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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그여자 이야기
"여기, 부탁한 것."
"오~역시 이영지!!! 퍼펙트 그 자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았어, 알았어~"
자신의 말은 들은 듯 만 듯 건성건성 대답하곤 몇 장 되지 않는 A4용지만 뚫어져라 보는 남자, 윤정우.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마를 찡그려 보지만, 이내 포기의 한숨을 내쉬고 만다. 무려 10년을 알고 지내는 동안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는 항상 그랬다. 설렁설렁 대충대충. 그 무엇도 재미가 없다는 듯 공부도 과제도 심지어는 여자들까지도 그렇게 설렁설렁 대하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적은 상위권. 저렇게 대충 하는 듯 보여도 성적이 나오는 것을 보면 늘 전교 50등 안에는 들었다.
정말 기를 쓰고 노력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기분나쁘도록 못마땅한 사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를 못마땅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10년이라는, 소꿉친구라 해도 좋을 긴 시간동안 보아온 모습이 새삼 못마땅할 이유는 없었으니.
"그럼 난 먼저 갈게."
"벌써 가려고?"
"있어봤자 딱히 할 일도 없잖아."
"나랑 놀면 되잖아. 받은 것도 있으니 내가 오늘 하루 이영지한테 봉사한다!"
"됐어. 너랑 놀 바에야 도서관에서 책이나 보고말지."
"아~차가운 여인이여. 언제쯤이면 나에게 마음을 줄런지."
"…작업은 통할 사람한테나 걸어."
"작업이라니! 항상 널 사랑하는 내 마음을 어떻게 작업으로 매도하냐? 이 오빠 상처받았다, 이영지."
"……"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이것.
그는 여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그 말을 남용한다.
10여년동안 수차례 들어온 말이지만, 저렇게 달콤한 말은 아무리 들어도 면역력이 생기질 않아 늘 설레곤 한다.
"그런 말은 네 여자친구한테나 하고. 나는…간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킬까, 아무렇지 않은 듯 서둘러 한마디 뱉어놓고는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제서야 나오는 안도의 한숨.
입에 발린 말일 뿐이란 것을, 다른 여자한테 늘상 뱉는 인사말 같은 말이란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심장은 주책맞게 왜 이리 두근대는지.
"…바보 같긴."
자꾸만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터벅터벅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인다. 정혜영. 안지는 겨우 3년이 조금 넘었지만 너무도 좋은 친구.
"영지야!"
"어, 혜영아."
"어디 갔다와?"
"아, 그냥 좀. 근데 왜?"
"저기…나 부탁이 있는데."
"…부탁?"
*
수업 없는 토요일 오후 1시…5분 전.
현재 난 별 다섯개짜리 호텔 커피숍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유명한 이름만큼이나 고급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커피숍 안에는 나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자 혹은 여자, 그도 아니면 한쌍의 남녀 커플이 각각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외모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분위기가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것. 불편함을 띈 예의바른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커피숍 안을 또다른 남자가 허둥지둥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실례합니다. 혹시 정혜영씨…?"
"……."
"아닌…가요?"
"아! 마, 맞아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하는 남자를 보며 난 그제야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분명 나를 향해 오는 것을 봤으면서, 그 짧은 시간에 또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나보다.
훗 하고 미소를 지은 남자가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다.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아뇨. 아직 약속시간 전인걸요. 제가 일찍 나온 거예요. 신경쓰지 마세요."
"이렇게 이쁘신 분이 기다릴 줄 알았더라면 과장님한테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찍 나올 걸 후회됩니다. 하하하."
"…과찬이세요."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이미 듣고 나오셨겠지만, 제 이름은 강형우입니다. 펀드매니저죠."
"아, 저는 이…정…혜영…이예요."
평소같지 않게 더듬더듬 이름을 내뱉었다. 정혜영. 내것이 아니지만, 현재는 내것인 이름.
지난주, 너무나도 간절히 애원하는 혜영의 부탁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현재 그녀 대신 맞선에 나오게 됐다. 원래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까지 내 부탁을 너무나 흔쾌히 들어주던 혜영이었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될 것이라던 혜영의 말을 떠올리며 예의바른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서 그 손님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요?"
"가불은 안될까요."
"풋."
일을 하다 겪었던 일이라며 해주는 얘기를 들으며 난 또다시 풋하고 웃어 버렸다.
그가 해주는 이야기마다 어찌나 우스운지, 처음 커피를 마시다 사레에 걸린 후로는 물도 입에 대지않고 있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이만 일어날까요, 혜영씨?"
"네? 아, 네."
깜짝 놀라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시계를 봤다.
세시 반.
남자가 들려주는 얘기를 듣다보니 어느덧 두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던 것이다. 아직 얘기는 꺼내보지도 못했는데.
낭패다 라는 생각에 허둥지둥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어느샌가 계산을 마친 남자는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시작해야할까. 아니, 일단은 사과를 먼저 하는게 나으려나….
"저…저기 강형…"
"이영지?"
"…유…윤정우???!!!!"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머리 속으로는 얼른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한다는 생각 뿐이었지만, 그건 단지 생각일 뿐. 난 어느새 내 앞에 서있는 정우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너 거기서 뭐하냐?"
"어? 저…저기 난 말이야. 그게…."
왠지 화가난 듯한 얼굴의 정우의 물음에 난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허둥거리기만 했다. 누군가 지우개로 내 머리 속을 지워버리기라도 한 듯, 머리 속에 새하얘져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마 그 때 들린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아마 하루종일 그렇게 허둥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 정우야!"
"…예희?"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찾아온거야? 너무 기쁘다!! 아니, 그러지 말고 우리 들어가서 얘기하자. 안그래도 너한테 하고싶은 말이 있었는데~"
"자, 잠깐! 난 지금 그럴 생각이…"
"잠깐이면 된다니까? 얼른 가자~"
귀여워보이는 여자의 손에 붙들려 정우는 방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커피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날 바라보는 눈빛에 간절함이 묻어나고 있는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기뻐해야할지 그만큼 날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에 슬퍼해야할지.
알쏭달쏭한 기분에 멍하니 보이지도 않는 커피숍 안쪽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영지 씨?"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니, 방금전까지 내가 처했던 상황이 순식간에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은 '망.했.다.'
하긴 바보가 아니고서야 한 방금 전 상황을 보고 내가 '정혜영'이 아니란 걸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기…죄송합니다!!"
내 입을 타고 나온 목소리가 꽤 컸기에 지나가던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평소라면 얼굴 팔린다고 후다닥 도망을 갔을테지만 난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아무리 혜영의 부탁을 대신하여 나온 것이라 하나 상대방을 속인 것은 어디까지나 나, 이영지다. 부끄러운 마음에 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고, 내 허리는 점점 90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한 내 모습이 우스웠던건지 아니면 황당했던 건지 '풋'하는 웃음소리가 내 귀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쿡쿡쿡. 알았으니 고개 들어요, 혜영 아니 영지씨. 쿡쿡."
"저기…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왕을 배알하는 신하마냥 천천히 고개를 들고,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는 남자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의 기분이 풀린 것은 다행이었지만, 엄연히 부탁을 받은 입장으로서 혜영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방긋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니 내 부탁이 받아들여질 것 같아 슬슬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아뇨."
"아, 네. 정말 고맙습…네에?????"
"용서해주기 싫다고요."
"네…네에…?"
순식간에 내 얼굴은 울상이 되어버렸다.
인심 좋게 웃고 있던 사람의 입에서 차마 거절의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고 또 더욱 실망스러웠다.
"풋. 장난이예요."
"……"
장.난.
날 놀리려는게 분명한 그의 대답에 내 얼굴은 또다시 순식간에 바뀌었다. 여러번 만나본 사이도 아니고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어찌 그런 장난을 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마 내가 잘못한 입장이 아니었다면 화를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난치지 말아줬면 좋겠네요. 조금 불쾌해요."
"정혜영씨가 아닌 이영지씨를 만나게 된 저는 더욱 불쾌한데요."
"…그건 죄송해요. 할 말 없습니다."
그의 말 하나로 입장은 또다시 바뀐다. 펀드매니저라더니 정말 말 하나는 기똥차게 잘하는 남자였다.
"그런데 배고프지 않아요? 점심도 못먹어서 난 배 무지 고픈데."
"저는 그다지…."
"설마 나 혼자 밥 먹으라는 얘기는 아니죠? 들을 얘기도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죠."
"…네에…."
죄인인 나로서는 그저 따를 수 밖에.
*
"흠…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네. 정말 죄송해요. 혜영이가 요즘 실습이다 뭐다 굉장히 바쁘거든요. 오늘도 다음주 모의수업 준비 때문에…."
"그런데 아까 그 남자… 윤정우라고 했나요? 그 남자랑 영지씨는 무슨 관계예요?"
"네???"
주절주절 열심히 혜영의 변명을 하고 있는 내 귀로 들려온 뜬금없는 질문에 난 당황해버렸다.
단 한 번 들었을 뿐인 정우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차마 어떤 관계인지 물어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더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런 내 심정을 알면서도 대답을 요구하듯 날 빤히 쳐다보는 남자를 향해 더듬더듬 대답을 하는 내 모습이었다.
"치…친구…랄까나."
"친구면 친구지, 친구랄까나는 뭐예요?"
"그건…."
"혹시 영지씨 그 남자…좋아하는 건가요?"
"네? 아…아니…네에…."
대체 난 왜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얘기하는 것일까.
남자의 물음에 대답을 하는 내내 이러한 질문이 내 머리 속을 맴돌았지만,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그의 말에 긍정을 하고 있었다.
가족도, 혜영도, 정우도 모르는 내 감정을 처음 보는 남자에게 얘기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천주교가 아닌 탓에 잘은 모르겠지만, 고백성사를 하는 기분이라는게 바로 지금 내 심정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군요."
"네?"
"나 영지씨가 좋아지고 있었는데."
"네에????"
오늘 눈 앞의 남자한테 내가 한 대답의 대부분은 뒤에 물음표가 붙느냐 마침표가 붙느냐만 달랐지 '네'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남자는 입담이 좋았고, 또 나를 꽤나 당황시켰다.
"일단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테니 먼저 가보겠지만, 무조건 거절할 생각은 말고 한번 생각해 줘요."
"……"
"조만간 연락할게요."
"……"
"아. 그리고 영지씨 친구분…혜영씨 걱정은 말아요. 내가 집에 잘 얘기해 줄테니."
"네. …고마워요."
"고마우면 날 선택해 주던지요."
"……"
마지막까지 날 당황스레 만들고 남자는 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차가 있음에도 날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지만, 난 오히려 그게 더 고마웠다. 그 남자의 말처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또각또각. 기분 좋게 울리는 구두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윤정우. 10년지기 소꿉친구이자 내 10년지기…첫사랑.
정말 '징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오랫동안 마음을 숨겨오면서도 이제까지는 매일 얼굴을 볼 수 있음에 만족할 수있었다.
하지만…최근들어 점점 힘이 듦을 느낀다. 일년에 열번도 넘게 여자친구를 바꾸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내 감정이 들킬까 조마조마하는 마음도.
"차라리…포기해버릴까."
그러면 나도 편하고, 정우도 편할텐데. …포기해버릴까? 그럴까 정우야?
"뭘 포기한다는 건데?"
"…!!!!"
내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목소리가 답해오자 난 걸음을 우뚝 멈췄다.
너무도 절묘한 타이밍 탓에 환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도 익숙한 이 향기는 현실이라 알려주고 있었다.
"대체 뭘 포기한다는 거냐?"
답답하다는 듯 캐묻는 목소리를 들으며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항상 미소를 짓던 입가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장난스럽게 빛나던 눈동자도 현재는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머리 속에서만 맴돌던 그의 이름이 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정우야."
꽤 오랜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했고, 난 차마 대답을 못한 채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답답한건지, 이내 화가 난듯한 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뭘 포기하는 거냐고 물었어."
"……"
"왜 대답이 없어? 대답해, 이영지!!"
처음 듣는 정우의 화난 음성. 10여년을 알아왔지만 지금처럼 화가난 목소리는 처음이라 난 멍하니 그의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왜 대답이 없는거냐, 이영지."
소리는 줄었지만, 여전히 화를 참는 듯한 정우의 목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그는 대체 왜 화를 내는걸까.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 혼자 품어왔던 마음 나 혼자 포기해버린다는데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거라고?
"상관…없잖아."
"정말…그렇게 생각하냐? 상관 없다고?"
"……"
간절하기까지한 정우의 모습이 낯설어, 난 선듯 입을 열지 못했다.
이건 왠지 꼭…날 좋아하는 것 같잖아. 아닌데…그건 정말 아닌데….
마음 깊은 곳에서 생기려는 희망을 애써 가라앉히려는데,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너무도 평이한 정우의 물음이 들려온다.
"아까 그…남자는 누구냐."
"……"
너야말로 아까 그 여자는 누군데.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물음을 꾹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호텔 커피숍에서 정우의 이름을 당당히 부르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귀여운 외모의 여자. 이름이…예희라고 했었지.
한 번 스치듯 들었을 뿐인데 똑똑히 기억이 나는 이름을 중얼거리며 훗하고 웃어버렸다.
정우의 이름을 한 번 듣고도 기억한, 강형우라는 남자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내 모습이 너무도 우스워서. 슬퍼서.
"…이것도 상관 못하는 거냐."
"…먼저 들어갈게."
"이영지!!!"
조금 더 있었다가는 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쳐버릴 것 같아서 중얼거리듯 내뱉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그가 내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난 내 팔을 꼭 쥐고 있는 정우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릿할 정도로 세게 쥔 탓에 팔이 아파왔지만, 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아프다. 아파, 정우야."
"미, 미안."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정우는 서둘러 내 팔을 놓았다.
넌 너무도 쉽게 날 붙들고 또 너무도 쉽게 날 놓는구나.
내 팔을 잡았던 정우의 손이 내 피부라도 되는 듯, 너무도 허전한 팔을 멍하니 보다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런 내 뒤로 뭐라 중얼거리는 정우의 목소리가 들린 듯 했지만,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신경쓰고싶지 않다. 모두…포기하고 싶었다.
* * * * *
part 2. 그남자 이야기
"정우야."
나직한 목소리가 앙증맞은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와 내 귓가에 다다랐다.
평소였다면 그 여운을 느끼기 위해 가만히 눈을 감아보았을테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그 여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무심한 척,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왠지 모르게 거슬리던 말을 확인해 볼 뿐.
"대체 뭘 포기하는 거냐고 물었어."
"……"
"왜 대답이 없어? 대답해, 이영지!!"
갑작스레 터진 내 고함에 영지의 두 눈은 동그랗게 커졌다. 여태껏 그녀의 앞에서는 소리를 높여본 적이 없었으니 그녀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많이 놀랐을까 싶어 조심히 얼굴을 살피니, 다행히 진정된 모습이다.
화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한번 그 이유를 물었다.
"왜 대답이 없는거냐, 이영지."
"상관…없잖아."
"정말…그렇게 생각하냐? 상관 없다고?"
"……"
입술을 꾹 깨물고 내 눈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양 어깨를 잡고 정말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냐고, 정말 너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연인이 될 수 없다면 친구라도 되어야 했기에.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았기에.
"아까 그…남자는 누구냐."
"……"
"…이것도 상관 못하는 거냐."
"…먼저 들어갈게."
"이영지!!!"
"…아프다. 아파, 정우야."
"미, 미안."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의 손을 쥐었지만, 아프다는 그녀의 한마디에 놓아버리고 만다.
그녈 아프게 했다는 생각에 내 손만 멍하니 바라보는 날 냉정히 스쳐 들어가버리는 영지.
"젠장. 대체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냐…이영지."
오늘따라 너무도 차가운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
*
"뭐하냐."
"…안녕, 정우야."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또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친구로라도 그녀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든 아슬아슬한 이 관계가 해결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잘 지냈냐?"
나는…겁쟁이니까. 그녀를 떠날 수 없는 겁쟁이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듯 이렇게 인사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나야 뭐, 평소와 같지."
"너무 건강해서 탈인건가?"
"훗. 그렇지."
"저기…지난번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카페 안을 울리는 벨소리에 난 하려던 말을 멈췄다. 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새로운 벨소리가 낯설었다.
"잠깐만, 정우야. 네…형우씨."
"…!!!"
그 남자다.
영지의 입에서 나오는 낯선 이름이 지난번 호텔에서 봤던 그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같지 않게 통화를 하면서 자리를 피하는 그녀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본능적이었달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때 봤던 남자와 영지의 분위기가 너무도 친숙해 보였기에, 그녀가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미안. 무슨 말 하려고 했었어?"
"아니, 그냥 잘 지냈냐고. 얼굴이 좀 수척해 보여서…"
"어제 잠을 좀 설쳤더니 그런가 보네."
"어제 또 커피 마셨냐? 밤에는 마시지 말라니까."
"응…그럴게."
"저기…그런데…아까 전화는 누구…냐…?"
"아…그냥…아는 사람."
"그래……."
"저기 정우야. 나 다음 수업 있어서 먼저 가볼게."
"어, 그래. 가라."
왠지 허둥대며 나가는 듯 보였지만, 난 그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머리 속이 너무도 복잡했다.
사실, 내가 영지를 좋아하고 있음을 안 것은 고작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군대를 갔다 왔고, 그 후에는 처음 경험해보는 대학생활에 정신이 없을 즈음.
어느 날엔가 영지가 생전 처음 보는 남자랑 카페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묘해져 난 몰래 그들의 뒤에 앉아 대화를 엿들었다.
평범한 대화의 내용. 원래부터 알던 사이였는지 사소한 일상이야기가 오고갔고, 어느 순간 남자는 영지에게 고백을 하고 있었다. 듣는 내가 낯간지러울 정도로 너무도 간절히.
잠시 동안의 침묵. 당황스러운 듯 기침을 하던 영지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까지 나 역시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윽고 나온 대답은, '죄송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남자는 침묵했고, 영지는 말없이 일어나 카페를 나갔으며 나는…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대체 왜 내가 안도를 하는 거지? 영지가 저 남자와 사귀지 않는게 왜 안도할 일인거지?
문득 든 의문에 한동안 난 고민에 빠졌었고, 꽤 오랜 고민 끝에 깨달을 수 있었다. 나 윤정후는 이영지를 여자로서 좋아하고 있다는 걸. 너무도 오랜 시간동안 친구로 지내왔기에 그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일 뿐, 사실은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 이후로 영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만났고, 늘상 치는 장난을 쳤다.
다만 그 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예전만큼 여자를 가까이하지는 않는다는 것과 영지에게 내 마음이 들어간 장난을 치는 횟수가 늘었다는 것.
자칫 친구로서의 관계마저 깨져버릴까, 겁이 나서 차마 고백은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그 때 이후로는 영지에게 접근하는 남자도-물론 내가 옆에서 바리케이트를 쳤지만- 영지가 관심을 가지는 남자도 없었기에 우린 여태껏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며칠 전, 영지가 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언듯 보기에도 너무나 잘나 보였던 남자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학생인 나와는 달리 능력있어보이는 직장인.
영지에게 관심을 보이던 그는 지난번 그 남자처럼 머뭇거리지도, 또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건 남자로써,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로써 드는 확신이다.
그렇다면 영지는…? 과연 지난번처럼 단호히 거절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글쎄. 글쎄…였다. 예전이라면 단호하게 '아니'라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 2년 전 내 마음을 깨달은 이후로는 그녀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그 남자의 접근을 영지가 허락한다면…?
"절대 안돼!"
카페가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며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기분 나쁜 영상이 머리 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영지와 그 남자가 다정히 서로를 껴안고 있는 그런 모습. 절대 안된다는 생각만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내가 어떻게 그녀의 옆을 지켜왔는데. 그 긴시간동안 그녀에게 고백하지 않고 지켜온 이유가 대체 무엇 때문인데.
이대로 그녀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아무 것도 해보지 않은 채, 고백조차 하지도 않은 채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뺏길 수는 없었다.
카페 문을 박차고 인문대학 건물로 뛰어갔다. 방금 수업이 있다고 했으니까, 분명 인문대학 강의실에 있을 것이다. 휴대폰을 열어 전화를 걸었다.
-조심스럽게 얘기할래요~용기내 볼래요~♪
내가 선물해준 컬러링이 울렸다.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했던 내 마음을 좀 알아주라고, 내가 그런 마음으로 보내는 거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보냈던 노래. 정작 보내놓고서 고백을 하는 것은 2년 후가 되어 버렸다.
바보같은 내 자신에게 자조하면서도, 아직까지 그녀가 이 노래를 컬러링으로 설정한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닐까 하는…그런 희망에 가슴이 설렜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젠장!"
주인의 부재를 알리는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난 과감히 휴대폰을 닫았다. 왜 하필 지금 전화를 받지 않는 건지.
영지의 시간표를 알아내기 위해 과사로 달려가면서도, 포기를 못해 또다시 전화를 건다.
-네, 이영…
"이영지! 너 지금 어디냐!!"
-이영지씨 휴대폰입니다.
"…누구??"
-지금 영지가 휴대폰을 두고 가서, 친구인 내가 대신 받았는데. 혹시…윤정우?
"…정혜영?"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름을 내뱉었다.
분명 수업 받으러 간다던 사람이 친구한테 휴대폰을 맡기고 어딘가에 갔다는 사실도 못마땅했지만, 그 친구가 정혜영이란 사실은 더욱 못마땅했다. 영지가 그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이 다름아닌 정혜영 그 여자 때문이었으니.
사실, 영지는 나와 우연히 만난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내가 그 커피숍에 간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난 그 날 그녀가 커피숍에 갈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우연히 혜영의 통화내용을 들었는데, 하필이면 그게 자기 대신 맞선에 나가달라고 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어이 없는 마음에 피식 웃던 내가 심각해진 것은 혜영의 입에서 나온 '영지'라는 이름 때문. 그 이름을 듣고서야 난 그녀가 바로 영지의 친구 '혜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속하게도 약속시간만 언급하는 혜영에게 대체 그 장소가 어디냐고 묻지 않으려 어찌나 애썼던지. 결국 두시간동안 시내 주요 호텔 커피숍을 헤매고 다니고서야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예상치 못했던 인물때문에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뼈아픈 기억에 새삼 속이 부글거렸지만, 일단은 영지의 행방을 아는 것이 먼저였기에 난 혜영이 있다는 강의실로 달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여어~왔어?"
"영지는?"
"내 인사는 막 씹어대시는구만."
"장난칠 시간 없어. 영지 어딨냐?"
"글쎄에~어디에 있을까나~?"
"장난칠 시간 없다고 했지? 당장 어디 있는지 말해!"
"…어떤 남자를 만나러 갔어. 이름이…강형우랬던가?"
"…!!!!"
"장소는, 학교 정문 앞 카페 '모카'. 빨리 가보는 게 좋을거야. 뭔가 단단히 결심한 눈치였거든. 언듯 듣기로는 고백을 하러 간다나 뭐라나~"
"…젠장!!!"
날 약올리듯 장난스레 말하는 혜영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영지를 찾고나면 반드시 한 대 쥐어박아 줄테다!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면서 강의실 문을 나가는 내 뒤로 "여자가 먼저 고백하게 만드는 남자가 제일 꼴불견이라지~?" 라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당연히 과감히 무시해버렸다. 카페로 달려가기도 벅차 죽겠는데 그 따위 말을 신경쓸 정신이 어딨단 말인가. 일단 지금은, 그 남자를 만나지 못하게 해야했다. 아니, 그 남자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해야했다.
"헉…헉…"
1km가 넘는 거리를 쉬지않고 뛰었더니 거친 숨소리가 절로 나왔다. 왜 하필 그녀석은 인대에서 제일 먼 이 카페에서 만나자고 한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맘에 들지 않는 녀석을 욕하면서 카페의 문을 열었다. 썰렁한 1층.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저 멀리 보이는 영지의 뒷모습과 녀석의…
"…저 자식이!!!"
"꺅!! 혀…형우씨!!"
확실히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중히 사내답게 한마디 하고 영지를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영지를 껴안고 있는 녀석을 본 순간 손이 먼저 나가버렸다.
저 멀리 나가 떨어지는 녀석의 모습을 통쾌하게 생각한 것도 잠시, 그에게 다가가 살피는 영지의 모습에 씁쓸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
"왜 아무 말이 없어? 대체 여긴 왜 온거야?"
영지의 물음에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의 용기는 어디로 가버린 건지 아무 말 없이 입만 꾹 다물고 있는 내 귀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괜찮습니다, 영지씨."
"정말 죄송해요. 이렇게 함부로 주먹을 쓸 애가 아닌데, 아무래도 무슨 오해가 있었나 봐요."
"하하하. 제가 영지씨를 덮치기라도 하는 걸로 보였나 보네요."
"그…그런…"
"이영지!!!"
몇년을 알아온 사이처럼,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그와 그녀.
둘 사이의 불청객이 된 것 같은 생각에 괜히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니, 깜짝 놀란 듯 날 쳐다본다.
"왜 그래, 정우야?"
"그러지 말고 일단 앉아서 얘기를…."
"당신은 빠져! 이영지! 너…그 남자한테 가지마!"
"…뭐?"
다짜고짜 꺼낸 내 말에 카페에 침묵이 흘렀고, 영지는 멍하니 날 쳐다봤다.
자꾸만 내 신경을 거슬리게하는 남자 때문에 무드없이 고백의 말이 나와버려 나 역시 당황한 상태였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고백을 시작했다.
"그 남자한테 가지 마라, 이영지. 내가 그 남자보다 훨씬 잘해줄테니까…나한테 와. 가지마, 영지야."
"너한테 가라니? 대체 그게 무슨…말이야?"
"좋아해. 아니, 사랑해. 친구로 지내는 것도 이제 지겹지 않냐? 10년동안은 친구했으니까, 이제는…연인하자."
"……"
"그러자. 그러자, 영지야. 제발."
"…바보. 난…10년 전부터 연인이었어."
영지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난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이렇게 한 번 안아보길 얼마나 꿈꿨었는지 모른다.
사실 강형우라는 녀석에게 주먹이 나갔던 것도, 제정신이 아니었다기 보다는 나도 못안아본 영지를 먼저 안아본 남자에 대한 괘씸함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녈 품에 안아 행복을 느끼고 있는 내 귀로, 소근소근 그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뭐가?"
"사실 나 형우씨 고백 거절하고, 너한테 고백하려고 했거든."
"…뭐??"
"그런데 이렇게 니가 먼저 고백을 해줬잖아. 너한테는 미안하지만…다행이야. 헤헤."
순간 내 머리 속으로 혜영의 말이 스쳐지나가는 것은 절대…우연은 아닐 것이다. '여자가 먼저 고백하게 만드는 남자가 제일 꼴불견이라지' 라고 했었나?
젠장맞을 정헤영!! 그 여자는 영지가 나에게 고백할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한심하게 혜영의 손에 놀아난 꼴이라니.
하지만…
"나도 다행이다. 여자가 먼저 고백하게 만드는 꼴불견은 되지 않아서."
그러니, 이번은 용서해준다. 정혜영.
* * * * *
Epilog. 그저 그런 이야기를 위해서…
"이로써 해피엔딩인가?"
카페 '모카' 2층 계단에 서 있던 여성이 한 커플을 만족스레 바라보고 있다. 너무도 행복하게 서로를 꽉 껴안고 있는 커플이 부러울만도 하련만, 그런 마음은 전혀 없는 듯 만족스레 미소를 짓고만 있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정혜영. 이영지의 절친한 친구이며, 윤정우가 이번만 용서한다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이거, 정혜영 양 아니신가?"
혜영의 옆으로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중얼거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분명 놀라움의 표시이긴 했지만, 그리 놀라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슬쩍 고개를 남자쪽으로 돌린 혜영이 피식하고 미소를 짓는다. 단정한 남자의 왼쪽 입가가 잔뜩 부풀어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혜영의 시선을 눈치챈 남자, 형우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러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투덜대기 시작한다.
비리비리 생긴 녀석이 손 힘은 좋아 가지고. 나랑 붙으면 단방에 나가 떨어질 주제에.
그렇게 한참동안, 그 누가 듣더라도 변명이란 것을 알 수 있는 말을 중얼거려보지만 정작 혜영은 흥미없다는 표정이다.
그런 그녈 향해 눈썹을 꿈틀한 형우가 이내 혜영을 향해 묻는다.
"그래, 이제 만족하시나?"
정우 혹은 영지가 들었다면 대체 무슨 소리인가 고개를 갸웃거릴 물음이었다. 아니, 그보다 맞선예정자인 혜영을 형우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부터가 이해되지 않을 상황이었다.
"물론."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물음에 긍정한 혜영은, 진심으로 기쁜 듯 입가에 더욱 짙은 웃음을 지었다.
그 누가 보더라도 만족스러워하는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은 형우는 투덜투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는게 기분 좋긴 하겠지. 보지도 않는 맞선을 대신 봐달라고 부탁한 거며, 그런 자리에 윤정우란 녀석을 나타나게 만든거며…"
형우의 말을 들어보자면, 정우와 영지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건이 바로 정혜영의 시나리오라는 뜻이었다.
바쁘다는 혜영 대신 영지가 맞선을 보러 나간 것, 정우가 혜영의 통화를 엿들었던 것, 영지가 커피숍을 나오려는 순간 둘이 딱! 마주친 것.
심지어 오늘 정우와 영지가 만날 때 기다렸다는 듯 걸려온 형우의 전화와 형우를 만나러 갈 때 영지가 휴대폰을 두고갔던 것 조차도.
그런 그녀의 치밀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형우였다.
"그런데 그 때 왜 윤정우란 녀석한테 정확한 장소를 가르쳐주지 않은 거냐? 내가 두시간동안 재밌는 애기를 주절거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냐?"
"원래 고생을 해야 더 간절해지는 법이거든."
"아무튼 저 치밀함이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형우를 향해 혜영은 상큼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형우가 이내 조심스런 말투로 슬쩍 입을 연다.
"그런데…정말 후회하지 않겠냐?"
"…뭐가?"
"윤정우란 녀석, 너 꽤나 좋아했잖아?"
애초에 혜영이 영지에게 접근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
정우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영지에게 접근해 얼굴도장이라도 찍어두자는 그런 계획이었던 것이다. 결국 정우와 영지의 마음을 눈치채고 이런 시나리오를 짜고 말았지만.
"너라면 윤정우란 녀석을 유혹하는 것도 어렵진 않았을텐데 말야."
"흠…나보다 더 아쉬워하는 것을 보니, 영지가 꽤나 마음에 들었나 봐?"
"뭐, 꽤나 매력적인 여성이긴 하더라고."
일부러 말을 돌리려는 혜영의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선뜻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는 형우다.
그런 그를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쉰 혜영이 이내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All or Nothing. 나에게 전부를 주지 않을 남자는 필요 없어. 그게 바로 내가 윤정우를 유혹하지 않은 이유야. 전부가 아닌 남자를 가질정도로 난, 가치 없는 여자가 아니거든."
당신 역시 그렇잖아?
그렇게 눈빛으로 묻는 혜영을 향해 형우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긴 전부를 줄 수 없는 여자를 위해 악역이 되는 건 너무 억울했다. 더군다나 저렇게 서로를 끔찍히 좋아하고 있음에야.
그저 그런 연애소설의 조연으로 만족하는 것이 저들을 위해서도, 또 그 자신을 위해서도 좋았다.
비록…좀 씁쓸하긴 하지만.
첫댓글 꺄아 - 해피엔딩이네요★ 영지도 정우도 어쩜 그리든 귀여운지 ><! 진작에 잘 들 좀 해볼것이지 10년이나 끌기는 - 헤헤.잘 읽고 갑니다! 아 전 개인적으로 형우군이 참 마음에 들덴데 , 츄릅 - 하하 ;; 동기야 어쨌든 혜영이 같은 친구하나 두면 참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하는 저랍니다. 허허.
저 역시 쓰면서 정우보다는 형우군이 더 맘에 들었다는*-_-* (단편만 아니라면 확~형우랑 연결해주고 싶었더랍니다 하하;;) 내가 봐도 정신없는 소설, 재밌게 감상해 주시고 답변까지 달아주시니 황송하네요^^ㅋ 항상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대단한걸요? 나에게 전부를 줄 수 없는 남자라면, 유혹하지 않는다 ? 하하 ! 명언입니다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 건필하세요
명언까지야*-_-* <-좋으면서 괜히 예의 차린다;; 가슴에 와 닿았다니 영광이예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항상 행복한 하루 되세요♡
잘봤습니다!해피엔딩이라 좋군요
왠지 모르게 단편들은 새드앤딩이 대부분인 것 같아서 저는 과감하게! 해피엔딩으로 끝냈습니다^^ㅋ 사실, 개인적으로 해피엔딩을 좋아하거든요.ㅎㅎ
이야, 표현이 정말 좋아요. 흔한 소재가 아주 예쁘게 표현된거 같아요 !!
모자란 글을 좋아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_-* 행복한 하루 되세요♡
ㅠㅠ 제가본단편소설중 제일 잘 쓰신것같아요>< 스토리도 탄탄 ♡
이런 과찬의 말씀을//ㅅ// 감사해요, 행복한 하루 되셔요♡
표현이정말멋진것같구요,스토이도좋아요.잘봤습니다^0^
좋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사실, 올릴 때 욕만 먹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스크롤라를 내리며 읽으면서 흔한 소재도 이렇게 신선한 소재로 바뀔수가 있구나..생각이 ㅎㅎ 해피엔딩이라 더 좋아요~
신선하다고 여기셨다니 정말로 다행입니다~ 나름 반전(?)으로 설정해뒀는데 아무도 놀라는 것 같지 않아 슬프던 중이었어요^^ㅋㅋ 댓글 감사합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정말정말 무지무지 재밌게 읽엇어요~~~ㅋㅋ또 이렇게 스토리가 탄탄한 소설도 얼마만인지, 정말 잘쓰셧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