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각해 이숙진 작가의 수필 독후감 [讀後感]
성숙한 시각으로 본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
김광한
성숙한 시각으로 보는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
타인이 쓴 글에 대해 객관적인 눈으로 그 작품을 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우선 객관의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이다.평석자의 객관이란 것은 아무래도 주관과 맞물려있기 때문에 결코 객관적이 될 수가 없다.그리고 내 객관과 타인의 주관 그리고 내 주관이 타인의 주관과 같지 않기 때문에 남의 글을 평하는 소위 평론가는 평론가 자신의 글이 될 수밖에 없다.따라서 남의 글을 평하는 자는 글을 직접 다루는 사람보다 글을 쓴 작가의 문학장르를 결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에 그저 작가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에서 바라롤수밖에 없다.마치 운동경기의 감독이 경기를 보고 선수의 잘잘못을 시정해주지만 필드에 나설 경우 선수만큼 활약할 수가 없듯이 문학이론을 강의 하는 교수가 제자인 작가를 능가할 수없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따라서 창을 하는 명창의 추임새를 놔주는 귀명창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오히려 글을 쓴 자와 평자의 관계를 원할하게 하고 독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심리를 부추겨 독서에 도움을 주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서론이 진부한 것같다.쓴글을 읽고난후 쓴 독자의 글을 독후감이라고 하고 전문 평자의 글을 평론이라고 한다.보각해 이숙진 원로 수필가의 글을 대하면 우선 일반 수필가가 쓴 글보다 무게감이 나가고 글을 대면하기가 마치 심사를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는 것같아 조금 어려운 것같다.그래서인지 글을 대하기 전에 이숙진 원로작가가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는가하는 근원적인 것을 알아야 그의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같다.
이름 앞에 보각해란 아호[雅號]가 붙여진 것이 조금 특이해 물었던 적이 있다.불교게통의 용어인 것같아 물었더니 일찌기 <정다운> 스님이 불교강의를 개설해 학생으로 가 1년 수료하고 나서 수계후 얻은 법명[法名]이라고 했다.한자의 어의로 보통 사람이 깨달은 바다 인데 깨달아 넒게 바다처럼 베풀어아 한다는 뜻이 사주와 관상에 맞는다고 했다.이숙진 작가의 첫 인상이 어쩐지 범접지 못하고 밀붙이기가 쉽지 않은 것같은데 대해 태어난 곳(안동)과 생각이 보수적이고 평생을 보수적 사고방싱으로 살아와 그것이 용모에 각인돼 있어 나이 얼추든 지금 세상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깨달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보각해란 법명을 지었다고했다.대저 사람의 인상이란 특히 여성인 경우 금방 친해질수 있는 나긋나긋한 상냥한 용모가 있고 생각이 깊은 내전 마님과 같은 용모가 있다.작가는 아무래도 후자인 것같다.그러나 마음 속에 갇혀있는 한없는 자비는 아무도 들여다 볼수 없는 신비함을 갖고있다. 그런 사람이 이숙진 작가이다.그가 쓴 다섯편의 수필 가운데 <해바라기의 꿈>은 해바라기를 의인화(擬人化) 시켜 거기에 생명과 생각을 부여해 해바라기란 꽃의 생각을 동화식으로 표출한 작품이다.한마디로 해바라기의 독백이다. 작가가 주인인 손바닥만한 주말농장의 한편 귀퉁이에 홀로핀 해바라기를 보면서 작가는 문득 먼 잉카제국을 생각하고 그곳 사람들의 생각을 전하기도 하고 해바라기가 가진 평범하지만 인간의 밀접한 이익은 전혀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의 야속함을 해바라기의 입장에서 속삭여 준다.
세계 어느나라건 없는 곳이 없는 해바라기 화초로서 대접받진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친근한 해바라기. 꽃의 크고 노란 얼굴이 화초로서 집안의 정원에서 키우기 망서려지는 해바라기에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입혔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키는 주인공들은 그 주인공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리라 . 해바라기도 마찬가지이다.먼저 살다간 비운의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즐겨 그린 것은 그가 해바라기를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해바라기는 화초로서 등외급에 속하지만 해바라기 그림은 어느 화초 그림보다 엄청난 재화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해만 좋아해서 나에게 반해버렸다고나 할까. 고흐가 그린 ‘꽃병에 꽂힌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는 지금 도쿄의 토고세이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이 그림에서는 그의 영혼과 신기가 느껴졌어. 반 고흐가 나에 대한 그림을 너무 열심히 그리는 걸 본 고갱이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 이 그림은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해. 정말 난 자부심으로 어깨 힘이 어느 누마루보다 더 높이 올라가 있어."
<본문의 내용중 일부>
수십년전에 개봉이 된 이탈리아 영화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이 그린 해바라기란 영화는 인간의 탐욕속에 스러져 가는 욕망과 허망함을 그린 명작으로도 유명하다.2차 세게대전이 끝나기 전에 일찌기 1차 대전에 참전에 전사했다는 약혼자 안토니오(마르첼로 마르스트로얀니 분)를 찾아 떠나는 과정에서 본 우크라이나 벌판에 끝없이 피어있는 해바라기, 그것을 본 조반니(소피아로렌 분)는 절망에 앞서 새로운 희망을 갖는다.땅속에는 무수한 군인들과 국민들의 시신이 묻혀있지만 이것이 해바라기의 생명력을 키워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 약혼자는 해바라기처럼 어느곳에서 생존해 있다는 희망,.그리고 또 있다. 프랑스 파리 인근의 리용역에서 테제베를 타고 스위스로 올라기면 왼편쪽에 무수하게 피어있는 키 낮은 해바라기들,그 씨는 식용유의 원료가 되는 씨앗이지만 그 해바라기들은 태양을 향해 머리를 곧추 세우고 있다.화초는 군집을 이루면 그 자존심이 훼손되지만 해바라기는 함께 피어야 제 값을 한다.태양은 희망이고 해바라기는 인간을 대산해서 기도하고 염원하는 인간 그 자체가 아닌가.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경험허고 수많은 독서를 통해 해박한 지식을 습득한 작가만이 그릴 수 있는 작가의 수필은 모두에게 와닿는 진실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 되었다. 그를 구성하는 문화적 코드는 마라톤, 여행, 독서, 고양이, 그리고 재즈다. 작가 하루키는 미국이나 일본이나 공간적인 장소나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다. 자신의 문학적 근원을 향해 고독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하루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걸어가는 우리 시대의 건강한 작가다."
본문 내용중의 일부"
작가가 작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원인이 여럿 있는 것같다.자신과 살아온 환경이 같거나 나이가 비슷하거나 작품의 취향이 같을 경우 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자신의 입장을 굳히고 팬이 되고 친구가 되는 경우가 아닐까 한다.더구나 자국도 아닌 일본의 작가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팬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작품에 끌리는 무언의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찌기부터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있다. 그가 쓴 글은 금방 한글로 번역이 되어 국내 서점에서 외국 소설 베스트 셀러로 당당히 재 등장한다.무라마키 하루키외에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작가는 국내 작가들보다 오히려 인지도나 책의 판매량을 웃돌고 있다.보각해 이숙진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친밀하게 생각하는 이면에는 그가 일본인이지만 일본적 소설이 아닌 세계인들, 특히 얄팍한 것을 혐오하는 한국인들, 특히 보수적 성향이 비슷한 작가끼리의 만남이 그렇지 않을까.
그는 일찌기 <상실의 시대>를 비롯해 <아큐 83>과 많은 수필 작품을 비롯해 번역작업을 끊임이 해온 작가이다.전세기인 명치유신을 통해 이미 일본은 해외 번역작업을 많은 문학작품을 선보였고 이에 질세라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나스메 소세키 가와바다 야스네리 그리고 후대 마스모도 세인초같은 작가를 배출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소설의 흥미를 돋구기 위해 추리적 요소를 가미한 많은 일본 소설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적인 것에서 벗어나 세게적인 공통의 관심사와 이에 따른 인간의 근원적 고통과 아픔, 그리고 치유같은 문제를 과감하게 작품에 투영해 일본인이지만 일본 것이 아닌 문화를 재 창조했고 아마도 보각해 이숙진 작가는 여기에 공감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이숙진 작가는 자신이 쓰는 수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옳은 보수,정의 그리고 약자에 대한 보살핌과 같은 것들과 맞추려는 의지로 보인다.나이도 비슷하고 생각기 같다면 이것도 삶의 한 즐거움이 아닐까.
"고향 집 뒷산에 수령 칠백 년으로 추정되는 반송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용의 모습으로 휘감은 수형이 경이로워 샤머니즘적 기운마저 감돌았던 나무다. 반송은 줄기가 밑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바깥 모습이 둥그스름하고 부챗살 모양이다. 문중의 정자인 〈침류정〉을 옮긴 터에 심겨줘서, 터를 가득 메울 정도로 넓게 자리 잡았다. 몸통의 넓이가 친구 서넛 걸터앉아 놀기도 좋고 누워서 책 읽기도 마침맞았다. 유년에 걸핏하면 『학클베리 핀의 모험』 『톰 소여의 모험』 등 동화책을 들고 올라가서 해가 기우도록 내려올 줄 몰랐다. 그 반송 나무가 안동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나, 여러 해 전 큰바람이 불어서 폐사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바람의 힘을 어찌하랴. 유난히 바람이 많았던 해는 대추가 풍년이다. 굳이 벌 나비가 암술과 수술의 가려운 곳을 긁지 않아도, 나무초리를 흔들어서 열매가 열리는 요술을 부린다. 이 모두 느꺼운 바람의 힘이다."
"<바람이 불어도> 본문중의 내용일부"
바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대기의 흐름이다.이 흐름이 거세지면 태풍이 되고 순해지면 순풍이 되고 때로를 동력이 없던 시절 무역풍이 되기도 했다.한 여름철 바람은 인간에게 시원함을 안겨주지만 거의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겨울철의 바람은 공포를 안겨주었다. 북풍한철이란 말도 있고 토네이도 같은 무서운 폭풍이 되기도 한다.수령이 7백년이 된 반송아무는 영험하다고 마을에서 수호수로 지정이 되었을법한데 이 나무가 바람에 어이없이 넘어가고 말았다. 바람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수 없는 괴력을 갖고 있다.옛날 중국 삼국 시대에 적벽대전이 있어 재갈공명이 동남풍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기세등등하던 조조의 대군을 불로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소설로 만들어낸 나광중 작가의 삼국지 연의의 이야기일뿐이다.이 숙진 작가는 <바람이 불어도>에서 작가 내면에 스며있는 자비심을 작품에 투영시켜 읽는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내보였다.
연륜이 만들어내고 불교의 자비심이 함께한 매우 따뜻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과 같은 불교식 사고의 흐름이 깊이 배어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어느 날 아들아이에게 맡기고 어슬녘에 집에 들어와 비몽사몽간에 잠이 들었다.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거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환청처럼 조곤조곤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에 불을 밝히니 부네 탈이 피로에 지쳐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부네탈 본문 내용중의 일부"
부네탈은 하회 별신굿 다섯째 마당에 등장하는 인물의 하나인 부네가 쓰는 탈을 말한다. 젊은 부인의 탈로 타원형의 얼굴에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진 실눈과 눈썹, 길쭉한 코, 미소를 띤 긴 입술을 하고 있다.이 탈을 사서 아들의 친구들에게 선물한 것의 후일담을 쓴 수필인데 여기에 남편이 등장한다.남퍈은 넘어져 고관절을 다쳤고 남편과 사이에 노부부의 사랑이 밑바탕이 되는 평범하지만 아늑한 노후의 정이 고스라니 담겨있다.부네탈에서 비롯된 이야기는 다시 부네탈로 되돌아 오는 문전회전의 이야기가 수필의 맛을 더하고 있다.
한마디로 군더더기 없는 잘 짜여진 수필이다 마치 못질 하나 없이 지어진 한옥같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매우 가슴에 와닿는 작품이다. 가족간, 특히 병약한 남편에 대한 사랑은 세월의 무게와 함께 하는 것같다.남의 글을 인용해고 배워서 쓴 글이 아닌 자연순화적인 노회한 수필은 나이든 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든디.
"생량머리에 드는 건들마로 풀쐐기처럼 목덜미를 쏘아대던 햇살이 잦아들 즈음이면 소나무 그늘에서 도토리 키 재기하던 맥문동이 소리 없는 합창으로 기지개를 켠다. 소나무가 그림자를 토해내면 자색과 어상반한 꽃대가 보랏빛을 토해내며 곤댓짓해댄다. 보랏빛 수련과 나팔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슴벅슴벅 아장거리다 해넘이가 되면 쭈그렁밤송이 신세다. 비비 틀면서 핀다는 비비추꽃과 습기가 자박자박 있는 곳에 자라나는 물봉숭아도 보랏빛이다. 흔들리는 체에서 가루 날리듯 바람 따라 흔들리는 싸리꽃을 눈에 담고 온 가을날은, 모데라토 리듬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니 산모롱이 돌아눕는 햇살도 보랏빛 꿈에 젖는다. 가을꽃은 암수가 한 몸에 있는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아스라함이 있는 보라색 꽃이 많은 까닭은 요란한 색깔로 나비를 유혹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일까. 아니면 무지갯빛 가운데 파장이 가장 짧은 보라의 앙짜일까."
"자색(紫色)의 본문 내용 일부"
우리말에는 같은 명사나 형용사라도 그 뜻이 다르게 표현되는 용어들이 많이 있다. 특히 색깔에 관한 것이 그렇다 같은 노랑이라도 노란 색을 세분화시켜서 바라보고 이것을 언어로 만드는 경우,단순한 외국어로서 표현이 불가한 것들, 그것들 가운데 자색(紫色)이 그렇다.보랏빛같은데 사실은 보랏빛이 아니고 그런가 하면 자주색도 아닌 그 무엇, 그러나 이 용어를 사용하는 많는 사람들이 있었다.먼저 살다간 사람들은 그 용어를 사용하면서 정을 나눴고 정속에 깃든 인간미를 나눠가졌다. 용어란 어느날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돌연변이가 아니라 한동안 쓰다가 점차 쓰는 횟수가 줄어들어 현대인들이 만든 용어에 잠시 자리를 내 줬을 뿐이다.이숙진 작가는 이런 귀하고 아름다운 용어를 다시 주어담아 여기에 당시 이 용어를 쓰던 사람들의 정을 오늘을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얼핏 그가 작품에 사용하는 용어가 생소한 것같지만 잘 보면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용어들이다.용어를 자의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용어를 잘 닦아 다시 선보이는 작업이다.
작가에게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용어들은 하나의 재산이다.일찌기 혼불이란 소설을 쓴 최명희 작가의 위대함은 소설속의 주인공들을 그 시대의 잊혀진 용어를 되살려서 그들의 정신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전달한 것이 아닐까.
우리말을 이루는 많은 용어를 알고 있는 이숙진 작가는 그래서 용어의 재산가이면서 수필을 잘 만드는 건축가이기도 하다. 이숙진 작가의 수필에 많은 댓글과 조회수가 붙는 것은 그래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용어가 되살아나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아늑함이 있기 때문이다.남은 삶동안 더 많은 글을 써 후대인들의 정신 건강과 올바른 삶의 철학을 글을 통해 가르쳐주길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이다.
김광한
1969년 중앙대 문과대 국문과 졸업
한국문인협회회원
소설가 평론가
첫댓글 깊은 내전 마님의 인상을 가지신 이숙진 선생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신 것 같습니다.
품격 높은 수필에 대하여 조심조심 격조 있는 평론을 하셨군요.
이 글을 쓰시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쏟으셨는지 잘 니타납니다.
고맙습니다
푸하핫!!!! 정경부인에서 내전 마님으로 강등했네요. 아무래도 너무 과하면 항의가 들어오니깐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원로작가에서 <원로>는 삭제했는데, 용서해 주실른지요?
괜찮아요.원로같지 않은 분들 가운데 원로란 용어를 좋아하는분들이 아주 많은데 무척 겸손하신것같습니다사실 저역시 원로란 말이 좀 뭣하지요.경로석에 억지로 앉히려는 음모같기도하고...지하철에서 서서 옛날 마누라 말고 연애하던 어떤 여인과의 오래된 낭만적인 생각을 하면서 가는데 앞에 앉은 젊은이가 경로석을 가리키며 하는 말
할아버지 저기 자리났어요.낭만이 박살이 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