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
이야기의 머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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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남민전 동지 고 김병권 선생 영결식에서 안재구 선생이 남민전 '동지들'을 대표해 조사를 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
지금 내 나이 8순이 맥이 찼습니다.
지금 우리 학생들이 ‘대학 등록금’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교육을 맡아 한다는 사람들이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자본의 잣대로 해서 이윤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엄청나게 올라버린 등록금으로 하여금 공부는 뒷전으로 되고 이른바 ‘알바꾼’으로 되어 강의실에조차 갈 수 없는 처지에 몰리고, 빚을 져서 대학을 졸업해도 그 빚이 등짝에 매어져 숨도 못 쉴 지경으로 되어서 청춘의 기쁨은 고사하고 목숨마저 끊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럴진대 내가 어찌 팔순을 살았다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자라나는 후대를 대하기가 부끄러워 죽겠습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커다란 바위처럼 억눌린 일제 식민지 억압의 굴레가 풀리고 누구나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평등한 새나라가 건설되리라고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나랏일에 참여하고, 누구나 식・의・주의 걱정이 없고,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고, 누구나 질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리라고 바랬는데, 오늘날의 세상으로까지 되고 보니 우리들은 모두 다 헛살았다고만 생각되어, 차마 후대들에게 머리조차 들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왜 이 모양으로 되고 말았는가. 그 대답은 어찌 한마디로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말로 설명하려 해도 모두가 하도 많이 한 이야기라서 또 그 말인가 하고, 들을 양이나 하겠습니까.
그래서 후대를 위하여 내가 살아온 이야기, 그렇게 훌륭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마침 내가 태어난 시대가 일제 식민지의 전성기였고, 자라는 시대가 일제 식민지를 대신해서 미제의 새로운 형식의 식민지 시대였으며, 그 시대에서 이승만의 독재정치, 박정희의 살인정치, 전두환의 광포정치를 맞바로 당하면서 우리시대의 현대사를 붙안고 살아왔기에 이 이야기 속에서 혹연 그 대답이 있을까 해서 나라는 한 사람의 ‘어떤 현대사’를 펼치려고 합니다.
우리의 현대사는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어떤 학자는 시대에 영합해서 그 시대의 힘에 거스르지 않게 이야기 했고, 어떤 학자는 실증적으로 이야기한다면서 힘 가진 자가 만들어놓거나 써놓은 것을 연구소가 모아 그것을 자료로 해서 이야기했고, 어떤 학자는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스스로를 묶어놓고 이데올로기의 색안경으로 보고 이야기를 했으며, 어떤 학자는 책상물림으로 현실세계와는 동떨어져 상아탑 속에 스스로 갇혀 머릿속에서 만들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에서 벗어나 내가 우리 시대를 살면서 그 속에서 언제나 따라다니는 공포와 가난 속에서 빼앗긴 해방을 다시 찾으려 발버둥을 쳤고, 더구나 갈라지기까지 한 조국을 아우르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과 혈육마저 담보하며 살아온 나의 역사, 우리가족의 역사를, 현대사 속에서 아무나 가지는 역사가 아닌 어떤 한 사람의 역사를 「어떤 현대사」라는 이름으로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팔순이 다 되도록 살면서 헛살았다고까지 생각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말의 대답을 그 실마리라도 얻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 내가 살아온 어린 시절, 고향인 밀양의 밀양 산천의 이야기는 1996년에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이란 제목으로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판된 적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그 다음 편에 해당합니다. 우선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시기까지 내가 겪었던 현대사를 원고지 2000여 매의 분량으로 통일뉴스에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재를 위한 귀한 공간을 마련해 주신 이계환 대표를 비롯한 통일뉴스 일꾼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안재구 | |
친일파는 다시 돌아오고……
“야! 안병희, 나를 한번 봐라. 남들은 나를 ‘도라 겐지(호랑이 검사)’라고 한다. 내 상도 그렇지만 내가 징역을 무섭게 때리기 때문에 그런 거란 말이다. 내가 너를 눈 한번 까딱 안하고 잡을 테다.” “오냐 이놈아. 네가 정녕 호랑이라면 총밖에 더 맞겠느냐!” 방청석에서는 웅성거리다가 이윽고 박수소리로 되어 터져 나왔다. “조용히 하라. 소란을 피우면 재판을 휴정하겠다.” 방청석에서는 소란이 더욱 심해졌다. “이따위 재판은 걷어치우라!” “안병희 선생을 당장 석방하라!” 재판장이 뚜드리는 나무 마치 소리가 한참 나고 난 다음 겨우 소란이 진정되었다. “변호인을 변론하시오.” 변호사가 천천히 서류를 들고 일어섰다. “본건 기소 사실을 보니 이것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사건입니다.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조선이 해방되자 일제의 주구로 활동했던 자들이 쥐구멍을 찾아 숨어 지내다가 미군이 들어와 일제 관리를 다시 불러들이자 뻔뻔하게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여 또다시 애국자들을 이처럼 탄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당치도 않는 모략으로 일제 때 들씌웠던 사슬로 해방된 이 땅에서 또다시 이처럼 묶어 놓고 있습니다. ……”
나의 할아버지는 조국이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이 되자 새 나라를 세울 준비를 호소하는 여운형 선생의 뜻을 따라 밀양의 애국자들을 모아 밀양군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셨다. 할아버지는 모진 옥고로 병환 중이신 김병환(金鉼煥)(주1) 선생을 위원장으로 모시고 부위원장을 맡아 해방 직후 우리 고향 밀양군의 치안과 행정을 맡았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전쟁터로 탄광으로 징용되어 끌려갔던 동포들과, 일제의 수탈로 농토를 잃고 살길이 없어 멀리 만주로 왜놈 땅으로 종살이로 갔던 동포들이 수없이 모여들자 이들의 후생을 위하여 일하셨다. 발악적인 일제 말기의 고된 삶에서 병든 몸을 가지고 그 고단하심을 기쁨으로 알고 불철주야 일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의 기쁨도 해방된 그해의 연말이 가까워오자 조선의 남반부에 진주한 미군이 군정청을 설치하여 점령군으로 행세하고, 일제 통치의 주구들을 다시 불러 군정 통치의 하수인으로 고용했다. 일제 때 하부 관공서의 관리쯤 했던 자들은 면장도 되고 군수도 되었고, 경찰서의 순사하던 자들은 간부로 올랐으며 부장쯤 했던 자들은 서장이나 도 경찰부의 높은 자리에 올라 다시 해방된 조선 사람을 일제의 대신 미제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일제 때 검찰청의 서기들은 거의가 다 검사로 올랐다. 앞서 말한 할아버지에게 극악하게 군 전 아무개 검사는 일제 때 검찰청 서기 노릇을 하며 민중에게 모질게 하다가 해방 때 맞아죽을까 봐 한때 도망쳤으나, 미군이 들어와 군정을 펴고 일제 관리를 다시 부르자 다시 나타나 검사로 승진한 놈이다. 그는 군정청에서 정식으로 검사자리를 얻게 되자 일제 때 배워두었던 왜놈 검사들이 식민지 백성들에게 하던 행패를 해방된 동포들과 애국자들에게 그처럼 뻔뻔하게 대했던 것이다. 그가 할아버지에게 그처럼 위세 당당하게 굴었지만, 희한하게도 그 재판이 있고 사흘 만에 할아버지가 말씀한 대로 어떤 애국청년에게 총 맞고 죽었다. 할아버지를 잡아간 밀양 경찰서의 서장은 박찬현(朴瓚鉉)(주2)이라는 자인데, 이자는 일제 때 친일 지주의 아들로 대학을 다니다가 조선 청년 학생을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갈 때 스스로 일장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용감하게 자원해 나갔다. 해방이 되자 미국 군정청으로부터 밀양경찰서 서장자리를 얻어왔다. 그리고는 일제 통치를 반대하며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했던 애국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박 아무개는 나중에 유신정권 때 유정회 국회의원도 했고 박정희 유신독재 때 문교부 장관도 했다. 나의 고향 밀양에는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던 애국자ㆍ혁명가도 많았지만 친일파도 극성이었다. 일제가 망할 무렵 대의단(大義黨)이라는 폭력정당을 만들어 친일반역을 하다가 조선 청년들이 던진 폭탄으로 혼뜨검이 난 박춘금이란 자도 있다. 이 자는 자기 집안의 큰집 소를 훔쳐 팔아 그 돈으로 일본으로 도망가서 고물상을 해서 야쿠자와 결탁하여 수만금을 번 다음 일본 정계에 들어가 일본제국의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또 신현대라는 자는 일찍이 일본에 들어가서 자그마한 철공소를 차려 나사를 만들어 팔았는데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엄청나게 늘어난 수요를 맞아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사업을 크게 벌려 군수공장으로 지정받아 나사를 납품하여 엄청난 부를 챙겼다. 이렇게 번 돈으로 일본 군대에 제 창씨한 일본 성을 따서 ‘히라야마 고(平山號)’라는 비행기를 몇 대나 헌납하여 왜놈에게 더욱 잘 보여 돈을 더욱더 많이 번 자이다. 그 비행기는 남천강 상공에 띄워 그의 기세를 한껏 누리고 밀양의 하늘을 더럽혔다. 이 신현대는 풍광이 수려한 영남루 아래(전 밀양 문화원 자리) 일본식 집을 지어 당시 밀양에 있던 왜놈 검사가 살게 했고 고향에 올 때는 그 집에서 왜놈 옷을 입고 왜놈 행세를 하며 숙식했다. 8.15 해방을 맞자 수많은 친일 주구들이 그들이 겨레를 반역한 죄로 맞아죽을까 겁이 나서 도망을 쳐서 쥐구멍에 숨듯 했는데, 신현대는 자기 죄를 면해 보려고 당시 건국준비위원회에 제 발로 찾아와서는 “제가 친일을 해서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 죗값을 조금이라도 갚고자 마침 밀양의 애국 혁명가이신 약산 김원봉 장군이 귀향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장군님의 댁이 너무나 초라해서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헌납하고자 합니다.” 라고 했다. 마침 약산 장군이 귀향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이 거쳐하실 곳을 물색하던 중이라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의 약칭)에서 회의를 열어 의논을 했는데 우선 그의 집을 정하기로 하고 신현대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아직 나라의 정부가 서기 전이라 정식으로 헌납을 받을 수는 없고, 둘째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벌하는 것은 나라의 법을 정하고 난 다음에 할 일이므로 그에게 그것으로 죗값을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조건을 달기로 했다. 신현대는 이러한 조건을 쾌히 수락하고 집을 내어주어 약산 장군을 그곳에 모시게 되었다. 약산 장군이 귀환하시자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그 집에서 약산 할아버지께 절을 하고 인사를 드렸다. 나는 장군이라 해서 몸도 장대하고 위엄이 넘칠 것 같았는데 키도 자그만 하시고 말씀 소리도 조용하셔서 고향 마을에 계신 여니 할아버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신현대는 일제 통치기관이 다시 미 군정청으로 이름이 바뀌어져 나타나자, 그 집을 할아버지가 협박을 해서 빼앗았다고 고소를 한 것이다. 물론 애국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구실을 찾고 있던 경찰서장이 신현대를 꼬드겼을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잡혀갔고 앞에 말한 재판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곳곳에서 이러한 재판이 일어났고 애국자들은 또다시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러한 사건에서 가장 큰 것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한 모략인 이른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다. ------------------- (주)
1) 독립운동가. 경남 밀양(密陽) 출생. 1919년 3월 밀양에서 3.1시위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6개월 간 복역하였으며, 1920년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에 관련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 박찬현(朴瓚鉉):1917년∼1991년. 경남 청도 출생 1941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 1955년 미국 미주리주립대학 대학원 정치학과를 수료. 1982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1947년 밀양경찰서 서장, 32세에 제헌국회의원, 1951년 동아대학 교수. 1958년 부산진 을구에서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 장면(張勉) 정부의 보건사회부 정무차관, 이듬해 교통부장관, 1963년 ‘국민의 당’ 간사장을 역임. 1976년 유정회(維政會) 소속 제9대 국회의원, 이듬해 문교부장관. 일찍이, 1951년 부산일보사 사장, 1966년 경향신문사 사장. 5년간 외교관으로도 재임, 1971년부터 터키대사 겸 사우디아라비아대사, 요르단대사를 거쳐, 1974년 인도대사, 아프가니스탄대사 겸 방글라데시대사. 198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교수, 1990년 세종대학교 재단이사장으로 만년을 보냈다.
안재구 선생 약력
아버지 안의환(安義煥), 어머니 김태숙(金兌淑) 두 분의 장남으로 1933년 10월 24일 달성군 구지면 외갓집에서 출생 고향 밀양에서 항일혁명가이신 할아버지 우정(于正) 안병희(安秉禧) 선생 슬하에서 성장
약력
1940년 4월 - 밀양제이심상소학교에 입학, 1941년 1월 - 아버지를 따라 경주 계림심상소학교로 전학했다가 1943년 9월 - 밀양제이국민학교로 되돌아왔음 1945년 8월 15일 - 고향 밀양시 초동면 성만리 선산 마을에서 일제 식민지 해방을 맞이함 1946년 8월 - 밀양제이국민학교가 밀성국민학교로 개명되었고 이 학교를 졸업 1946년 9월 - 밀양중학교 입학 1947년 5월 - 밀양중학교 1학년 때 노동절집회 참가사건으로 퇴학. 이에 항거투쟁하다가 구속, 5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정치범 석방 때 석방됨. 그 후 학생운동과 중·고 학교과정 독학 1948년 2월 - 2. 7구국투쟁에 참가, 그 후 밀양군당 조직 레포(연락원)와 농민위원회 오르그(조직지도원)로 투쟁 참가 1949년 4월 8일 - 달성군 구지면 도동동의 외갓집에서 피신 1949년 6월 - 초동교원 채용 준교사시험에 합격 1949년~1951년 - 대구시 달성군 구지국민학교 교사 1951년 9월 - 대구시 영남고등학교에서 고등학교 2학년 수료 학력을 인정받아 고등학교 3학년에 입학 1952년 3월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과 입학 1956년 경북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대학원 수학과 석사과정 입학. 경북대 수학과 강사. 영남고등학교 교사, 1961년 2월까지 근무 1958년 3월 - 경북대학교 대학원 수학과 석사과정 졸업 1959년 10월 21일 ~ 1960년 10월 21일 - 교보병(교사병역특례로 1년복무)으로 20사단 전방 근무 1956년 -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에서 강사,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역임. 1960년 - 경북대학교에서 근무 1964년 -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때 이재문 동지와 함께 학생운동을 지원. 그 후 이재문 동지, 이대룡 동지들과 함께 청년학생운동을 지원. 1969년 - 이재문 동지와 여정남 동지들과 함께 경북대 사회과학 동아리 정진회(正進會)를 조직지원하고 3선개헌반대투쟁을 지원 1970년 - 정진회의 후신으로 정사회(正思會)를 조직하고, 이재문 동지, 여정남 동지, 임구호 동지와 함께 교련반대투쟁을 조직 지원 1970년 8월 - 이학박사학위 취득 1972년 10월 - 이른바 유신체제로 모든 학생운동 동아리를 해체하자 위장 학술연구 동아리인 한국풍토연구회를 조직 1973년 10월 - 유신체제 반대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자 11월 5일 위 위장 동아리의 조직을 가동하여 경북대학교에서도 1000여명이 궐기하여 시위하고 경북 도경에서 연좌, 중앙통을 지나 2.28기념탑에서 바람처럼 해산하여 박정희 파쇼정권이 크게 당황 1974년 1월 - 유신헌법 반대를 탄압하는 긴급조치 1호, 2호의 발동 1974년 4월 - 민청학련사건으로 여정남 동지, 임구호 동지 체포됨. 여정남 동지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1975년 4월 9일에 처형. 1976년 2월 - 20년간 재직해 온 경북대 교수직에서 ‘국가관 미확립’이라는 구실과 ‘학생운동’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재임용 탈락 1976년 9월 ~ 1977년 2월 -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대우 강사 1976년 9월 ~ 1979년 10월 - 체포될 때까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가입.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교양선전선동부책 겸 통일전선부책으로 활동 1977년 3월 -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 교수로 재임명 1979년 9월 - 숙명여자대학교 이과대학 수학과 교수로 전임 1979년 10월 -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조직노출로 검거. 1심에서 사형. 세계수학자들의 항의와 진정으로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1988년 12월 - 만 9년 2개월의 징역을 살고 가석방 1990년 - 1학기 서강대학교 총학생회에서 개설한 ‘과학과 사람’이라는 강좌를 강의. 이 강의를 정리하여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를 출간함 1991년 3월 -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와 수원캠퍼스에서 교양학부 강사. 강좌 현대사회와 과학 1994년 6월 14일 - 구국전위 전위조직사건으로 재구속 무기징역 선고 1999년 8월 15일 - 형집행정지로 석방
석방 후 청년학생, 노동청년에게 세계관, 인생관 등 철학과 해방투쟁사에 관한 내용을 강연하고 과학기술과 수학사에 관한 내용과 사회비평에 관한 문필활동을 하고 있음.
저서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 (광야, 1989)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 (죽산, 1990) ‘수학문화사 (일월서각, 1990)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 (돌베개, 1996)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 (아름다운사람들, 2003) 기타 수학에 관한 교양서적 다수 | | |
첫댓글 존경하는 선생님...
건강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친일파를 제대로 규정한때는 미군세력들어오기 전이었군요.
역사가 왜곡되면 어찌 되는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알게 되는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