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인 이상 살아가면서 업을 짖지 않을 수 없다. 불가에서의 업은 업보의 준말로써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한 보답이다. 여기에는 선업과 악업이 있지만 업은 후자에 더 큰 의미를 둔다. 인간은 성선설로 태어나서 성악설로 살다가 죽는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거짓말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6세 미만의 유아들은 거의 없으리라 본다. 이는 그만큼 어린아이들은 순수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본의 아니게 이렇게도 치고 저렇게도 치다보니 생존전략으로 업을 지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짓는 업은 육업, 구업, 심업으로 나뉘어 진다. 육업은 몸뚱아리가 짓는 업이고 구업이 말로 짓는 업이며 심업은 마음이 짓는 업이다.
이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 심업이고 그다음이 구업, 육업 순이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은 생각에서 비롯되어 말로 이어지고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육업은 업으로 생각하지만 심업이나 구업만 업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한번의 악행은 한번의 선행으로 만회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들은 절대로 상쇄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업보는 무서운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나쁜 생각, 나쁜 말을 함부로 한다. 행동에 옮기지 않았기에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깊이 명심했으면 한다. 나역시도 이글을 쓰면서 더욱 더 성찰의 시간을 가져 본다. 지금까지 말한 업보는 사람들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면 실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선업이라고 행한 것이 악업으로 돌아온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오늘은 그부분에 대해서 한번 논하고져 한다. 몇년전에 예능프로에서 이런 사례를 제시하고 의견들을 물었다. 나의 친한 친구 부인이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는 것을 나만 알고 친구가 모를 때 내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하는 것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구에게 있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그이유는 친구 부인이 나쁜 행동을 했고 친구가 가엾기 때문이라 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 입장에서 보면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자신의 아내와 외간 남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올라 올 것이다.
이것은 당해보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차라리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백번 나을 수 있다. 어차피 때가 되면 장본인들이 행동을 바꾸거나 실토할 때가 온다. 그때 상황을 들어 보고 대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내가 바람직하다고 한 것은 업을 두고하는 말이다.
업의 원리를 알면 내가 친구에게 밀고하는 것은 엄청난 구업에 해당하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실수도 하고 이탈을 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다려 주면 원상복구가 될 것을 친구를 위한 답시고 있는 그대로를 까발리는 것은 친구 뿐만 아니라 친구 부인 및 외간 남자 모두를 죽이는 꼴이 된다. 물론 나자신도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사례가 좀 극단적인 것을 들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핵심은 남의 일에 끼여 들지 말고 간섭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난 이말을 모스님의 유튜브를 통해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예를들자면 분가한 자식이 이혼위기에 처해 있거나 부모님이 웬쑤지간으로 살아가도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긴가민가했었는데 이글을 쓰면서 얼풋이 그말이 무슨 뜻인지 알것 같다. 인간은 자신이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서운하게 생각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더우기 3자간에 있어서 상대를 위한 답시고 또 다른 상대를 흉보거나 고자질하는 것은 절대로 삼가야 한다.
역으로 상대가 나를 위한 답시고 제3자가 말한 흉이나 고자질도 듣지 않아야 한다. 이는 화자나 청자의 입장에 볼 때 모두가 구업이 되어 희생양이 되기 때문이다. 구업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 욕설, 이간질, 뒷담화, 고자질, 흉 등이다. 선업을 쌓으려고 하기 보다 악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업보를 청산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