이다.
주몽은 유리가 가져온 칼토막을 자기가 가지고 있던 칼토막과 ‘맞추어 봄’으로써, 유리를 자신의 아들로 승인한다.
말하자면 상징을 실체로 승인하는 것이다.
신화는 상징적이다. 신화는 우리가 떠나면서 숨겨놓고 온, 혹은 우리의 아버지가 숨겨놓고 떠난, 인간의 꿈과
진실이 서려 있는 신표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칼토막, 혹은 칼과 신발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신화를 읽는 일은, 우리가 오래 전에 이국에다 두고 온 아들을 맞는 일이자 아버지가 두고간
신표를 들고가서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다.
상징과 실체를 ‘맞추어 보는’일이다. 그래서 유리 신화와 테세우스 신화가 이렇게 비슷해도, 너무나 많이 놀라웠
으므로. 지금은 별로 놀라지 않는 것이다.
24. 신화 혹은 도돌이표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유서 깊은 도시 서안(西安)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비단길)’를 따라 중국의 끝 우루무치
까지 갔다. 근 열흘 동안 육로로만 물경 4000㎞를 이동하는 대장정이었다.
나는 여행 중에는, 특히 육로 여행 중에는 책을 읽지도 낮잠을 자지도 않는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식생(植生)의 변화에서 나는 눈을 거의 떼지 못하는 것이다.
식생과 문화의 관계 견주기는 전율의 연속이다. 한무제(漢武帝)가 군위(軍威)를 과시하기 위해 세웠다는 감숙성의
무위(武威)를 지나면서부터 내 시선에 붙잡히기 시작하는 식물이 있었다.
올리브였다. 중국인들은 ‘칸란(橄欖)’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감람(橄欖)’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올리브였다.
안내원에게 지명을 물어 보았다. 융창(永昌)을 지나고 있다면서 안내원이 한 설명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영창에는 지금도 20여호에 이르는 고대 로마 군의 자손들이 살고 있다고 해요.
2000여년 전 카이사르의 동방정벌(東邦征伐)을 따라나섰던 로마 군사 일부가 패잔병이 되어 중간에서 길을 잃었나
봐요…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으니까 여기에 눌러 산 것인데 이 지방에 ‘코가 크고 눈이 쑥 들어간(고비심안·高鼻
深眼)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하죠.”
바로 그 융창에서 나는 자생 올리브를 처음 보았다. 올리브는 서양 문화의 한 상징 노릇을 너끈하게 하는 나무다.
그리스의 아테나 여신이 한 도시 백성에게 선물로 내렸다는 나무다.
백성들은 여신의 은혜를 기려 그 도시를 ‘아테나이(아테나 여신의 도시)’라고 부르니, 이 도시가 바로 2004년
올림픽이 열리는 그리스 수도 아테네다.
‘올리브’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 어 ‘엘라이아’는 로마 시대의 라틴 어 ‘올레움’, 현대 이탈리아 어 ‘올리오’를 거쳐,
‘기름’을 뜻하는 영어 단어 ‘오일(oil)’로까지 진화하기에 이른다.
올리브는 히브리 문화와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나무다.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물어온, 홍수의 끝을 상징하는 것도 바로 그 올리브 가지였다.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애끊는 마지막 기도를 올린 곳도 감람산 올리브 밭이었다. 한무제가 서쪽으로 세력 범위(겨드랑이)를 한껏
늘려나가는 것을 과시하면서 세웠다는 도시 장예(張腋), 글자 그대로 ‘한 나라의 늘어난 겨드랑이’에 이르면서 계획
재배한 올리브 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스에서 무수히 본 뽕나무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에는 뽕나무가 지천이다.
수도 아테네의 가로수 중 상당수는 뽕나무다.
유럽 대륙의 끝이자 발칸 반도의 끝인 ‘펠로포네소스’는 어찌 보면 손가락을 늘어뜨린 손 모양 같고 어찌 보면
뽕나무 잎 모양 같다.
‘펠로포네소스’라는 이름은 후대에 지어진 것이고 원래 이름은 ‘무리아(Mouria)’다. ‘뽕나무 잎’이라는 뜻이다.
중국 신화에서 비단을 처음으로 짠 이는 황제(黃帝)의 아내인 유조(女累祖)다.
‘유조가 양잠을 시작하자 백성들도 뒤따라 시작하여 누에는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중국신화전설, 원가 지음,
전인초 김선자 옮김·민음사).
이렇게 만들어진 비단, 혹은 뽕나무 및 양잠 기술이 대량으로 유럽에 건너간 것은 진나라(Chin) 때의 일이다.
중국이 <차이나(China)>라고 불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스 땅에서, 중국 직조(織造)의 여신인 유조의 나무(뽕나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누구인가.
중국 땅에서, 그리스 직조의 여신 아테나의 나무(올리브)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누구인가.
‘일찍이 하늘 신선들을 부려 비단을 짜게 하고 붉은 물감을 들여 관복을 만들어 지아비에게 준(삼국유사)’ 중국
황실의 따님이었다는 사소(娑蘇), 뒷날 신라의 시조 혁거세를 낳았다는 선도 성모(仙桃聖母)의 자손일 가능성이
있는 자다.
중국에서 본 올리브와 그리스에서 본 뽕나무 앞에서 내가 어떻게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주몽의 아들 유리 이야기와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 이야기를 견주면서 문화 교섭이 있었을 법하지 않은 두 나라
영웅의‘아비 찾기’ 신화가 얼마나 서로 비슷할 수 있는지 보여 주고자 했다.
주몽과 유리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만 테세우스 이야기는 유리의 손자 호동 이야기에서 ‘사랑과 배신’의
모티브로 모양을 바꾸면서 놀라울 정도로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테세우스 이야기는 아버지를 찾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강력한 적국 미노스 왕국으로 떠나야 한다.
거기에는 인육을 먹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미궁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미궁으로 들어가 괴물을 죽이고, 죽음의 미로로 짜여진 그 미궁을 무사히 탈출한다.
적국 공주 아리아드네가 괴물 죽이는 법과 미궁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일러줌으로써 조국과 부왕을 배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경우, ‘미궁 탈출’ 모티브는 유리의 손자 호동 이야기에서 ‘자명고 찢기’로 되풀이된다.
고구려의 적국 낙랑에는, 적군이 침범하면 스스로 울리는 북, 즉 자명고(自鳴鼓)가 있다.
낙랑에 자명고가 있는 한 고구려는 결코 낙랑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호동은 낙랑으로 잠입, 오늘날의 조기경보
체제에 해당하는 자명고를 부숨으로써 고구려군에게 승리를 안긴다.
적국 낙랑의 공주가 손수 자명고를 찢음으로써 조국과 아버지 최리를 배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승승장구한다. 아들 히폴뤼토스 또한 승승장구한다. 이들에게 외부의 적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적이 있다. 아버지의 후처 파이드라가 히폴뤼토스를 짝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직한 청년이라 계모의 추파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계모는 여러 차례 매파를 보내어 불륜의 사랑을
하소연하지만 히폴뤼토스의 반응은 완강하다.
파이드라는 히폴뤼토스의 야멸찬 말을 전해 들은 날 밤, 제 잠옷을 갈가리 찢어 알몸을 드러나게 한 뒤 테세우스
앞으로 한장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히폴뤼토스가 선택하는 최후는 비참하다.
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 낙랑을 가무린 호동을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히폴뤼토스가 맞은 것과 같은
운명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 3대 대무신왕’ 편을 읽어 본다.
“…호동은 왕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 손녀의 소생이었다.
호동은 용모가 준수하여 왕이 매우 귀여워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름도 ‘호동(好童)’이라고 했다.
첫째 왕비는 호동이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호동은 나를 무례하게 대하며 간통하려 하였습니다”하고 참소했다.
왕은 “그대는, 호동이 다른 여자의 소생이라 하여 미워하는가”하고 나무랐다.
왕비는 왕이 자기를 믿지 못하는 것을 알고 울면서 “바라건대 대왕께서 가만히 엿보소서, 만약 그런 일이 없으면,
제가 죄를 받겠습니다”하고 호소했다.
왕비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대왕도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죄를 주려 하였다.
누군가가 호동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하고 물었다.
호동은, “스스로 해명한다면 이는 어머니의 죄를 드러내는 동시에 왕께 근심을 더해 드리는 셈인데,
이것을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하고는 칼을 품고 엎드려 자결하였다.”
1. 중국의 극서부인 신강성 우루무치의 올리브 나무에 열린 올리브 열매. ‘기름’을 뜻하는 영어 ‘오일’은 ‘올리브’
에서 유래한다.
2. 라신의 희곡을 기둥줄거리로 하는 영화 ‘페드라’의 한 장면. 의붓어머니 파이드라(페드라) 역을 맡은 멜리나
메르쿠리가 히폴뤼토스 역을 맡은 안소니 퍼킨스에게 사랑을 호소하고 있다.
‘페드라’는 가까이는 히폴뤼토스 신화의 패러디, 멀리는 호동 신화의 패러디이기도 하다.
3. 의붓 어머니 파이드라와의 불륜의 사랑에 연루되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는 ‘히폴뤼토스의 죽음’
(17세기 화가 루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