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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30일, 주현 후 제4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예배의 부름: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2년 1월 30일, 주현 후 제4주 주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주현 후 제4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경배찬송(일어서서):
찬송가 19장 (찬송하는 소리 있어)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일어서서):
시편 71:1~6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2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3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4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5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6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 대표기도: 미셀 쿼이스트(MichelQuoist)
하나님, 하나님 앞에 있는 것, 그것이면 됩니다.
제 육신의 눈을 감고, 제 영의 눈을 감고,
잠잠하고 고요하게 있는 것,
제게 모습을 드러내신 주님께 저 자신을 드러내는 것.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 앞에 있는 것.
아무 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듣지 않으려 합니다, 주님.
모든 생각과 모든 이미지들을 배웁니다.
어둠 속에서. 단지 아무 장애물 없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제가 여기 있습니다.
믿음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 당신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말씀: 누가복음 4:21~30 (성경)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 특별찬양:
405장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을찬송합니다.
*. 말씀선포: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주현 후 제4주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이어서 진행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61장1~2a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 메시야 시대의 시작을 열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나와 생각(혹은 습관, 이념 등등)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성찰해 봅니다. ‘다른’ 것(사람)과 잘 지내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평화를 일구어 가야 하지만, 사실 누구나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돼’ 하면서 양보하지 못할 어떤 것(지점)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조차 없어야 하는지, 혹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주님은 어떻게 본을 보여주셨는지, 평화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2. 본문
오늘 본문은 지난 주 말씀에 이어지는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1~2a를 읽으신 후, 오늘 이 말씀이 너희 귀에 응해졌다는 말씀을 하신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기며 증언합니다. 그러나 곧, 다른 시각에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깎아내려 헐뜯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읽으시고는 “너희는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속담을 말하면서 ‘내게(예수께)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고향인 나사렛 여기서도 행하라”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유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하나는 엘리야 시대에 그 많은 과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사렙다의 한 과부만이 은총을 입었음을, 다른 하나는 엘리사 시대에 그 많은 나환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수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은총을 입었음을 이야기 하십니다. [사렙다(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열왕기상 17:8~16, 수리아(아람)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는 열왕기하 5:1~19을 참조.]
이 두 이야기가 듣고 있는 나사렛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들이 이 이야기들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동네의 높은 곳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쳐 죽이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신비롭게도 그들 가운데로 유유히 지나가셨다고 누가복음은 전해 줍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모두 이방인에게 은총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 가지 점에서 화가 났습니다. 첫째는 ‘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유대인을 젖혀두고 이방인에게로 향했느냐’하는 것입니다. 마치 적대국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신탁에 몹시 화를 내고 도망쳤던 선지자 요나처럼, 또한 이스라엘을 식민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백부장에게까지 은총을 내리시는 예수님을 보고 화가 잔뜩 난 가룟 유다처럼 말입니다. 왜 ‘내(우리) 편을 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 땅(예수님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나사렛에서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기적)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저런 많은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께서 ‘왜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는 말 속에는 사실 시험자의 달콤한 유혹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곳에 기적을 베푸시는 것이지, 기적을 행할 수 있나, 없나 하는 시험의 자리에서는 결코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인종적으로 같은 유대인, 지역적으로 같은 나사렛이라는 ‘같은’을 외면한 ‘다른 이방인, 다른 장소’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 불화(不和)가 담겨있습니다. ‘왜 같은 편이 아니냐’는 것이죠. 같은 편이 아닌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3. 두 종류의 사람
세상에는 다투는 사람과 평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孔子)와 제자 안회(顔回)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 안회(顔回)는 배움을 좋아하고 성품도 좋아 공자(孔子)의 수제자 였다. 하루는 공자의 심부름으로 시장에 들렀는데, 한 포목점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시끄럽기에 무슨 일인가 해서 다가가 알아보니, 가게 주인과 손님이 시비가 붙은 것이다. 포목 사러 온 손님이 큰 소리로, "3 x 8은 분명히 23인데 당신이 왜 나한테 24전(錢)을 요구하느냐 말이야!" 안회는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사람에게 먼저 정중히 인사를 한 후, "3 x 8은 분명히 24인데 어째서 23입니까? 당신이 잘못 계산을 한 것입니다." 하고 말을 했다. 포목 사러 온 사람은 안회의 코를 가리키면서, "누가 너더러 나와서 따지라고 했냐? 공자님이 옮고 틀림을 알 수 있다. 그 양반만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 "좋습니다. 그럼 만약 공자께서 당신이 졌다고 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소? 그러면 내 목을 내 놓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제가 틀리면 관(冠)을 내 놓겠습니다." 두 사람이 내기를 걸고는 공자를 찾아갔다. 공자는 사유 전말을 다 듣고 나서 안회에게 웃으면서 왈 "네가 졌으니 이 사람에게 관을 벗어 내 주거라. 안회는 순순히 관을 벗어 포목 사러 온 사람에게 주었다. 그 사람은 의기 양양히 관을 받고 돌아갔다. 안회는 공자의 판정에 대해 겉으로는 내색을 할 수 없었지만 속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스승이 이제 너무 늙었고 우매하니 더 이상 배울게 없다고 생각했다. … … …
(이러저러한 일이 있고 난 연후에), 공자 왈, "… 한번 잘 생각해보아라. 내가 ‘3 x 8 = 23이 맞다’고 하면 너는 지게 되어 그저 관하나 내줄 뿐이지만, 만약에 내가 ‘3 x 8 = 24가 맞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목숨 하나를 내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안회야, 말해 보거라. 관이 더 중요하냐?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냐?" 안회가 비로소 이치를 깨닫게 되어 쿵하고 공자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리면서 말을 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 전해드립니다. 형제가 다툽니다. 어린 동생은 산타가 있다고 하고, 형은 산타는 없다고 하며 서로 다툽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찾아옵니다. 엄마는 (형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동생 편을 듭니다. ‘산타는 있다’고 말입니다. 의기양양한 동생이 ‘그것 보라’고 형에게 우쭐합니다. 형은 속이 상합니다. 엄마는 속이 상해 있는 형을 불러 따로 이야기를 합니다. … 엄마의 이야기를 다 들은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동생이 산타가 있다고 하면 ‘맞아, 있어~’라고 동생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고는 미소를 짓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동생이 있고, 동생과 다투는 형이 있습니다. 포목을 사러 온 사람이 있고, 그와 다투는 안회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툰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둘째는 엄마와 엄마의 말씀을 이해한 형이 있습니다. 공자와 공자의 말씀을 이해한 안회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툼이 없어졌다는 점에서 같은 종류의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때로 고정관념이 되어 더 큰 의 (대의, 大義)를 놓치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 ‘정답(正答)'이란 없습니다. 한 가지 문제라도 무수한 '해답(解答)'이 있을 뿐입니다.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正答)'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 박정희대통령 이전에는 '정답(正答)'이란 말을 안 썼다고 합니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4.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 혹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는 길은 세가지 (지평이) 있다고 합니다. (머리의 지평은)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것, (가슴의 지평은)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 (팔-다리의 지평은) 평화를 일구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팔-다리의 지평에서) 평화를 일구어 가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마태복음 5:44~4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서 “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고 말했습니다. 동이불화(同而不和), 곧, 같은 것(동, 同)은 좋은 것이지만 화목(화, 和)하지 않으면, 화이부동(和而不同), 곧, 같지 않아도(부동, 不同) 화목한 것(화, 和)이 낫다’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같은’ 식구와 불화하느니 차라리 ‘다른’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낫다”라는 말입니다.
평화는 나와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것입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인 것이죠. 나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까요? 보통, 조금씩 차이가 있는 삶은 그런대로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 우리와 많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 (강도, 살인자, 도둑 등 나쁜 짓을 하고 교도소에 가 있는 사람들이나 병원에 강제 수용된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 거리에 내 몰린 집 없는 사람들, 많이 아픈 사람 혹은 나이가 많아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세상 이별할 날만 기다리는 사람, (감옥에서조차) 전향을 하지 않는 골수까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신봉자 혹은 양심수, 이성의 성 행위와 다른 성-행위를 하는 성-소수자(게이, 레즈비언, 수간 등), 병원에 입원해야만 할 정도의 약물중독자, 도박중독자, 피부 색깔이나 문화가 전혀 다른 이질적인 외국인 노동자들 등등. 이 사회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 가까이 하기에 엄청난 간극이 느껴지는 이 사람들을 어쩔까요?
5. 우리와 다른 사람들
예수님 시대에도 이렇게 가까이 하기에 거북한 엄청난 간극의 지평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남자가 남자가 아닌 (더구나 사마리아 사람인) 여인과 대화를 하는 경우, 유대인으로 이방 사람과 식사를 하는 경우, 거의 모든 유대 사람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세리, 일반 사람들이 가까이하기 꺼려하는 치명적인 환자들 (죽은 자, 나환자, 앉은뱅이, 맹인 등등), 몸을 팔아 살아가는 창녀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증오하는 로마 사람들과가까이 하는 경우 등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말씀하시기를, 마가복음 2:17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이 된 혹은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사람과 느끼시는 간극은 과연 얼마만큼 될까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떤 큰 간극보다 더 크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찾아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복음(福音)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화(和)하심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못 볼 꼴을 보시고는 물로 심판하신 후에, 노아와 맺은 언약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9:11입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나서 언약의 징표로 무지개를 보여 주십니다. 12~13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이 말씀 바로 전에 하나님께서 깨달으신 바(?)를 전해줍니다. 8:20~21입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고 이어서 22절에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22)”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천성적으로?) 악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그리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는 말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사실, 오늘 본문의 사르밧 과부나 나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유대인들과 함께 한 ‘다른’ 이방인도 많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사실은 애굽인들도 함께 나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선민(選民)이 나온 것이 아니고, ‘히브리 사람들’이 나온 것입니다. ‘히브리(합비루)’라는 말의 뜻이 곧 ‘천민, 방랑자, 땅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라합이라는 여리고 이방인 여인의 도움을 받습니다. 다윗의 증조 할머니는 모압 여인 룻이 자리합니다. 뭐 찾아보면 정통(?) 유대인 아닌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같음’과 ‘다름’이라는 것이 제아무리 간극이 크다고 해도, 사실 조금만 생각을 깊게 해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 셈입니다. 그 간극이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 사람을 찾아 오심’만 하겠습니까?
우리의 지평을 넓혀 화(和), 평화의 자리로 나아갈 일입니다.
6. 그 사람들 사이로 가시더라
자기들과 ‘같지’ 않은 예수님의 언행에 화가 몹시 난 사람들은 예수를 낭떠러지로 끌고 가 거기서 떨어트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죽이려는) 사람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더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신다’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산타가 있는 것에 혹은 없는 것에 머무름 없이, 3*8=24인지 혹은 23인지 하는 그런 머무름 없이, 그런 사람들 가운데로 그냥 지나가셨다는 것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 속에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 가운데로 지나가시니라(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 공명되지 않습니까?
그들(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서로 평화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쉬지 않는 것이고, 예수는 (우리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살펴봅니다.
요한복음 8:3~11 말씀을 읽어봅니다.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려와 예수를 시험합니다.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하는지 물으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십니다. 그들이 계속 물으면서 다그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십니다. 무슨 글을 쓰셨을까? [*. 혹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이라고 쓰지 않으셨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신비입니다. ‘그냥 그 사이로 지나가라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옳고 또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다 이해합니다. 이 율법에 의해 간음한 여인은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율법을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엄마와 공자와는 다른 지평입니다) 다만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합니다. 그리 말씀하시고는 몸을 굽히시고는 다시 땅에 글씨를 쓰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신비입니다. ‘그냥 그 사이로 지나가라는’
“그 사람들 가운데로”
사람은 사람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물론 가끔 사람을 떠나는 것이 도움은 되지만 사람들의 삶을 떠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삶에는 갈등이, 불화의 요소가 있습니다. 서로 다투죠. 할 수 없습니다. 갈등과 다툼이 있는 곳에서 평화의 삶을 잘 꾸려야 합니다. 사람의 삶을 떠나면 갈등과 다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正答)이 될 수 없습니다. 삶 가운데서 해답(解答)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삶 가운데 있음이 곧 훈련입니다.
어떤 스님이 계속 마음에 음란한 생각이 들어 문을 걸어 잠그고 산 속에서 10년 도를 닦았다고 합니다. 이제 되었 거니 하면서 속세로 내려와 첫 여인을 만났는데 금방 음란한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고 한탄을 합니다.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지속되는 속세를 떠나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삶) 가운데서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삶 자체가 훈련입니다. 삶에 대한 답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고 했습니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쉬지 않고 계속되듯이 그냥 지나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발자국도 뒤로 물릴 수 없습니다. 시간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싼타에 대한 엄마의 답변이나 3*8=23이라는 공자의 말씀도 정답은 아닙니다. 당시의 삶 가운데 한 해답일 뿐입니다.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는 것’일 뿐입니다.
7. 나가는 말
평화를 일구어 가는 일은 (믿음/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모든 가치 판단에 앞서 평화를 생각하십시오.
평화는 (나와) ‘다른’ 세계와 잘 지내는 것입니다. 평소 ‘다른’ 세계와 친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됩니다. 여행을 떠나면 낯선 세계와 마주합니다. ‘다른’ 세계입니다. 낯-설음에는 두려움도 있지만, 살짝 긴장되는 자유를 줍니다. 일상의 평범함을 낯-설음으로, 낯-설음을 일상의 평범함으로 바라보십시오. 다른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같은 동네 사람 예수님을 낯-설음으로 바라보지 못했고, 이방의 낯선 일들을 평범한 일들로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인가 ‘다른’ 세계와 친하게 지내려면 그 다른 세계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합니다. 삶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배움은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평화의 주님의 나라 잘 가꾸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찬송:
찬송가 526장 (목마른 자들아)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봉헌찬송(일어서서):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봉헌합니다. (찬송가)
*. 봉헌기도(일어서서):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비-대면예배로 드릴 경우,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혹은 신협 131-019-734759 (주안대신교회)로 송금합니다.]
*. 교회소식:
*. 찬송(일어서서):
찬송가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축도 혹은 주기도문(일어서서):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