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도는 항상 눈앞에 있다. 이를 목전(目前)이라고도 하고, 당처(當處)라고도 한다. 임제는 이를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 하여 서 있는 그 자리가 참된 진실의 자리라고 했고, 승조(僧肇)는 촉사이진(觸事而眞), 석두(石頭)는 촉목회도(觸目會道), 도오(道吾)는 촉목보리(觸目菩提), 마조(馬祖)는 입처즉진(入處卽眞)이라고 했다.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했다.
승조스님의 즉사이진 (卽事而眞) : 사물 그 자체가 진실이다.
승조스님의 촉사이진 (觸事而眞) : 부딪치는 매사가 모두 진실한 것이다.
석두선사의 촉목회도 (觸目會道) : 눈에 보이는 대로 도를 만난다.
도오선사의 촉목보리 (觸目菩提): 눈에 나타나 보이는 것 그대로가 모두 부처이다.
마조선사의 입처즉진 (入處卽眞): 서 있는 곳이 곧 진리이다.
남전선사의 즉이류이진 (卽異類而眞): 다른 종류도 곧 참이다.
황삼량선사의 수처임진(隨處任眞): 어디에서든지 항상 진실 그대로 임한다.
임제선사의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入處皆眞): 가는 곳마다 주체적으로 산다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이다.
동산선사의 아금독자주 처처득봉거(處處得逢渠 我今獨自主): 내가 지금 독자적인 주인공이 되니 곳곳에서 그를 만난다.
눈앞에 있지만 보기는 어렵다. 분별하여 분별된 모양을 취하기 때문이다. 분별하여 모양을 취하지만 않는다면 잠깐 사이에 저절로 돈오(頓悟)한다.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둘로 나누어 한 쪽은 좋아하고, 한 쪽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아하면 집착하게 되어 괴롭고, 싫어하면 미워하게 되어 괴롭다. 일체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허용하게 되면 번뇌가 생기지 않는다. 좋고 싫은 분별에서 번뇌와 괴로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눈앞에 이처럼 큰 도는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에 수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갈고 닦고 행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수행을 말하는 이유는 방편으로 어리석은 범부를 돕기 위해서다.
중생은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가려면 이렇게 하면 된다고 목표와 방법을 알려주어야만 그 길을 따라 쉽게 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파라미타를,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쪽도 저 쪽도 없다. 건너갈 저 쪽 언덕은 없다. 있다면 오직 지금 이 언덕만이 있을 뿐이다.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도를 가지고 도를 찾는다. 이미 그 언덕에 도착해 있으면서도 그 언덕에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이를 능엄경에서는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는다고 했다.
출처 : 법상 스님 목탁소리
첫댓글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마하살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