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오늘날의 족보는 옛날 족보와는 어떻게 다를까? 왕건은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승리하고 고려를 개창한 후 지역별로 할거하는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혼인을 맺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성씨를 하사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본관들의 상당수는 고려시대의 지명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부터 성씨와 본관 의식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족보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때문에 오늘날의 족보를 보면 가계가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지기 시작하는 시기는 고려중기 이후이고 그 이전은 계통이 불확실하게 그려지며, 때로는 황당한 것처럼 보이거나 전설과도 같은 내용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족보 실물은 전해지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족보는 조선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족보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세대와 가족을 기록할 때 남녀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로 기록한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족보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는 「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나 「문화유씨 가정보(嘉靖譜)」 등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 자료들은 유교가 국가 통치이념으로 정착되기 시작 한 조선 초기와 완전히 정착된 중기에 간행된 것들이다.
이 외에도 17시기에 조종운(趙從耘, 1607~1683)이 편찬한 [씨족원류(氏族源流)]를 보아도 태어난 순서대로 가족이 기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씨족원류]는 당대에 조선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성씨의 가계도를 정리한 당시로서는 가장 방대한 통합 족보이다.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박사 같은 외국 학자들도 삼국 시대, 고려 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 300년까지는 상속을 남녀에게 균등하게 했고, 남아선호 사상도 없었으며, 족보도 태어난 자식 순서대로 기록했다고 하며 이는 한국적 평등문화의 소산이라고 한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로 오면서 아들을 먼저 기록하는 불평등한 형태로 변모한다. 병자호란의 고통을 겪은 이후 새로운 중원의 패자로 등장한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동시에 사라져 버린 명나라에 대한 의리 의식이 강화되면서 유교적 사회 운영 원리도 [주례(周禮)]에 따른 장자상속 방식으로 변모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유교적 국제 질서에 따라 사대(事大)하던 명나라가 사라지면서, 이제는 조선이야말로 유일한 문명국가라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팽배해졌는데 여성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소위 말하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은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도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후기에 지나치게 교조적으로 강화된 유교적 폐단의 일부이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향상된 세태를 반영하여 오늘날 족보는 다시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과거에는 없었던 여성의 ‘이름’도 같이 기록하여 남녀가 평등한 시대를 살고 있음을 몸소 느끼게 한다.
모두가 과거의 것이라고 치부해서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는 유물을 눈치 빠른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현실을 보면서, 족보에 한해서만큼은 3백여 년의 시공을 돌아 다시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