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5. 큐티
마태복음 3:1 ~ 1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관찰 :
1) 세례 요한의 등장
- 1절.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 “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기로 하신 바로 그 때입니다. 주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단 한마디의 말씀도 헛되이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시간입니다.
- 3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이사야가 예언한 사람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지가 곧 “주의 길을 준비하라”입니다. 세례 요한이 큰 자인 이유는 그가 예비하여 오시게 되신 분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오실 길을 준비함에 있어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목숨을 다했습니다. 그것도 30세 초반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의 영성의 대단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 4절.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 세례자 요한의 스타일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가죽 허리띠를 띠었습니다. 그가 먹는 것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스타일은 장차 하나님이 보내시는 엘리야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물려줌으로 그의 리더십을 이양했습니다. 그 후 낙타털 옷을 입고 가죽 허리띠를 두르고 광야에서 질기고 질긴 메뚜기(식물성 메뚜기로 쥐엄 열매 껍질을 가르킨다. 곤충 메뚜기가 아니다)를 씹어먹고, 석청(이것도 벌꿀이 아니라 대추야자가 땅이나 돌쩌귀 사이에 떨어져 자연 발효되어 꿀이 된 것을 의미한다)을 먹었습니다. 이런 스타일은 그가 엘리야의 후예임을 유대인이 알아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연출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스타일을 일부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세례 요한 신드롬과 메시지
- 2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동일합니다. 천국의 도래에 대해서 선포하고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두려움이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
- 5절.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 세례 요한 신드롬이 일어났습니다. 30대 초반의 청년이 전하는 메시지에 왜 유대인들은 열광을 한 것일까요? 그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크게 두 패로 나뉘었습니다. 로마에 빌붙어서 자신들의 자리보전하는 것을 위해 종교를 이용해 먹던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첫째 그룹이었습니다. 둘째 그룹은 자신들만 깨끗한 척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 두 그룹에 대해서 누구도 도전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그들에 대해 힐랄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기에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이 없는 로마의 압제 하에서 한 줄기 소망을 보게 된 민중들이 형성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세례 요한의 목적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무리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사역한 곳은 요단 동편의 베레아 지역으로 엘리야가 승천한 곳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을 때, 세례 요한의 세례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을 통해서 볼 때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온 유대인들 디아스포라에 퍼질 정도로 강력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6절.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들은 이들에게 회개의 영이 임하고 죄를 자복하고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 7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이 세례 베푸는 광경을 보고자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여든 것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속셈을 간파한 세례 요한은 그들의 중심을 드러내고자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얽어매는지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이 아닌 정형화되고 율법적인 말씀만 증거하는 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 8절 ~ 10절 .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급진적이고 통렬한 메시지였습니다. 유대인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다면 그런 것을 생각하지도 말라고 세례 요한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이 임박했기에 긴급하게 반응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 메시지의 대상은 많은 백성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하나 될 수 없는 양립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이들 두 세력을 동시에 싸잡아서 잘못을 지적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두 부류가 다 잘못을 하고 있었지만, 이 들 모두의 잘못을 한꺼번에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세례 요한은 그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하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너무나 놀라게 되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 공동전선을 형성하게 됩니다.
3) 내 뒤에 오시는 이
- 11절.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에게 집중했습니다.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 그리스도. 그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그 사역에 중심을 놓고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위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그러나 세례 요한이 본 것은 재림의 모습이 더 강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말씀을 통해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지만, 메시야에 대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초림 예수와 재림 예수의 모습을 혼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잘못이거나 실수라기 보다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석되도록 남겨진 메시지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일 옳을 것입니다. 나중에 감옥에 갇혀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고,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은 뒤에 세례 요한은 그 상황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르침 :
1) 오늘날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생각은 멈추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당시보다 더 더 더 말세에 임박한 이 시기에 교회만 다닌다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일지라도 아브라함을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면 오늘날도 교회 출석하고 헌금 좀 내고 그렇게 신앙생활 한다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당연시 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의 때를 피할 수 없고 이기는 신앙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2) 사역자로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비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례 요한의 사명이었고, 예수님의 사도들의 사명이었고,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3) 세례 요한의 메시지의 내용은 사실은 마땅한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다 벗어주라가 아닙니다. “먹을 것이 있는 자”도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세리”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는 것입니다. “군병”은 사람에게 괴롭게 하지 말며 억울하게 누명을 씌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는 월급을 족한 줄로 알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너무나 마땅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땅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 시대에 그것을 건드리는 것이 급진적이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때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4) 다시 오실 주님, 심판주가 되실 주님을 두려워함이 회개자의 중요한 태도입니다. 주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도 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회개의 열매가 맺어진 다음의 상황입니다. 회개의 열매 없이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적용 :
1) 말씀을 증거하는 자로서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집중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나의 메시지의 핵심과 나의 증거하는 삶의 핵심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향력있는 삶의 핵심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을 잘 위로하고, 도와주고, 좋게 좋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죽여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늘 나 중심의 생각과 삶이 여전히 나의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를 보여줍니다.
2)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의 도전입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봅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 통치되고 다스려질 것이기에 주님을 경외합니다. 주님을 소망합니다. 천국이 이미 시작되었고 이제 완성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