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는 여러 번 본 것 같다
음악피정미사에서 사순이면 빠지지 않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영화
올 사순 ‘피아니스트’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만큼 내 사고의 변화가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가 끝나고 인간의 이성이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근대
근대는 인간의 이성을 믿었고,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 대표적 자리에 있던 헤겔에게 있어 역사란 인간 정신이 외부로 발현된 것이며
역사는 최고의 이성인 절대 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인간이성에 대한 낙관적인 장미빛 믿음이다
그러나 세계 1,2차 대전은 이 믿음을 근본부터 송두리째 흔들었다
특히 2차 대전,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600만명의 유태인 학살은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불러일으켰다
영화‘피아니스트’는 나치가 저지른 전쟁의 참상 속에서 살아난 실존 인물인
폴란드 출신의 유태계 피아니스트 블라다슬로프 스필만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스필만은 이번 사순에선 더 이상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영화는 참혹한 전쟁 속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선과 악,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초월성,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 적과의 동거(?)를 가능하게 했던 예술,
배경으로 남아있던 이 모든 것들이 전경으로 새롭게 배치되면서
스필만은 자연스럽게 배경으로 물러나 앉았다
훌륭한 피아니스트 하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를 숨겨주었던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용기
그건 자연인 스필만이 아닌 ‘피아니스트’ 스필만을 살리고자했던,
그 참혹한 전쟁도 꺽지 못했던 예술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존경심이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많은 사람들이 스필만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해주었지만
그 모금된 돈과 스필만의 시계까지 갖고 도망간 사람
아무런 동요 없이 유태인을 향해 총을 겨누는 사람들,
그 양극에 선 모습 모두,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습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움직이는 충동을 쾌락이라고 보았다
이 괘락에 대한 억압이 신경증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의 이론은 설자리가 없다
자유를 향한 목숨 건 싸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타인에 대한
도움의 손길, 어찌할 수 없었던 전쟁이라는 운명 앞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마침내 그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쾌락을 좆아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빅터 플랭클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결별을 한다 그리고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 규정하고
정신요법 제 3학파인 ‘로고 테라피학파’를 창설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스필만이 다시 게토로 돌아와 숨어 지낼 때, 그 앞에 독일 장교가 나타난다
우리 모두의 가슴이 출렁하는 순간이다
그 때 독일인 장교가 스필만에세 누구냐고 묻는다
스필만은 본인은 피아니스트였다고 대답한다
독일 장교가 피아노를 쳐보라고 한다
스필만이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 연주가 끝났을 때, 몇 번을 본 영화였지만 순간, 가슴이 울컥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 스필만이 청중 앞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피아노 협연을 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의 감동이다.
마지막 장면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풍요 속에 얹어진 또 하나의 풍요 같은 감동이었다면
독일 장교 앞에서의 그의 연주는 절대적 절망과 궁핍, 공포 가운데서 피어난
희망이며, 살인과 죽음, 잔혹함 이면에 인간에게 남아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그런 감동이었다
히틀러가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할 때, 그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끔 해준
이가 있었다. 아이만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 후 숨어지내다 이스라엘 정보부에 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때, 현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철학자 중의 한명인 한나 아렌트가
그 재판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에서
사람이 생각하기를 포기할 때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아이히만은 우리가 생각하는 통념상의 살인광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너무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만 ‘생각하지 않고’ 상사의 명령에 복종한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지금 우리는 사순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사순시기마다 꼭 한번 씩 등장하는 영화 ‘피아니스트’는
인간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한 물음을 던지게 한다
인간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을 취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면서 살 것인지 아님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살 것인지
영화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