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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마운 <몽실언니>
윤 여 진 (교사)
그 어느 사회과학책보다 더 실감나게 인간의 본성을 들추는 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했었다. <몽실언니>가 그랬다. 몽실이는 우리세대의 고모요 이모요 이웃집 아주머니들이다. 해방정국에서 육이오 전후에 유소년기를 보낸 70대에 들어선 이 분들은 참으로 불행한 세대임에 틀림없다. 고생만하고 늘 배고팠고 차별 당하며 평생을 살았던 분들이다. 우리는 이 분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하고 듣고 배운 것을 후세에게 전해야 하리라. 나는 육이오 발발 10년 후인 5.16군사쿠테타가 일어나던 즈음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었다는 반공소년 이승복과 동갑이다. ‘반공’의 박정희 시대에 초중등학교를 다녔으며 대학1년 때에 5.18을 맞았다. 전두환 노태우군사정권시대에 20대였고 사범대학졸업 후 학군장교로 최전방에서 근무하고 전교조가 태동하던 1988년 교사가 되었다.
나는 전쟁의 야만성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통일을 진심으로 바란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인권을 탄압하는 모든 독재체제에 반대다. 북한을 적대시하는 극우적인 태도도 싫고 전체주의적인 북한체제에도 공포를 느낀다. 또 반공이념교육 제대로(?) 받은 우리 세대가 통일운동에 매우 적극적인 것을 보면서 역사의 발전을 믿으면서도 반공이데올로기 주입에 대한 반감으로 북한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도 한다. 통일운동을 심정적으로 동조후원하면서도 솔직히 북한의 실체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나에게 <몽실언니>는 여러 면에서 근원적인 해답을 제공해 주었다. 한 시대를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이론이 아닌 삶의 궤적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어린 몽실이가 자라면서 균형감각을 갖추게 되는 장면을 보자.
✿몽실 : 국군하고 인민군하고 누가 더 나쁜 거여요? 그리고 누가 더 착한 거여요?
✿최금순(인민군여자) : “몽실아, 정말은 다 나쁘고 다 착하다.”
✿몽실이 :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최금순 : 국군 중에도 나쁜 국군이 있고 착한 국군이 있지. 그리고 역시 인민군도 나쁜 사람이 있고 착한 사람이 있어. (중략) 그런 거야, 몽실아. 사람은 처음 본 사람도 사람으로 만났을 땐 다 착하게 사귈 수 있어. 그러나 너 에겐 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신분이나 지위나 이득을 생각해서 만 나면 나쁘게 된단다.(123쪽)
<몽실언니>의 관심은 인간이다. 미성숙한 이데올로기의 맹신이 인간성을 어떻게 파괴하고 사회의 도처에서 얼마나 끔찍한 폭력으로 재생산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작품 곳곳에 숨어있는 쉬운 말로 쓰여진 잠언 같은 문장들을 대하는 기쁨과 순 우리말 무공해 글들은 정말 나에게는 보너스였다.
<몽실 언니>를 다 읽고나서니 작가 권정생의 삶이 궁금해졌다. <유랑걸식 끝에 문간방으로>라는 그의 글에서 보니 그는 1937년생으로 해방 이후 일본에서 귀국해 가족들은 거의 다 죽고 걸인생활과 떠돌이장사생활 이후에 병을 얻고 만다. 평생을 결혼도 안하고 교회 문간방에 종지기로 살면서 <몽실언니>를 비롯한 작품들을 썼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다들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높은 지위를 탐하고 더욱 편한 삶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그는 육신은 비록 천한 자리에 있었으나 한 시대를 껴안고 청빈과 나눔의 삶을 살다간 성자였다.
권정생의 소년소설 <몽실 언니>는 7세의 정몽실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던져지면서 겪게 되는 사회모순을 그린다. 엄마아버지가 두 명이 되는 기구한 운명을 팔자로 받아들이면서도 장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 그 끈질긴 생명력이 꼭 우리 어머니들 같다. 사실 우리도 어린 시절 살어름판 같은 길에서 위태했고, 이름없는 들풀 신세로 산그림자 드리운 저녁나절의 냇물가에 처량하게 주저앉아있었지 않았던가 말이다. 어린 몽실이가 해방정국과 육이오 전쟁속에 굶주림과 모진 학대를 겪으며 자랐지만 야학 최선생이나 새어머니 북촌댁, 동네 동무들이 그를 키웠고 삶을 견디게도 했으니 우리 또한 지난날을 생각하면 다 그렇게 컸다싶다.
세상이 최고조로 사납고 야만적일 때에 희망이 온다. 몽실에게도 희망의 빛이 왔다. “최선생의 ‘인생의 길’이란 말을 들은 뒤, 몽실은 곰곰이 생각하는 아이가 되어갔다. 자기의 일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일도 아버지의 일도, 이웃의 살아가는 모습도 눈여겨봤다. 야학에도 부지런히 나갔다.”(80쪽) 몽실은 이렇게 안목을 넓히면서 스스로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앞에서 말한 인민군여자 최금순과 같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성장한다. 그리고 점차 자존감을 지닌 실한 아이로 커간다.
✿수원댁: 몽실아, 그렇게 너 혼자 있어도 무섭지 않니?
✿몽실이: 괜찮아요. 무서운 건 신세지는 것보다 나요.
✿수원댁 : 어머나, 넌 어른처럼 말하는구나.
✿몽실이: 아이들이라도 그런 건 다 알아요.(135쪽)
몽실은 점차 불의한 사회구조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몽실은 줄곧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댓골 어머니 생각, 돌아가신 새어머니 생각, 그리고 아까 시장에서 보았던 미군병사와 여자를 생각했다. 왜 그래야만 되는 걸까? 왜 여자는 남자에게 매달려 살아야 하는 걸까?” (184-185쪽) "그러지 말아요. 누구라도 배고프면 화냥년도 되고 양공주도 되는 거에요." (190쪽) 그리고 전쟁과 인간의 본성을 체득적으로 깨우친다. "전쟁은 높은 사람들이 일으켰지만, 그 피해는 모두가 가난하고 착한 백성들만이 떠맡아 버린 것이다."(240쪽) “어른들은 먹고사는 외에 좀 더 즐기기 위해 남을 해친다. 어떤 방법이라도 가리지 않고 많이 차지하는 것을 좋아했다. 육이오란 전쟁도 똑같은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어른들은 개인끼리 빼앗고 뺏기는 것부터, 좀 더 크게는 집단끼리 빼앗는 것이었다. 더 크면 나라끼리 빼앗기 위해 싸움이 일어난다.”(265쪽)
그렇다. 인간의 욕심은 전쟁을 낳고 전쟁은 영영 치유 못하는 상처를 낸다. 얼마나 많은 몽실이가 그 몹쓸 전쟁으로 고난의 세월을 견뎌 살아야 했던가. 문득 신동엽의 시 <여자의 삶>이 떠올랐다. “빨래를 한다, 여자는 양말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 전장에서 살육하고 돌아온 남자의 마음./ 그 피묻은 죄까지 그 부드러운 손길로/ 그 신비로운 늪에서 빨래를 시켜 준다./ 쇠붙이도 탄도탄도/ 그녀의 무릎 밑에 와선 흐물흐물 녹아나리는 물.” 전쟁에 미친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희망은 이름없는 화평케 하는 사람들(peacemaker)의 존재이다. 전쟁피해자로 모진 고초를 다 겪으며 살았지만 인간의 얼굴을 버리지 않고 이웃을 껴안으며 독재의 세월을 건너온 수많은 몽실이들에게 박수를! 이제 70을 넘긴 이 할머니들에게 모두 경배하시라.
2000년에 <몽실 언니> 개정판을 내면서 권정생 선생이 한 이야기는 충격이다.
“《몽실 언니》는 1981년 울진에 있는 조그만 시골 교회 청년회지에 연재를 시작해서 3회쯤 쓰다가 《새가정》이라는 교회 여성잡지에 옮겨 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열 번째 꼭지까지 썼을 때 갑자기 연재가 중단되었습니다. 두 달을 쉬고 나서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용은 아홉 번째와 열 번째 꼭지에 나오는 인민군 이야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이상 잡지에 싣지 못하게 한 것을, 앞으로 잘못 쓴 것은 모두 지울 테니까 계속 연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문화공보부에 사정을 해서 겨우 허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열 한 번째 꼭지는 원고지 열 장 분량이 잘려 나간 채 연재가 되었습니다. 잘려 나간 부분의 내용은 인민군 청년 박동식이 몽실이를 찾아와 통일이 되면 서로 편지를 하자고 주소를 적어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자 그 뒤부터는 이야기 줄거리까지 조금씩 고쳐 써야만 했습니다. 박동식이 후퇴를 하다가 길이 막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와 빨치산이 된 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몽실이한테 보낸 편지엔 이런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몽실아, 남과 북은 절대 적이 아니야. 지금 우리는 모두가 잘못하고 있구나……"
몽실이가 편지를 받아 읽고 나서 주저앉아 흐느끼면서 최금순 언니, 박동식 오빠를 부르는 대목도 모두 지워야 했습니다. 그러고는 난남이를 양녀로 보내고 나서 삼십 년을 훌쩍 건너뛰어 부랴부랴 이야기를 끝내야만 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1천장 분량으로 쓰려고 했는데 겨우 7백장으로 끝을 맺게 된 것입니다.”
주인공 몽실이의 힘은 무얼까? 포용력은 아닐까. 스스로 강하지 않지만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키우는 열린 심성의 소유자인 몽실에게는 새엄마도 친엄마도 친동생도 이복동생도 껌둥이 아이도 인민군도 다 껴안아야할 대상이다. 자본주주의 속성에 물든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에 몽실이만한 순정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다음은 자존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존을 지키고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몽실에게서 느꼈다. “몽실은 아주 조그만 불행도, 그 뒤에 아주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실은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라나면서 몸소 겪기도 하고 이웃 어른들에게 배우면서 참과 거짓을 깨닫게 됩니다. 아주 조그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모두 몽실 언니한테서 그 조그마한 것이라도 배웠으면 합니다.” 1984년 <몽실언니>초판을 내며 권정생 선생이 쓴 머릿글의 일부이다.
한 달이 넘도록 온통 천안함 관련 이야기들 뿐이다. 갑갑하고 슬프다. 남북대치의 분단상황은 우리 사회가 자랑하는 성취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밤새워 공부에 매달리고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고 다들 더 잘살겠다고 몸부림친다. 황장엽씨 살인미수사건 발표, 일방적인 전교조 명단공개, 급격한 남북한의 관계악화, 지방선거용 친북좌파 색깔공격 등에서 불길한 징조를 느낀다. 이런 때에 <몽실 언니>를 읽었다. 그리고 <몽실언니>의 마지막 문장처럼 오, 하나님하면서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다. 우리가 통일운동에 나서는 자세가 몽실이 같기를 바란다. 자신에게 철저하면서도 남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우리가 되자. 자랑하지 말고 진실하게 이웃들을 껴안자. 아주 작은 구습부터 버리자. 세상을 바꾸는 작은 일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자. 그것이 이 척박한 땅에 통일세력을 모으는 가장 빠른 길이라 믿는다. 그 일을 시대가 우리에게 맡겼다고 생각하니 행복하다. 내 할일을 깨우쳐준 <몽실언니>가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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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바쁜 시간 쪼개어 참 좋은 글을 써 주신 윤권사님께 감사와 감동의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남과 북은 절대 적이 아니야~" 누가, 무엇이. 적으로 만들어 왔는지...
권정생 선생님, 윤여진 권사님, 김태선 교우님, 벼리 그리고 모두 모두... 몽실언니를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전감목 서울 회의있어 참석못했습니다. 잘 했으리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