윽...넘 느끼한 거 같지만.....................................추억이려니................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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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누나 사랑해"
이렇게 뜬금없는 고백이 있을까. 그래서 뭘 하자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랑한다는 말이 생소했다. 그런데 제이는 그랬다.
제이를 만난 건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그때 닥치는 대로 되도록이면 많은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10년 가까이 한 사람과 장기 연애를 한 탓에 남들이 20대 때 쌓는 이성에 대한 데이터가 나에게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때 만난 게 제이이다. 제이는 내 또래였다면 내가 다신 만나지 않을 타입의 남자였다. 제이는 끼가 많고, 좀 까졌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성 관계에서 내가 원하는 건 '주인공의 자리'이다. 나는 관객이 필요한데 제이는 퍼포머이기 때문에 우리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제이는 스스로를 "예술남"이라고 칭하는 에고가 강한 친구였다. 그렇지만 제이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렸기에 그마저도 귀엽게 느껴졌다. 그 나이의 생기와 풋풋함, 미래에 대한 불안과 낙관, 자신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고 또 우쭐거리기도 하는 혼란함과 불안함도 귀엽게 느껴졌다. 나 역시 20대를 내내 예술가 지망생인 '예술충'으로 보냈기에 내가 통과했던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우리는 몇 번 만났고 그 뒤로도 간간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락을 나눴다. 언제 한 번 보자는 말을 했지만 오랫동안 만나지는 않았다. 그러다 술에 애매하게 취한 어느 밤, 나는 오로지 술을 더 마시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충동적으로 제이에게 연락했고 기어이 제이를 찾아갔다. 거의 2년 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그 사이 제이의 인상은 좀 달라져 있었다. 살이 좀 빠졌고 머리를 기른 탓도 있었다. 자기 말로는 실연의 상처 때문이라고 했다. 여자를 믿지 않게 되었다고 했고, 여자에게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제이 또래의 남자애들이 얼마나 여자에 미쳐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제이의 음악 작업실에 갔다. 제이는 자신의 작업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이전보다 2배는 넓고 쾌적한 곳이라면서. 미안하지만 내 눈에는 그전 작업실이나 여기나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제이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하우스를 좋아하는 제이는 하우스가 심장 뛰는 박자와 동일하기 때문에 듣기에 가장 편안한 음악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힙합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반면 하우스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준다고, 그게 바로 하우스의 매력이라고. 언제나 흥분할 거리가 없을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나도 하우스의 매력이 뭔지 알 것 같은 밤이었다.
제이는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보여주었다. 하나의 음악에는 다양한 레이어가 겹겹이 쌓여있는데 프로그램 상으로는 그것들이 하나하나 분리가 되었다. 그래서 퍼즐을 맞추듯 여기저기 악기들을 배치하면 다양한 소리가 뚝딱하고 나오는 게 신기했다. 음악을 만드는 과정은 정말로 재미있어 보였고, 즐거워하는 제이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술에 취한 나는 잠이 쏟아졌다. 제이 작업실의 소파에 누웠다.
소파는 간이침대도 되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제이 팔베개를 하고 눕게 되었다. 제이를 껴안았는데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데?" 내가 물었다. "왜, 그럼 안돼?"라는 귀여운 답변이 돌아왔다. 애초에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고 우물쭈물거리면서도 우리는 밤을 함께 보냈다.
그 뒤로 우리의 디엠창은 활발해졌다. 마침 디제잉을 배우기 시작한 나는 음악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다. 제이는 나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나 디제이 영상을 보내주었다. 제이가 추천해준 음악들을 들었다.
"그런데 그거 너 수법이지? 그 작업실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갔을까?" 장난스럽게 물었다. 사실 그래도 별 상관 없었다. 그거야 자연스러운 일일테니까 말이다.
그러자 제이는 약간 정색했다. "나 작업실에서 작업 아니면 과제만 해. 녹음하러 온 동아리 여자애는 있는데 누나가 처음이야."
그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믿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어느 날에는 술 마시고 싶다고, 그런데 너무 늦었다고, 대중교통이 끊겼다고 이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빙빙 돌았다.
어느 날 밤 새벽 한 시, 보러 오라고, 보러 갈까, 누나 있는 데로 갈게 이런 말들이 오갔으나 그날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사실 그날 나는 다른 남자와 술을 마셨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제이의 디엠에 하루 동안 답장을 하지 않고 있다가 나는 제이에게 디엠 하나를 보냈다. "나 어제 너무 하고 싶었는데."
정확히 5분 뒤에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제이는 냅다 웃음기 섞인 소리를 질렀다. "아니, 뭔 소리야ㅋㅋㅋㅋㅋㅋ" 그러면서 지금 찾아가겠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집이 엄해서 안된다고 했다. 좀 억울해하는 것도 같았다.
"누나, 놀러와"라는 말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하다가 "고모, 놀러 와." (제이는 나를 고모라고도 부른다)라는 말에 도파민이 일었던 나는 한밤중에 택시를 타고 제이 작업실에 갔다. 우리는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영화, 그리고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대화 주제에 맞춰 우리의 거리는 조정되었다. 제이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 옆에 와서 앉더니 나란히 엎드려 영화를 보게 되었다. 우리 둘 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마침 같아서 그 영화를 보는 중이었는데 제이가 발장난을 걸었다. 음악에 레이어가 하나씩 쌓이듯 발이 얽혔고, 음악에도 강약조절이 있듯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는 영화에 집중했다.
사실 이런 관계가 무엇인지, 이런 방식으로 누군가를 만나도 될는지, 어쩌면 비겁한 행동이지는 않은지 하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제이에게 키스한다. 이 관계를 통해 어떤 것을 얻고 싶은 건지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연애 같은 건 굳이 하고 싶지 않다가도 누군가와 깊이 마음을 나누기 위한 유일한 관계는 연애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런 만남의 패턴들이 깊게 마음을 쓰지 않기 위한 비겁한 행동인지, 아니면 세상의 모든 관계가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기에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나는 그 사이에도 미팅과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들과 연락을 나누었고, 와중에 일 때문에 만난 임원급 '아저씨'가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서포트해주겠다"는 말에 아주 찰나이지만 혹하기도 했다.
그러면 이른 아침이 왔고, 나는 제이의 작업실을 먼저 나섰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서 아주 재빠르게. 그러고 보니 나는 제이에게 보고 싶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