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많은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2천년대가 다가오면 환상의 유토피아가 전개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실제로 계몽에 힘입어 민주주의는 확산되었고, 세계 시민들의 협조로 절대적인 고통인 기아와 질병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해방되었다. 또한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이 지구는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토끼가 방아 찧는 달만이 아니라 인류의 기원을 밝혀줄 화성에까지 탐사선을 보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불멸의 지위를 넘보게 되었으며, 인공지능(AI)의 개발로 힘겨운 노동에서 벗어나 태어남과 동시에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지도 모르는 극락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문명은 진보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에 대항하여 인류는 전면전을 치루고 있다. 백신이 개발되었다고는 하지만 새로운 변종에 대응하기에 급급하다. 세계적인 통계를 발표하고 있는 월드오미터(worldometer)에서는 현재까지 약 6억5천만 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되었으며, 약 6백7십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매스 미디어가 전하듯 지구 곳곳에서 거대한 화장장과 무덤이 펼쳐지고 있다. 수많은 나라들이 봉쇄정책을 펼치다가 집단면역에 기대어 개방하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끝은 아니라고 말한다. 제2, 제3의 바이러스가 인류를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지구촌을 한층 경악하게 한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러시아는 유엔의 상임이사국이다.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가 군사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략하여 많은 시민들을 살상하고 있다. 역사적 갈등이야 이웃하는 나라들 간에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인류가 훤히 지켜보는 가운데에 무력으로 한 나라를 초토화 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전히 세계는 약육강식이 판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토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사회가 늘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은 러시아의 반격이라고도 보지만 사람을 죽이는 전쟁은 무의미하다. 미국 또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여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것에 제동을 걸어야 할 국제질서는 없음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어떤 교훈도 찾을 수 없다.
나아가 더욱 절망적인 지구의 상황은 기후위기의 문제다. 어떤 이념과 주의가 대세가 되었든 지구는 머지않아 불모의 환경에 처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에 처해 있다. 유엔의 공식기구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에서는 2021년에 제6차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현재의 이 상태를 비관적으로 보며,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할수록 지구의 기온은 높아지고, 기후 시스템에 강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한다. 산업화 이후 1.5도 상승이 현실화 될 경우, 극한의 기후, 2050년 이전 북극빙하의 전면 해빙, 해양순환시스템의 고장과 이로 인한 복합적인 기후 이상과 온난화 발생, 해수면 상승 등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대로는 21세기 말에는 1.8도까지 지구 온도가 오를 것으로 본다. 약 2도 가량 오른다면, 되먹임 현상으로 지구의 가파른 기온상승이 예상된다. 한마디로 삶의 환경은 소멸되는 것이다.
20세기에 인류 문명을 예측했던 사람들은 과학과 자본의 발달은 내다보았을지는 몰라도 인간 의식의 변화에 대해서는 간과했다. 불확실하고 절망에 빠져드는 인류의 삶은 다시 원시 문명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회광반조(回光返照)의 힘으로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문명을 싹틔울 것인지의 기로에 놓여 있다. 코로나19, 상시적인 전쟁, 지구의 기후위기는 결국 마음에서 발생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탐진치 삼독심에서 자라난 것이다. 모든 조사들이 한결같이 “돌부리에 넘어진 자, 돌부리를 잡고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이 인류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다. 이는 다시 “마음으로 인해 넘어진 자, 마음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불교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서구의 철학과 과학이 사회를 도배하면서 움추러든 불법의 위대한 묘용이 현대 문명의 치료제가 될 수 있음을 서구인들 자신들이 자각하고 있는 현상을 볼 때 그렇기도 하다.
20세기에 인간의 지성을 정점에 올려준 대표적인 인물들인 프로이드, 마르크스, 아인쉬타인은 인간 삶을 다각도로 밝혀주며 오랜 무명을 벗겨주었다. 심리학, 정치경제학,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문명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럼에도 불교는 이미 2천5백년 전에 이들 지성들이 딛고 있는 마음의 근본을 해부함으로써 오래된 미래로서의 부동의 위치를 굳혔다. 불교의 경전은 수많은 프로이드와 마르크스와 아인쉬타인으로 넘쳐난다. 온 인류, 전 우주와 소통하며 온갖 요란한 마음을 지켜보며 본각(本覺)의 낙원을 이루고 있는 반야의 불성이 바로 이들 지성의 근원이다. 따라서 불교야말로 가장 과학적이며,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종교다. 과학의 패러다임은 쉼없이 변한다. 경제는 지구의 자원을 거덜내고 있다. 정치는 인류를 분열시키고 있다. 이들 세계가 참으로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지를 타파하고 삶의 질을 끌어올리며 대화와 타협으로 세계를 평화로 이끄는 것 아닌가. 불교가 지향하는 세계와 무엇이 다른가. 이미 오도(誤導)된 이들 세계의 저 너머에서 불교는 우리 삶을 지옥에서 극락으로 안내하는 중이다.
그 길이 바로 마음을 길들이는 조련(調練)의 기술이다. 불법의 수행론이다. 브레이크 없는 인류 문명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을 불교가 지니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든 불자들도 재현 가능하다는 점이 이웃종교와는 커다란 차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길잃은 문명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힘이 불교에 있다. 이론의 종교가 아니라 실천의 종교가 불교다. 선방마다 걸려 있는 ‘조고각하(照顧脚下)’, 즉 ‘너의 다리 밑을 보라’라는 말은 지금의 인류에게 필요한 법문이다. 나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불성의 체(體), 지공무사(至公無私)한 불성의 용(用)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과학이자 경제이자 정치인 것이다. 여기에 과학의 불장난과 경제의 무한 소비와 정치의 권력화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금강의 지혜가 있다. 인류의 위기는 마음의 위기다. 마음의 작란(作亂)이 표면화된 것이 현재의 난리다. 난리의 근원을 알고 치유의 처방을 알고 있는데 어찌 희망이 없겠는가.
하여 불자들은 이 위기의 중심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여전히 무지몽매한 중생들이 깨달음과 자비의 대해에 뛰어들지 못하고 있다. 불법을 등에 업고,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함이 있는 법(有爲法)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으며,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다”고 한 말씀처럼 모든 마음의 거품들을 걷어내고 환희와 감로의 법신의 세계로 안내해야 한다. 모든 이웃들 또한 어떤 사마외도의 흔들림에도 오염되지 않고(不染), 변하지 않으며(不變), 부서지지 않는(不壞) 금강의 성품이 바로 우리가 딛고 있는 세계의 본질임을 다 함께 깨닫도록 하여 이 불난 지구가 정토낙원으로 한 순간에 뒤바뀔 수 있음을 자각하게 해야 한다.
오직 희망은 불법이다. 개인의 업만이 아니라 사회적 공업(共業)을 해소하는 것이 불자들의 사명이다. 개인의 열반과 해탈만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열반과 해탈을 이뤄야 한다. 이 새해에는 불법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불은(佛恩)의 기쁨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는 열락의 세계를 만들어 가자.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두 부처임을 깨닫고, 지혜와 자비의 물결로 온 세상이 정토낙원이 되고, 각자 자신이 처한 곳의 주불(主佛)로서 인류를 한 가족, 한 집안으로 만들자. 부디 시방과 삼세의 제불조사들과 파수공행하는 새해가 되길 기도한다.
첫댓글 오직 희망은 불법이다. 개인의 업만이 아니라 사회적 공업(共業)을 해소하는 것이 불자들의 사명이다. 개인의 열반과 해탈만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열반과 해탈을 이뤄야 한다. 이 새해에는 불법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불은(佛恩)의 기쁨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는 열락의 세계를 만들어 가자.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두 부처임을 깨닫고, 지혜와 자비의 물결로 온 세상이 정토낙원이 되고, 각자 자신이 처한 곳의 주불(主佛)로서 인류를 한 가족, 한 집안으로 만들자. 부디 시방과 삼세의 제불조사들과 파수공행하는 새해가 되길 기도한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룩한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