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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려 놓은 산삼씨를 보러 오늘도 민 진사가 뒷산으로 오르자 누렁이가 꼬리를 흔들며 앞장서고 새끼도 어미를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이 났다. 마을 뒷산이지만 산세가 꽤나 험해 민 진사는 숨이 가쁘고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누렁이 모자는 펄쩍펄쩍 잘도 오른다.
민 진사가 한숨 돌릴 겸 다래나무 넝쿨 앞 바위에 앉아 이마의 땀을 훔치는데, 넝쿨 속에서 뭔가 자꾸 부시럭거려 손에 잡히는 돌을 던졌다. 그러자 콰르르 산돼지 새끼들이 넝쿨 속에서 빠져나오더니 눈을 부릅뜬 어미 돼지가 민 진사에게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민 진사가 나동그라지자 어미 돼지는 다시 돌아서더니 어금니를 세우고 달려든다.
그때 누렁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펄쩍 어미 돼지를 덮쳤다. 한살밖에 안 된 누렁이 새끼도 어미 돼지 뒷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세 짐승이 한데 엉겨 피를 튀기는데, 원체 덩치에서 밀리는 누렁이가 밑에 깔리자 새끼가 뛰어올라 어미 돼지 귀를 물어뜯는다. 정신을 차린 민 진사도 지팡이로 어미 돼지 등을 후려쳤다. 어미 돼지는 새끼들을 따라 달아났다.
피투성이가 된 민 진사는 한참 만에 겨우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피를 씻고 보니 허벅지가 찢어져 의원을 불러 지혈을 하고 인진쑥을 붙이고 광목을 감았다. 온 동네 사람들이 둘러선 가운데 민 진사가 입을 열었다. “여봐라. 내 생명을 살려준 건 누렁이다. 누렁이는 어찌 되었느냐?”
하인들이 쇠죽솥 옆에 쓰러진 누렁이 모자를 보고 와서 고했다. “누렁이는 한쪽 눈알이 빠져 애꾸가 되었고 새끼는 꼬리가 잘려나갔습니다.”
민 진사가 옆에 앉은 의원에게 일렀다. “오 의원, 나는 이만하면 됐으니 누렁이를 좀 봐주시오.”
두어달이 지나자 민 진사는 다리를 절며 바깥출입을 하게 되었고, 애꾸가 된 누렁이와 꼬리가 잘려나간 새끼도 민 진사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민 진사는 누렁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상에 고기가 올라오면 씹는 둥 마는 둥 누렁이에게 뱉어 주고, 겨울이면 추울세라 부엌 아궁이 옆에 집을 지어 주었다.
어느 해 겨울 고뿔을 심하게 앓던 민 진사가 약 한첩 다 먹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했다. 누렁이 모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침이면 민 진사 묘소에 갔다가 저녁에야 돌아왔다. 해가 흘러 누렁이도 늙었다. 만날 부엌 아궁이 옆에 누워 죽치더니 급기야 똥오줌도 못 가려 며느리에게 부지깽이 타작을 맞기 일쑤다.
푹푹 찌는 어느 칠월 칠석. 세벌 논매기를 다 한 머슴들이 조르는 통에 민 진사의 아들 민 서방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누렁이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누렁이 새끼는 말이 새끼지 덩치가 죽은 지 어미보다 컸다. 그런데 이놈이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날 밤 앞산 꼭대기에서 “우~” 하고 잠든 마을을 깨우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은 늑대인가 여우인가 수근거리며 문을 꼭꼭 잠갔지만 그것이 꼬리 없는 누렁이 새끼라는 걸 속으로 알았다. 밤새도록 울부짖는 소리에 누렁이를 삶아 먹은 머슴들과 민 서방은 뒷간에도 못 나갔다.
밤에는 꼼짝도 못하던 동네 남정네들이 날이 밝자 꼬리 없는 누렁이 새끼를 잡겠다고 죽창이며 쇠스랑을 들고 무리 지어 앞산 뒷산을 뒤졌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동네로 들어서는데 민 서방 집안이 떠들썩하다. 삼대독자 민 서방의 다섯살 난 외아들이 동네 친구들과 개울에서 멱을 감는데 어디선가 달려나온 누렁이 새끼가 불알을 물어뜯어버린 것이다.
이듬해 봄 고자가 된 민 서방 아들이 내시의 양자가 되어 한양으로 떠날 때 온 동네는 눈물바다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