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묵상: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장은 11장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언급한 수많은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 한 가지는
신앙 생활을 "경주"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열린 체육대회에서는
장거리 달리기가 주요 종목 중 하나였기 때문에 여기서 예로 언급했을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 선수들이 경기에서 뛰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어떻게 경기를 하는가?
크게 세 가지가 있을 것이다.
1) 달리기에 방해되는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벗어버리고 달릴 것이다.
2) 중간중간에 힘들어도 승리를 위해 인내하며 달릴 것이다.
3) 가장 중요한 것, 결승선을 향하여 달릴 것이다.
이 세 가지 내용이 그 다음 부분에 그대로 나오는 것이다.
1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벗어 버리고)
1절,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인내로서 경주하며)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1장에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나왔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달려야 할 결승선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보고 달려야 할 결승선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따라야 할 모델이시기도 하신다.
예수님께서도
인류 구원이라는 결승점을 향해 달리면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 버리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인내하시면서 경기를 완주하셨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 묘사가 나온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
이 부분을 ESV 영어 성경으로 읽으면 흥미롭다.
ESV 영어 성경에서는
믿음의 주에서 "주"를 Founder(창시자)로 번역했고,
온전하게 하시는 이에서 "온전하게 하시는 이"는 Perfecter(완성자)로 번역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믿음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하면,
가운데가 비어있다는 느낌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모델이 되셔서
그 가운데 부분을 채워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아 살도록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 부분을 2절 후반부에서 보충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다.
2절,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은 허상이 아니라 실상이요,
믿음은 꿈에서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의 말을 빌린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약 2:17)
믿음에는 소망이 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믿음에는 인내가 있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믿음에는 상급이 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셨느니라)
혹시 우리 중에 믿음이 약해지거나 사라진 것 같은 분이 있는가?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소망이 없게 된다.
믿음의 Founder(창시자)는 예수님이시다.
믿음의 Perfecter(완성자)도 예수님이시다.
믿음의 Role Model(모델)도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소망,
예수님께서 견디신 인내,
예수님께서 받으신 상급.
이것들을 바라보고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본문에 나오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
즉, 창시자와 완성자가 다같이 나오는 구절이 히브리서에 하나 더 있다.
이 두 부분의 공통점을 비교해 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히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 똑같은 헬라어가 사용되었다.
"주"와 "창시자"에 똑같은 헬라어가 사용되었고,
"온전하게 하시는"과 "온전하게 하심"에 똑같은 헬라어 어근이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고,
예수님은 구원의 창시자요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신 분이시다.
똑같은 패턴이요 똑같은 헬라어 원어가 사용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구원의 시작이고 마침이시라는 것이고,
믿음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예수님을 통하여 마치게 된다는 것이다.
2) 구원과 믿음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에게 적용된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후,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믿음도 예수님께서 창시하시고 믿음으로 사신 후,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권면하시며 성령을 통해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그러니까,
구원이나 믿음이나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3) 구원과 믿음 모두, 고난과 연관이 있다.
히 2:10,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히브리서 2장의 "고난"은
히브리서 12장의 "십자가"와 "부끄러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고난을 겪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면 관계상,
처음과 마지막 부분만 인용해 보자.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가 가인에게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살다가 고난을 당했던 것이다.
히 11:36~37, 39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구약시대 무명의 믿음의 선조들이다.
그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고난을 받았던 것이다.
이제 누구 차례일까?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차례이다.
초대교회의 신앙의 선배들도 믿음으로 살다가 수많은 고난을 겼었다.
그 다음은 누구일까?
바로 우리이다.
예수님도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으셨고,
구약시대의 선조들도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었고,
신약시대의 선조들도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혹시 우리는 예외라고 생각하는가?
그럴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사도 바울이 말년에 한 말이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경건하게 믿음으로 사는데 박해가(고난이) 없는가?
성경의 말씀이 틀렸든지 아니면 우리의 생활이 틀린 것이다.
우리는 박해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박해를 일부러 받으려고 애쓰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경건하게 믿음으로 살면
박해와 고난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2024년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왜 박해와 고난을 겪으셨을까?
본인의 죄 때문에?
본인이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아니다. 경건하게 믿음으로 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시간 지구상 곳곳에 경건하게 믿음으로 사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다함께 기도하면 좋겠다.
주님,
구원에는 고난이 필요했습니다.
믿음 생활에도 고난이 필요합니다.
주님,
주님 때문에 믿음 때문에 받는 고난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저희 모두에게 구원의 확신 믿음의 확신을 더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을 따르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이 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과 박해를 당하는 형제 자매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을 기억해 주옵시고
그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은사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들에게 참 소망을 주옵시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용기를 더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