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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아프리카 여행에서 '아프리카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안내를 해주실 강창선 선생님께서
두번째 과제물을 보내오셨습니다.... 참가자들은 아래의 글을 꼭 필독해 주시고,
아프리카 영화 과제 등이 있으니, 꼭 챙겨보시고 인천공항에서 만납시다.
실천문학사 대표자들과 김해자 시인께서 기획회의를 잘 마쳤다고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시와 글, 사진과 그림 등이 잘 나올 수 있도록
각 가정에서는 학부모님들의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인솔책임자 당당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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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아프리카 사랑하기(2)
-아프리카의 역사-
정 리 : 강 창 선
이제 본격적인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 첫 번째는 아프리카의 역사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그 과거를 모르고는 현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죠? 나아가 바람직한 미래도 설계할 수 없을 거구요.
우리가 여행에서 마주하게 될 아프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마도 대한민국의 오늘의 기준에서 보면 정말 후진적이고 가난과 질병에 찌든 불행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유니세프나 월드비전 등 구호단체들의 후원 광고 본 적 있죠? 어떤 느낌과 생각이 들었나요?
주변에서 접하게 되는 아프리카 여행기나 여행담을 보면, 아프리카의 자연을 찬양하거나 아니면 아프리카 사람들의 불쌍한 모습에 연민을 느꼈다고 하는(그 이면에는 자부심 나아가 자만심이 깔려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사랑과 앎의 관점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무엇보다도 그들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보는 자세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럴 때 연민의 감정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출발이 되지 않을까요? 한 걸음 나아가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왜 현재 아프리카 사람들이 그토록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만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죠. 아프리카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수많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아프리카는 뛰어난 관광자원과 엄청난 지하자원이 있는데 왜 그토록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을까? 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자기들끼리 그토록 잦은 전쟁을 할까? 왜 민주주의가 꽃 피우지 못할까? 등등. 이번 자료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실마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륙인만큼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선사시대와 고대, 중세의 역사는 간략하게 요약하고, 약 1500년부터 1945년 무렵까지의 유럽 식민지 시대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아프리카의 빈곤과 내전, 독재의 악순환이 노예무역과 유럽의 제국주의(식민지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1) 선사 시대
◎ 기원 전 약 5억 5000만 년 전
아프리카 대륙이 모든 대륙 중 첫 번째로 태어나다.
◎ 기원 전 약 300만-500만 년 전
동아프리카 초원에서 최초의 원시인이 몸을 일으켜 두 발로 걷기 시작하다.
즉, 유인원이 원시 인류로 진화를 시작하다.
◎ 기원 전 약 20만 년 전
다양한 원시 인류, 호모 하빌리스(도구를 쓰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반듯하게 걷는 인간)가 진화의 단계를 거쳐,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이성이 있는 인간)가 생 겨나다.
◎ 기원 전 약 10만 년 전
작은 호모 사피엔스 그룹이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아시아 방향으로 향하다.
◎ 기원 전 1만 5000년 전
당시 육로로 연결되어 있던 베링을 통해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 도착하다.
◎ 기원 전 1만 년 전
아프리카를 비롯해 지구의 대부분 지역에서 농경과 정착생활이 시작되다.
2) 고대와 중세 시대
◎ 기원 전 146년
로마인들이 항구 도시 카르타고를 점령한 다음 북부 아프리카의 넓은 지역을 점령 하고, 이 지역을 ‘총독 통치 지역 아프리카’로 부르다.
◎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이후 북부 아프리카에 기독 교도가 점차 늘어나다.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는 주로 전통적인 아프리카 종교 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 622-800년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이 북부와 북동부 아프리카의 광대 한 지역을 점령하다.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북부 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라는 지역 구분 이 여기서 생겨났다. 북부 아프리카는 이슬람교와 아랍의 색채가 강한 반면, 사 하라 이남 아프리카(‘검은 아프리카’)는 기독교와 아프리카 전통 종교가 뒤섞인 모 습을 보인다.
◎ 약 600- 약 1500년
이 시기의 아프리카는 무역과 무역 길의 통제를 통해 부를 증대시켰고, 문화와 학 문의 전성기를 누렸다. (서아프리카의 말리의 경우, 팀북투라는 곳에 아프리카 최 초의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 1415-1417년
유럽 사람들에 앞서 중국 상선이 동부 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하다. 중국 함대는 평 화로운 방식으로 물물교환을 한 후 되돌아갔다.
3) 유럽 식민지 시대(약 1500년-1945년 경)
(1) 노예무역
“우리는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자유롭게 태어났다. 우리는 태어난 이후로 자유로웠고 또한 자유로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게 남아야 하고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영화 「아미스타드」의 주인공 셍베 피(Sengbe Pieh)가 당시 미국 법정에서 한 진술의 일부입니다. 이 영화는 셍베 피 일행이 1839년 서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노예 무역상들에게 붙잡혀 팔려가다가 선상 반란을 일으켜 자유를 찾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랍니다.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는 노예들의 반란이 성공한 유일한 경우라고 하구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지식을 통해 보더라도 노예제도는 인간의 역사에서 어디에서나 있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과정이 너무 비인간적이고, 그 규모와 그것이 한 대륙에 미친 영향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은 전쟁포로도 아니었고 또 인근 지역으로 끌려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노예 사냥꾼들에게 납치되어 가족과 생이별하여,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끌려가 평생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 없이 강제 노역과 멸시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겁니다. 그 규모를 보면, 7세기 이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간 사람의 수는 3,0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5,000만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5,000만? 현재 우리나라 인구? 상상이 되나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처음 아프리카에서 노예 거래를 시작한 것은 아랍인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노예거래는 유럽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14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유럽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간 아프리카인들의 숫자가 약 1,5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유럽 국가들 중 처음으로 아프리카인들을 노예화하기 시작한 나라는 포르투갈(1441년)이었습니다. 이후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독일 등이 가세하면서 노예무역을 둘러싼 유럽인들끼리의 경쟁과 다툼이 갈수록 치열해지게 됩니다. 본격적인 노예무역은 14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에 이루어집니다. 역사책에서 대단한 업적처럼 서술되고 있는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인들에게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정반대로 비극과 재앙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유럽인들은 남북 아메리카의 거대한 농장에서 목화와 담배,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면서 막대한 이윤을 얻게 되었고, 그 이윤을 더욱 증대시키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노예가 필요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했습니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의 자료에 의하면, 노예를 거래할 때 개인으로 기록하지 않고 톤 단위로 계산을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노예무역 회사인 ‘기니 회사’에 연간 ‘검둥이 1만 톤’의 반입을 허가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물건’ 취급을 한 거죠.
그런데 노예무역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노예 매매는 유럽인들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즉 공모자가 필요했다는 거죠.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아프리카의 내륙에 들어가는 것을 굉장히 꺼렸다고 합니다. 말라리아나 황열병 같은 열대병과 맹수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죠. 그래서 당시 유럽인들은 노예를 누군가로부터 사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경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노예를 사려면 누군가 노예를 파는 사람이 있었겠죠? 누구였을까요? 그것은 아랍과 아프리카의 상인들 그리고 아프리카 현지의 왕 또는 부족장들이었습니다. 어이없게도 동족이 동족을 노예로 팔아먹은 거죠.
아프리카의 권력자들은 처음에는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신기한 물건들과 자신들의 노예를 맞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점차 유럽제 물건에 중독되었고, 나중에는 노예를 공급하기 위해 다른 부족을 침략해 전쟁 포로를 만들어 노예로 팔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때 유럽 국가들은 신무기를 공급해 한 편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돕고, 그 대가로 전쟁 포로를 노예를 받아 갔구요. 한 마디로 유럽인들의 이익을 위해 ‘아프리카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잡아먹는’ 시대가 되어버린 거죠. 더욱 아픈 사실은 유럽 식민지에서 독립한 오늘날에도 과거의 노예무역 과정에서 생겨난 증오와 불신, 폭력이 아프리카 사람들의 단합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생각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싶죠? 그러나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잖아요?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암살」이라는 영화를 보아도 그렇구요.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과 자기 가문만의 부와 권력을 위해 일본에 협력하고 동족을 못살게 구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더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는 친일파가 처벌되지만 실제로는 친일했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도 버젓이 사회의 지도층으로, 부자로 잘 살고 있다는 거구요. 아프리카의 역사도 우리와 똑 같았다고 보면 됩니다.
노예무역과 관련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역할입니다.
“백인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성서』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땅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성서』를 갖고 그들이 땅을 가졌다.”
이는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당시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 속담처럼 널리 퍼져 있었던 말이랍니다.
아프리카에 처음 발을 디딘 유럽인은 상인과 탐험가들이었습니다. 이어서 기독교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문제는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의 훌륭한 협동 작업(?)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프리카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가고 나라를 빼앗기고 가난해지고 권리를 잃어버리면, 선교사가 와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신앙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종교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거죠. 이는 한편으로 유럽인 자신들의 양심의 가책을 달래주는 일이기도 했고요. “병 주고, 약 준다.”는 우리 속담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거죠.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이 보인 잘못된 태도는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 전통 종교에 대한 무지와 무시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아프리카의 전통 종교를 ‘우상숭배’나 ‘유치한 신앙’으로 보았습니다. 종교차별적인 기독교 우월주의, 인종차별적인 유럽인 우월주의죠. 나이지리아의 한 작가가 쓴 소설에 나오는 최초의 백인 선교사 브라운 신부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브라운 신부는 기독교 전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학교와 작은 병원을 세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하인이나 게으른 아이만을 학교에 보냈답니다. 그러자 신부는 읽고 쓰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미래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낯선 사람들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또 우리가 위인전 등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의사 알베르트 슈바이처조차도 기독교 우월주의와 유럽 우월주의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슈바이처의 자서전을 보면, 그는 유럽인과 아프리카 사람들을 형과 동생의 관계로 표현합니다. 또 어떤 대목에서는 ‘원시인’이나 ‘검둥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구요. 이처럼 유럽인들은 “우리가 너희들보다 더 가치 있고 더 배웠고 영리하고 문명화되었다.”는 태도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대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런 오만한 태도에 대한 저항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선교사를 통한 기독교 전파와 봉사, 다양한 원조였던 셈입니다.
(2) 제국주의
노예 제도는 영국에서는 1833년에, 미국에서는 1863년에 각각 폐지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됩니다. 어떻게, 왜 노예 제도가 폐지된 걸까요? 아프리카인들의 저항에 의해서? 아니면 유럽인들의 반성에 의해서? 이들은 부분적인 이유는 될 수 있지만 정확한 답은 아닙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된 진짜 이유는 산업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등장 때문입니다.
잘 알고 있듯이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노동력의 많은 부분을 기계가 대신합니다. 중요한 것은 값싼 원료의 공급과 상품 판매 시장의 확대죠.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예무역은 더 이상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매력적인 사업이 아니게 된 거죠. 즉 노예를 감시하고 저항을 누르고 폭력으로 노예를 사냥해 수입하는 데 드는 비용에 비해 얻는 이익이 그리 크지 않은 비효율적인 사업이라고 여기게 된 겁니다. 이런 배경에서 유럽인들은 노예 제도 대신 1880년대부터는 아예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드는 방향으로 돌아 서게 된 겁니다.
‘제국주의’나 ‘식민지’라는 말은 별도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생생한 경험이 있으니까요.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6년 간 식민 지배를 받았었죠?
그런데 아프리카의 식민지 역사는 우리의 경우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식민지의 고통을 겪었다는 점입니다. 1884년 베를린의 ‘콩고 회의’로부터 1990년 나미비아의 독립까지 따지면 무려 100년 만에 유럽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셈입니다. 1960년대에 독립한 31개 국가들의 경우도 60년 이상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거죠. 둘째로는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약 500여 년 간의 노예무역을 비롯한 착취와 고통의 연장선상에서 식민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착취 500년, 식민통치 100년’이라고 부른답니다.
아프리카 식민 지배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식민 지배) 경쟁의 출발은 영국과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가 1881년 튀니지를 점령하자, 영국은 1882년에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듭니다. 영국이 남부 아프리카를 공격하는 사이, 프랑스는 세네갈과 서부 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합니다. 또한 제국주의 경쟁에 뒤늦게 뛰어든 독일은 ‘독일령 서아프리카’(오늘날 나미비아),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 탄자니아)와 서부 아프리카의 토고와 카메룬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벨기에는 중부의 콩고에 들어가 벨기에령 ‘콩고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특히 벨기에의 콩고 지배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구요. 이탈리아는 지난 번 자료에서 언급한 대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가 패배합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의 변방인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일부만을 식민지로 만들게 됩니다.(리비아는 이미 이탈리아의 식민지였구요.) 아프리카에 가장 먼저 온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어땠을까요? 이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자리 잡았던 해안 지대의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듭니다. 그야말로 ‘땅따먹기’식 침략이 자행된 거죠.
이러한 유럽 국가들의 과열된 식민지 쟁탈전(특히 콩고를 둘러 싼 벨기에와 포르투갈의 분쟁)은 유럽 국가들 사이의 분쟁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를 중재하고 조정하기 위해 열린 회의가 바로 1884년 베를린의 ‘콩고 회의’라는 겁니다. 이 회의에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미국과 오스만 제국의 대표들도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프리카 국가의 대표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 회의의 결과, 아프리카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대륙의 전 국가가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후 1차 세계 대전은 아프리카의 지도를 다시 바꾸어 놓게 됩니다. 1차 대전의 패전국이 된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잃게 됩니다.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에 나누어 주게 된 거죠. 이 전쟁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약 2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유럽 사람들의 전쟁에 끌려갔고, 이 중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1939년부터 시작된 2차 세계 대전 또한 아프리카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됩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아프리카는 몸살을 앓게 됩니다.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 경제 대공황 알죠? 이 때 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농업을 대거 약탈하게 됩니다. 결국 수백만의 사람들이 아프리카 역사상 처음으로 농업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 도시 근처에 거대한 빈민지구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탈리아는 전쟁이 일어나기 3년 전에 다시금 에티오피아를 공격하여 마침내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참 끈질기고 집요하죠? 아프리카에서의 2차 세계 대전은 주로 북부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게 되는 데, 영국, 프랑스, 미국의 연합군이 독일과 이탈리아를 상대로 전개됩니다. 이 전쟁에서도 수십만의 아프리카 사람들은 식민지 본국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전쟁터로 끌려 나가 희생당하게 됩니다.
2차 세계 대전이 가져온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미국이 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1941년, 위기에 처한 영국 수상 처칠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양국은 이른바 ‘대서양 협정’이라는 것을 체결하게 되는 데, 거기에는 아프리카에 관한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민족의 자기 결정권을 보장한다는 것(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에 관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도 세계에서 ‘원료의 원천’에 동일하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입니다.(여기서 원료의 원천이란 아프리카를 말하는 거죠) 두 번째 내용의 핵심은 결국 영국이 아프리카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양보하면 미국은 기꺼이 전쟁에 참가해 영국을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마침내 아프리카에서의 유럽 제국주의는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한참 시간이 흐른 1960년대에 가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살펴 본대로 ‘착취 500년, 식민통치 100년’의 역사는 오늘날 아프리카 사람들의 가난과 전쟁이라는 고통의 근본적 원인이 되었던 겁니다.
좀 감이 잡히나요?
♥ 과제3 ♥
아프리카 관련 영화 보기!
이 번 과제는 아프리카와 관련된 영화를 찾아서 최소 두 편은 보는 겁니다.
몇 편의 영화를 소개해 볼게요.
◎「아미스타드」(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1997년 작, 15세 관람가)
: 1839년 미국으로 끌려가던 흑인 노예들의 봉기와 그에 따른 법정 투쟁 등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드워드 즈윅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2006년 작, 청소년 관람불가)
◎「로드 오브 워(Lord of War)」(앤드류 니콜 감독,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 2005년 작, 15세 관람가)
: 위의 두 편의 영화는 모두 1990년대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의 실제 내전 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불법 무기 밀거래의 실상을 다룬 영화로 오늘날의 아 프리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부모님의 지도하에 관람하시길!!!
◎「미션」(롤랑 조페 감독, 로버트 드니로 주연, 2008년 개봉, 15세 관람가)
: 이 영화는 남미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종 교 갈등과 노예 거래, 원주민들의 저항을 다루고 있어 아프리카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춤꾼입니다. 여행일정에보니 카렌박물관도 가네요. 시간내서 '아웃오브아프리카'란 영화를 보고 오면 카렌박물관이 더 잘 보일 거예요. 영화는 사랑에 포커스를 맞췄는데 그래도 보고 오면 박물관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 싶네요.
오, 좋은 제안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