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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 31 수요 예배 - 사도행전 강해 88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 설교 3
사도행전 20장 31-38절(395장)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을 불러 고별 설교를 한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고별 설교의 전반부에서는 바울의 사역자로서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주에는 사역자들의 바른 태도와 특별히 교회가 당면하게 될 어려움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이리와 같이 탐욕스럽고 착취하는 지도자가 들어올 것이며, 내부에서는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은 고별 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교회가 부딪히게 될 위험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바울의 권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 두 가지와 함께, 자신이 그들을 하나님과 그 말씀에 의탁한다는 내용을 이야기한 후에 그들과 이별합니다.
1. 교회와 성도가 기억해야 할 것 두 가지(31, 33-35v)
1) 눈물의 훈계를 기억하라(31v)
교회의 지도자들이 기억해야 할 첫 번째 것은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여기에 바울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하는 권면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것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기억을 더듬다, 회상하다, 연습하다, 마음에 새기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지도자들이 어떤 내용에 대해 기억을 더듬고 회상하여 마음에 새기고 연습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하기 위해서는 ‘일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깨어 있다, 정신 차리다, 경계하다, 주의하다, 엄하게 정성을 기울이다, 신중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고 연습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서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며, 또한 주의하여 신중하게 그리고 정성을 기울여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일깨어 기억하라’는 내용을 우선적으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 ‘므네모뉴오’(mnhmoneuvw)는 원래 ‘기억을 더듬다, 회상하다, 벌주다, 연습하다, 언급하다, 생각하다, 기억하다’(to remember)라는 뜻이며, ‘마음에 새기다, 기억하다, 회상하다 2)언급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그레고류오’(grhgoreuvw)는 원래 ‘깨어 있다, 정신 차리다, 경계하다, 주의하다’(to be stay awake)라는 뜻이며, ‘1)지켜보다 2)은유. 엄하게 정성을 기울이다, 신중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개역 성경은 두 단어를 각각 앞과 뒤에 배치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두 단어가 함께 문장 제일 앞에 나와 있다. 원문은 ‘디오 그레고레이테 므네모뉴온테스 호티’(dio; grhgorei'te mnhmoneuvonte" o{ti)라고 되어 있다. ‘디오’는 ‘그렇기 때문에’라는 접속사이고, ‘호티’는 ‘왜냐하면, ~에 관하여’(that, because, since)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러므로(‘디오’) 너희는 아래의 것들에 대하여(‘호티’ 이하) 정신을 차리고 주의를 기울여서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며 연습하라”는 의미이다.
일깨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기억하려면 일깨야 합니다. 즉, 정신을 차리고 주의하고 집중해야 기억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또 반대로, 기억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일깨어 있게 해줍니다. 계속적으로 회상하고, 마음에 새기고, 연습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게으르거나 나태해지지 않고 정신을 차린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깨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숙련된 운전자가 시동을 켜고 기어를 넣고 주행을 시작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초보 운전자에게는 시동을 켜고 기어를 넣고 출발하여 달리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하나를 분리하여 순서대로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숙련되면 이것들을 분리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됩니다. 여기 ‘일깨어 기억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일깨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구분해서 어느 것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힘들어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으로서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일깨어 기억해야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 부분은 고별 설교의 전반부인 18-21절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18)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19)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저는 이 부분을 설교하면서 이 내용들을 ‘①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② 우리가 복음의 내용을 어디까지 전해야 하느냐’, 그리고 ‘③ 우리는 이런 일들을 하는 데 있어서 변함이 없느냐’ 하는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만, 바울 자신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요약합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① 바울은 먼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저의 요약 가운데 세 번째 것인 ‘변함이 없다’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는 쉬지 않았습니다. 쉰다는 것은 ‘멈추다, 중단하다, 그만 두다, 떠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지난 삼년 동안 에베소를 떠나지도 않았으며, 에베소에서 사람들을 ‘훈계’하는 일을 멈추거나 중단하지도 않았습니다.
* ‘파우오’(pauvw)는 원래 ‘멈추다, 정지하다, 떠나다, 단념하다, 끝까지 오다, 그만두다’(to stop, cease)라는 뜻이며, ‘1)중단하거나 그만두게 만들다 2)억제하다 3)중지하다, 그치다 4)죄에서 해방시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② 두 번째는 ‘눈물로’ 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저의 요약 가운데 첫 번째 것인 ‘어떻게’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눈물’만을 언급하지만, 그는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참으면서 이 일을 감당했습니다. 저는 고별 설교에 대한 첫 번째 설교에서 ‘눈물’을 ‘잃어버린 영혼, 성숙하지 못한 영혼들을 향한 안타까움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은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사역 전반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훈계했던 것입니다.
③ 세 번째는 ‘각 사람을 훈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요약 가운데 ‘어디까지’와 관련됩니다. ‘훈계’는 ‘마음에 두다, 책망하다, 훈계하다, 경고하다, 권고하다’*라는 뜻으로, 단순히 책망하고 야단을 쳤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마음에 두게 하려는 모든 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훈계’라는 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앞의 본문에서는 각각 ‘전함’과 ‘가르침’(20v), 그리고 ‘증거’(21v)라는 세 개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한다’는 것은 ‘선언하다, 이야기하다, 자세히 말하다’**라는 뜻이고 ‘가르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가르치다, 알리다, 설명하다’***라는 뜻이며, ‘증거하다’라는 말은 ‘증거하다, 입증하다, 확언하다, 믿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증거하여 믿게 하는 일들을 통하여 복음이 그들의 마음에 간직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 ‘누데테오’(nouqetevw)는 원래 ‘마음에 두다, 주의하다, (온건하게) 책망하다, 훈계하다’(to put in mind)라는 뜻이며, ‘훈계하다, 경고하다, 권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아낭겔로’(ajnaggevllw)는 원래 ‘(자세히) 광고하다, 선언하다, 연습하다, 보고하다, 보여주다, 이야기하다, 말하다’(to report, announce)라는 뜻이며, ‘1)발표하다, 알리다 2)보고하다, 소식을 뒤로 전하다, 자세히 말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디다스코’(didavskw)는 원래 ‘가르치다’(to instruct)라는 뜻이며, ‘1)가르치다 2)알리다, 지시하다, 설명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디아마르튀로마이’(diamartuvromai)는 원래 ‘(진지하게) 증거하다, 항의하다, 권고하다, 명하다, 입증하다, 증언하다’(to solemnly serve notice)라는 뜻이며, ‘1)증명하다 2)확언하다, 증거하다, 믿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식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하나의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원문은 다르지만, 저는 이 부분을 고별 설교에 대한 두 번째 설교에서 ‘그 온 양떼’를 설명하면서 지적했습니다. 목회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 즉 성도의 ‘전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뿐 아니라, 그들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말씀이 그들 마음에 있도록 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고 가르치는 일에서 제외된 성도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속한 성도라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바울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 두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원문은 이것을 ‘헤나 헤카스톤’(e{na e{kaston)이라고 기록했다. ‘헤나’(원형 ‘헤이스’, ei|")는 ‘하나, 어느, 어떤, 풍부히, 서로, 오직, 다른, 누군가’(one)라는 뜻이고, ‘헤카스톤’(원형 ‘헤카스토스’, e{kasto")는 ‘각기, 모두, 각자, 모든, 낱낱이’(each every)라는 뜻이다.
그러면 바울이 에베소의 지도자들에게 바울이 이렇게 지난 삼년 동안 각각의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을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전하고 가르치고 증거하여 하나님 말씀을 그 마음에 두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사역했던 것을 일깨어서 기억하라고 말하는 의도가 과연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바로 뒤에 나오는 그들 전체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게 의탁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는 바울이 없는 지금 에베소의 지도자들이 이제껏 바울이 해왔던 그 사역을 감당해야 함을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역자의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말씀을 두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자기에게 맡겨진 양 가운데서 누구도 그러한 사역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2)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라(33-34v)
32절은 건너뛰고 33-35절을 먼저 봅니다. “(33)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34)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35)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1절에서 자신이 삼년 동안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것을 모본으로 제시했던 바울은, 여기에서는 자기가 누구의 재물도 탐하지 않고 스스로 일했다는 것을 또 다른 모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의 은, 금,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은과 금이라면 몰라도 의복을 탐했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지만, 근대 이후로 대량 생산되면서 옷이 흔해졌지 이전에는 옷도 보물 목록 가운데 하나로 이해되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옷이 흔한 오늘날에도 ‘명품’으로 불리는 옷은 ‘보물’ 수준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 창 24:53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 오라비와 어미에게도 보물을 주니라.” 출 3:22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수 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수 22:8 “일러 가로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 금, 동, 철과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 삿 8:26 “기드온의 청한바 금 귀고리 중수가 금 일천 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새 달 형상의 장식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의 입었던 자색 의복과 그 약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삿 17: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삼상 27: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약대와 의복을 취하고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왕상 10:25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정한 수가 있었더라.” 왕하 5:5 “아람 왕이 가로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사 3:6 “혹시 사람이 그 아비의 집에서 그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너는 의복이 오히려 있으니 우리 관장이 되어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 할 것이면.” 구약에서 의복은 보물 목록에 포함되어 있어서 왕에게 보내는 선물 가운데도 의복이 들어가 있다.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약 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좀이 먹는 보물은 ‘의복’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탐한다는 것은 ‘마음에 두다, 갈망하다, 바라다, 탐내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갈망이라기보다는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탐내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스스로 인정하듯이,** 복음 전하는 자로서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쓸 것을 공급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로 인하여 먹고 사는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사역의 특수성과 그의 개인적인 결단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무엇을 얻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자기 손으로 일했습니다. 자기가 쓸*** 것뿐 아니라 자기 동행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서**** 자기 손으로 일하여 공급했습니다.*****
* ‘에피뒤메오’(ejpiqumevw)는 원래 ‘마음을 두다, 갈망하다, 탐하다, 바라다, 기꺼이 ~하다’(long for)라는 뜻이며, ‘1)달려있다, 좌우되다 2)갈망하다, 간절히 바라다, 원하다 3)욕정이 타오르다, (금지된 것을) 탐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고전 9:4-15 “(4)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6)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7)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9)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10)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12)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13)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14)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15)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 ‘쓰는’으로 번역된 ‘크레이아’(creiva)는 원래 ‘고용, 사무, 경우, 요구, 요청, 결핍’(a need, a necessity, a matter of service)이라는 뜻이며, ‘1)필요, 소용 2)의무, 본분, 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당하여’라고 번역된 ‘휘페레테오’(uJphretevw)는 원래 ‘부하가 되다, 돕다, 섬기다, 봉사하다’(to render service)라는 뜻이며, ‘1)노를 젓다 2)거행하다, 공급하다, 봉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바울은 자신이 행한 이것이 교회와 성도에게 모본*을 보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런 방식으로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나름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자비량’했기 때문에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도 자비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우라’고 교훈합니다. 여기서 ‘할지니라’라고 번역된 단어는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한다, 의무가 있다, 필요하다, 옳고 적합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역자가, 그리고 교회와 성도가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선택 사항이 아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 사항이라는 이야기입니다.
* ‘휘포데이크뉘미’(uJpodeivknumi)는 원래 ‘(눈 아래에) 전시하다, 예증하다, 지시하다, 훈계하다, 보여주다’(to show)라는 뜻이며, ‘1)눈 아래 놓아 보여주다 2)말이나 설득력 있는 화술로 제시하다, 가르치다 3)미래의 것을 알도록 드러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코피아오’(kopiavw)는 원래 ‘피로를 느끼다, 열심히 일하다, (부여된) 노동, 수고, 쇠약해지다’(to feel fatigue)라는 뜻이며, ‘1)약해지다, 피곤해지다, 소진하다 2)지치도록 힘들게 일하다, 힘써 일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안티람바노마이’(ajntilambavnomai)는 원래 ‘쥐다, 원조하다, 참가하다, 돕다, 참가자, 후원자’(to take part in to succor help)라는 뜻이며, ‘1)쥐다, 고수하다 2)사람이나 물건을 취하다, 데리고 가다, 껴안다 3)돕다, 함께 하다, 나누어 갖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엡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 ‘데이’(dei')는 원래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한다, 마주치다, (필요함에) 틀림없다, 필요하다’(one must)라는 뜻이며, ‘필요하다, 의무가 있다, 옳고 적합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바울은 이렇게 하는 것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것이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라고 하면서 소개하고 있지만 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실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바울이 예수님 말씀이라고 속여서 말하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빠짐없이 모두 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당시 교회에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다른 기록들을 통해서 이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2. 교회와 성도를 주님과 은혜의 말씀께 부탁함(32v)
1) 하나님의 역사(役事, 32v)
이제 32절로 돌아갑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기억해야 할 두 가지 가운데에 이 말씀을 넣어두었는데, 아마도 이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에베소의 성도 각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그들을 떠나면서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교훈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을 하나 더 마련합니다. 그것은 교회와 성도를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부탁한다’는 것은 ‘나란히 놓는다, 맡기다, 위탁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교회와 성도를 주님에게 그리고 그의 은혜의 말씀께 위탁한다고 선언합니다. 주님께 의탁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말씀에게 의탁한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특별히 ‘은혜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은혜’란 ‘호의, 자비, 사랑 어린 친절, 너그러움, 관대함’**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과 친절, 관대함으로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하고 관대하며 친절한 사랑의 말씀에게 교회와 성도를 위탁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게도 위탁한다고 말합니까? 그것은 그 말씀이 교회와 성도를 위탁 받을 자격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히’라고 번역된 단어는 ‘할 수 있다, 능력 있다, 가능하다,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 ‘파라디테미’(parativqhmi)는 원래 ‘나란히 놓다, (음식, 진리를) 제시하다, 저축하다, 진술하다, 명령하다, 위임하다, 제안하다’(to set before)라는 뜻이며, ‘1)옆이나 가까이 두다, 내놓다, 식탁을 차리다, 설명하다 2)내려놓다, 맡기다, 위탁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카리스’(cavri")는 원래 ‘호의, 은혜, 선물, 자비, 너그러움, 기쁨, 감사’(loveliness)라는 의미이며, ‘1)은혜, 기쁨과 즐거움, 감미로움, 매력을 주는 것, 은혜로운 말 2)선한 의지, 사랑 어린 친절, 호의, 긍휼 3)은혜의 선물, 자비, 관대함 4)감사, 보답, 보상’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뒤나마이’(duvnamai)는 원래 ‘할 수 있다, 가능하다, 해도 좋다, 능력 있다’(to be able)라는 뜻이며, ‘1)할 수 있다, 능력과 수단과 지적 상태와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2)가능하다 3)힘이 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들을 든든히 세울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든든히 세운다는 말은 ‘건축자가 되다, 건축하다, 확고히 하다,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은 교회를 확고하게 세우며, 성도를 확고하게 세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확고하게 세운 후에는 그들에게 ‘상속권’ 혹은 ‘유업’을 ‘넘겨주실’ 것입니다.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는 표현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란 하나님 나라에 있는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가운데’라는 말은 영어의 ‘in’에 해당하는 단어로 ‘안에, 가운데, 중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에베소 교회와 성도가 천상에 있는 거룩한 성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들 무리에 소속되어서 그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기업’은 ‘상속권, 세습 재산, 소유물, 유산’****이라는 뜻이고, ‘있게’는 ‘주다, 넘겨주다, 제공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주님의 은혜의 말씀은 우리를 하늘에 있는 거룩해진 모든 성도들과 동일한 수준이 되도록 우리를 확고하게 세워주셔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상속권 혹은 유산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주실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믿고, 바울은 교회와 성도를 주님과 주님의 말씀께 위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오이코도메오’(oijkodomevw)는 원래 ‘건축자가 되다, 건축하다, 확고히 하다, 짓다, 세우다’(to building)라는 뜻이며, ‘1)집을 짓다, 건물을 세우다, 재건하다, 수리하다 2)은유. 세우다, 설립하다, 지혜와 경건함으로 자라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공동번역] 나는 이제 하느님과 그의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완전한 사람으로 키울 수 있으며 모든 성도들과 함께 유산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한글 킹제임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의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굳게 세워 줄 것이며,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 가운데서 너희에게 유업을 줄 것이라. [표준새번역]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이제 내가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의 믿음을 든든히 세우고 모든 성도들이 얻는 하늘 나라의 축복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 ‘엔’(ejn)은 장소, 시간, 상태에서 지정된 ‘위치’나 ‘수단’의 의미를 가진 전치사이다. 이것은 ‘안에, ~에, 위에, ~에게, ~에서, 가운데, ~중에, ~동안, ~에 관한한, 의하여, 가지고’(in)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클레로노미아’(klhronomiva)는 원래 ‘상속권, 세습재산, 소유물, 유업’(heirship)이라는 뜻이고, ‘1)상속재산, 유산으로 받은 재산 2)소유로 받은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디도미’(divdwmi)는 원래 ‘주다, 모험하다, 발생하다, 위탁하다, 넘겨주다, 허락하다, 방해하다, 만들다, 관리하다, 제공하다, 힘을 갖다, 놓다, 받다, 앉히다, 보이다, 때리다’라는 뜻이고, ‘1)주다 2)수여하다, 공급하다, 은사를 주다 3)몫을 주다, 직책을 맡기다, 나타나게 하다, 4)응하다’라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2) 하나님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두 가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상속권과 유산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거룩해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32절에 의하면 그것은 순전히 주님과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의해서 됩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있어서 사람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는 것일까요? 바울이 기억하라고 말한 것,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서 연습하라고 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사역자들이 바울처럼 눈물로 훈계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는 것이나, 수고하여 약한 자들을 돕는 의무들은 거룩해지고 유산을 받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과 사람의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는 하나님의 ‘단독 사역’인 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이루어가야 하는 구원인 ‘성화’는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 사역’(神人協同)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이 두 가지를 묶어서 보아야만 합니다. 칭의가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라고 하지만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심지어 믿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칭의도 신인협동일 수 있습니다. 성화의 경우도 신인협동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면 우리의 노력은 아무 결과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것을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성화 역시 ‘협동’이 아닌 ‘단독’ 사역이라고 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람에게 어떠한 행동, 정확하게 말하면 ‘반응’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응 때문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역사는 하나님께서 다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을 중히 여기시고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바울이 제시하는 활동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기억하라’는 이야기가 교회가 당면할 문제의 해결과 관계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기억하라는 내용은 살펴보면서도 그것이 당면할 문제의 해결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당면할 문제는 외부적으로는 탐욕스러운 약탈자의 출현이고, 내부적으로는 당파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출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 개개인의 마음에 두는 것과 수고하여 약한 자들을 도울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진리 위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가르쳐질 때, 교회와 성도가 진리 가운데 있을 때에 악한 지도자나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에베소 교회가 진리 위에 서서 악한 자들과 자칭 사도 등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내고 용납지 않은 것을 칭찬하시면서도,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하셨습니다(계 2:2-5*). 수고하여 약한 자를 도우라는 말씀은 바로 이 ‘처음 사랑’에 대한 부분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주장하되 삭막하거나 냉랭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사랑이,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약한 자들을 돕는 사랑의 행위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참으로 안팎으로 오는 문제와 시험들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3. 이별(36-38v)
마지막 36-38절입니다. “(36)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37)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38)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바울의 고별 설교가 끝났고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헤어짐은 다시 만날 기약을 할 수 없는 헤어짐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들은 매우* 근심스러워 했습니다. ‘근심’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슬퍼하다, 애도하다, 극도로 아프게 하다, 고통스러워하다, 괴로워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크게 울었습니다. 더 이상 울 힘이 없을 정도로 충분히*** 운 후에야 그를 배웅했습니다. 이 헤어짐이라는 주제는 앞으로도 몇 번 더 나옵니다. 하지만 그의 예루살렘 행이 그의 모든 사역의 완결을 위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슬픔 가운데서도 그를 보냈고, 바울 역시 슬픔 가운데서도 두려움 없이 그 길을 갔던 것입니다.
* ‘더욱’이라고 번역된 ‘말리스타’(mavlista)는 원래 ‘가장, 특별히, 첫째로, 가장 좋게’(especially)라는 뜻이며, ‘특별히, 중요하게,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오뒤나오’(ojdunavw)는 원래 ‘슬퍼하다, 애도하다’(to cause pain)라는 뜻이며, ‘1)극도로 아프게 하다 2)고통스러워하다, 괴로워하다 3)스스로 괴롭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개역 성경은 ‘크게’라고 번역했지만, ‘히카노스’(iJkanov")는 원래 ‘유능한, 넉넉한, 적당한’(ample, competent)이라는 뜻이며, ‘충분한, 매우 족한, 능력이 충분한, 적합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들이 필요한 만큼 충분히 울었다는 의미이다.
교회와 성도,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다가올 문제와 위험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후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우리의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