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에 대한 용서', 신의 몫?
오랜만에 좋은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레버넌트’, 뜻은 죽음에서 돌아온 남자. 두 시간 넘게 손에 땀을 쥘 수밖에 없었다? 글쎄 이런 표현을 해도 아깝지 않으리라. 심장이 터질 뻔했다면 엄살이지만, 숨 막힐 정도였다고 덧붙여도 거짓은 아니고말고.
한데 내 안목이 모자라서 그런지 바로 서너 달 전의 ‘대호’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게 아닌가! 호랑이와 회색곰이라는 맹수와 폭설, 그 위에 펼쳐지는 살상(殺傷)….심지어는 개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또 있다. 이민족(異民族)이 등장하는 것이다. 대호에서는 일본인이, ‘레버넌트’에서는 인디언이(아리카라 족)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게다가 정말 빠뜨릴 수 없는 공통점. 두 주인공은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이니 만큼 부풀려졌다. 허구라는 것. 우선 사백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산군(山君), 다시 말해 우리 조상들이 우러러보던 호랑이는 존재할 수 없음으로써 ‘대호’는 재미부터 반감되었다. 대신 미주리 강 근처에 살던 회색곰은 그 정도 크기라면 중간밖에 안 된다는 점에서 안 되기 때문에 허구란 전제를 깔고서도 관객의 입장에서는 넘어갈밖에. CG 수준은 압권이라는 평이더라.
둘 다 이 맹수의 새끼들까지 끼어든다. 그래 자칫하면 다시 한 번 등호를 그을 뻔했다. 하기야 야생에서야 무슨 일이든 안 일어나겠는가?
살육의 처절한 현장에서 두 주인공은 각기 아들을 잃는다는 점에서 보면 글쎄 한쪽이 표절(?)했다 해야 할 정도로 닮은꼴이다. ‘대호’에서는 주인공 천만덕(최민식)의 아들이 호랑이에게, ‘레버넨트에’서는 휴 글래스의 아들이 동료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시대도 고작 백 년 안팎의 차이밖에 안 난다. ‘레버넌트’는 1823년에 일어난 일이고, ‘대호’는 1927년을 배경으로 한다. 총구에서는 연속적으로 불이 튀어 나와 사람과 짐승을 죽이고 상하게 한다.
여기서 잠깐, ‘레버넌트’에서 짙은 천주교 냄새를 맡았다. 놀랍게도 허물어진 집에서 십자고상을 보았으니 하는 말이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혀 있는…. 나는 영화를 보다 말고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십자 성호를 그었다. 같이 관람하던 사위 돈 보스코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였다.
이번에는 내가 마치 소피라도 보고 싶은 척 일어서서, 복도로 나왔다. 스마트폰을 두드려, 미국에 천주교가 상륙된 게 몇 년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16세기 초, 정확하게 말하면 신대륙 발견 직후인 1513년, 프란치스코회에 의해서였단다. 지금부터 약 반세기 전이다. 다시 극장으로 들어와서는 계속 예수님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다만 인간의 생존 본능이 어떠한 극한 상황이라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 주고 있었다. 지루한 줄 몰랐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이제나저제나 아들을 죽인 원수에게 처절하게 복수하는 장면이 나오는지 조바심으로 기다릴 수밖에.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휴 글래스는 마침내 원수를 만나 단 둘이서 맞선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튀긴다. 휴 글래스가 가진 무기로 원수의 심장에 깊은 상처를 남기든지 머리를 난타해서 숨통을 끊어 주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지막 이 독백으로 영화는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원수)에 대한 용서는 신의 몫이다!”
약간은 허탈했다. 그러다 이윽고 수도 없이 들어온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기억 났다. 아직도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상대가 분명 있다. 그 사연을 밝히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한데 따지고 보면, 내 죄가 오히려 더 큰데….내가 남을 용서한다는 게 웃기는 일 아닌가? 나는 그럴 깜냥이 못 되는 위인이고. 대신 오히려 용서를 빌 상대는 수두룩하고말고. ABCD 성을 가진 옛 동료/ 어깨를 서로 부딪쳤던 갑남을녀/ 저승에서 나를 기다리는 노인학교의 수천 명의 이름 없는 내 제자 등등. 몹쓸 죄를 지은 것 같다.
쉬 잠이 오지 않는 밤을 그렇게 괴롭게 지냈다. 사흘이 지났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성경> 필사에 매달렸다. ‘테살로니카 전서’ 5장 15절이 유달리 가슴에 파고든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피차의 구분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평정을 어느 정도 되찾는다. 내일은 26사단 불무리 성당에 들른다. 부사단장 전역식에 참석한 뒤에 군악대원들과 전우들을 만난다. 특히 최정현 학사와 해후하는 기대가 크다. 그에게 전하고 싶다. ‘레버넌트’의 마지막 장면을 말이다.
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처럼 500번 버스를 타고 세종문화회관 앞을 스쳐 지나가야 한다. 거기엔 아직 세월호로 인한 희생이 낳은 아들딸을 잃은 부모의 울부짖음이 세찬 바람에 섞여 휘몰아친다..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가슴 저미는 내 고통에 그 공통분모가 가세한다. 세월이 얼마나 흘러야 하느님이 모두에게 끝맺음을 주실까?
* 13장
후기/ 사단장을 비롯한 많은 장병들을 만났다. 성당에도 들러 최정현 학사와 반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 두 분 다 편찮으시다고 해서 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우체국장과 극적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국장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장군들의 사진이 있었다. 전 양** 사단장 등도 거기 와서 환담을 나누었더란다. 방성리 주민들과의 교유 외연도 넓어지겠지. 참 좋다. 참, 우체국장은 대대로 거기 살았던 분이다. 내 군 복무 시절, 그는 어린이였다는데….세월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