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엘리 (ELLIE)
- 모텔을 인수하고 합동근무 열흘이 지나자 전 주인 레나는 이제부터 우리가 단독으로 손님을 응대하고 입실에서 퇴실까지의 모든 과정을 수행해도 되겠다고했다.사무실에 놓인 고객용 커피머신을 돌리고 크림과 밀크,설탕,스플렌다 등등을 챙기는 그런 사소한 일도 생소했지만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재미도 있었다.특히 크레딧카드 단말기는 우리가 매번 긁는 금액이 정확히 적립이 되고있는지도 궁금했다.
- 그러나 여전히 어려운 문제는 전화예약이었다. 우리가 전혀 알아들을수 없는 발음으로 말을 하는데 이런 전화를 받을 때는 진땀이 나곤 했다. 그러나 이것도 이리 저리 돌려가며 상대가 피곤하지 않게 물어 보는 요령도 함께 터득해 갔다.
- 사무실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1, 200여평의 넓은 주차장이 1번 국도인 캐나다횡단 하이웨이와 이어져 하이웨이에서 바로 진입과 진출이 가능해 모텔 위치로는 최고였다. 그 하이웨이 너머로 피자헛이 자리잡고 있으며 왼쪽은 새벽부터 문을 여는 도넛집이 있고 오른쪽은 민가와 연결이 되어있었다.
- 어느날 아침 모텔을 한바퀴 돌다 모텔 오른쪽 민가에서 작업을 하던 그 집주인 엘리 (Ellie) 를 만난다. 그는 자기가 이 집 주인이며 남편과 같이 단 둘이 살고 있다며 자기는 그곳 제지공장에 나가는데 3년후에는 은퇴해서 집에서 화단이나 가꾸며 살 예정이란다. 그리고 매년 봄이면 자기 집 정원을 가꿀때 우리 모텔 오른쪽 공터까지 꽃을 심어 왔는데 금년에도 그렇게 해도 되냐고 물어왔다. 이런걸 불감청이언정 고소원 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우선 고맙다고 해놓고 그런데 비용은 얼마나 드냐고 하자 그건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자기가 취미로 하는데 돈을 받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는 시간이 많으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에게 부탁하라고 했다.
- 그 덕에 우리 모텔 오른쪽 공터는 봄부터 늦가을까지 갖까지 화초에서 울긋 불긋한 꽃 들이 쉬임없이 피어나 모텔 고객들을 기쁘게 해준다. 어느날은 남편과 함께 찾아와 사무실에서 한참을 이야기 했다. 처음 보는 한국인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남편 이름은 에디 (Eddie) 로 자기가 기억하기로 자신이 19살 때, 한국동란이 발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캐나다군으로 참전 하려고 하였는데 부모가 너무 반대해서 참전을 못 했다고 아쉬워 했다.
- 그 때 그의 부모가 그의 입대를 극구 반대한 이유는 집안의 유능한 일꾼 하나가 없어질까봐 그런것 같았은데 자신은 그 깡촌에서 매일 우유를 짜서 그 우유를 동네 집집마다 배달해 주는게 그렇게 싫었다고 했다. 결국 그의 깡촌 탈출은 그렇게 실패하고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토론토 야구팀이 미국의 미네소타 팀이나 뉴욕 양키스 팀과 대결할 때마다 미네소타나 뉴욕으로 몰려다니며 이기면 이겨서 기분 좋으니까, 지면 화가나서 계속 술만 마시며 분풀이를 하곤 했단다.
- 그러다 지금의 부인 엘리를 만나 결혼했고 그 후 한번도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했다. 그리고는 내가 7살때인 육이오 동란때 미군이나유엔군을 만나 쵸코렛을 얻어먹던 이야기를하며 하마터면 우리가 한국에서 코흘리개와 캐나다 군인으로 마주칠수도 있었다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 에디와는 동네 골프장에서 골프도 같이 치고 또 그의 친구집 (드라이덴 시 경계를 벗어난 정말 깡촌 중의 깡촌으로 우리가 가던 날 그 집 뜰에는 흑곰 한마리가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에 놀러가 그와 그의 친구든들은 카드놀이를 하는데 나는 그걸 할 줄 몰라 혼자 술만 마셨던 기억이 난다. 에디는 다음에 갈 때를 대비해서 그 카드놀이를 가르쳐 준다고 했으나 공약이 되고 말았다.
- 그 해 가을 도로 변에 있는 큰 나무의 가지들이 웃 자라서 나무잎들이 우리 모텔의 간판을 가려서 엘리에게 나무 짜르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하자 저건 자기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짤라야할 부분이 2-3미터는 족히 되는 높은 곳이어서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위험하니 고공작업차를 불러야 한다고 하자 엘리는 자기집 나무 가지치기도 전부 자기가 한다면서 집 창고에서 엔진톱을 꺼내와 한 손으로 들고 나를 보고 사다리나 잡고 있으라고 했다.
- 그 톱은 내가 한 손으로 들기에도 무척 무거웠다. 그러나 그는 거뜬히 목표한 가지에 다다라서 엔진톱을 작동 시키더니 삽시간에 나무가지 몇개를 잘라버린다.
- 나는 그의 강단과 완력에 질려버린다. 그의 증조부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캐나다 대륙횡단 철도가 개통되고 철도역 부근 마을 개발을 위해 캐나다 정부가 대대적인 이민 유치 작업을 펼칠 때 (1900년초) 에 맞춰 이민을 왔다고 한다. 정부는 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농사꾼들을 대상으로 매력적인 제안을 한다. 그들이 캐나다로 오는 배삯과 캐나다에서의 체류비, 목적지에 도착해서 땅 분배까지를 모두 캐나다 정부와 CP 철도회사가 책임지고 해주기로 한 것이다.
- 더구나 목적지에서 받을 땅은 그들이 새벽 동 틀때 출발해서 해 지기전에 돌아올 때까지 그들이 뛰어 다니며 박은 말뚝내의 모든 땅이라고 했다. 어떤 욕심 많은 농부는 새벽부터 해 질녁까지 한시도 쉬지않고 뛰어다니며 말뚝을 박다가 지쳐 쓸어져 끝내는 일어나지 못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욕심이 지나쳐 땅과 목숨을 바꾼 것이다.
- 그러나 초기의 삶은 무척 고생스러웠다. 한 겨울 맹 추위속에 위니펙역에 내린 이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 그 속에 움막을 마련해 겨울을 나야했다. 동사자 아사자도 속출 했다. 그러면서 점차 자리를 잡아간 그들은 주변에 커다란 우크라이나인 공동체를 이루며 발전해 간다. 엘리네도 그 중 한 가족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네가 정월 초하루, 추석 그리고 각종 절기 등등에 음력을 쓰듯이 우크라이나 달력으로 명절을 기린다.
- 이런 그들이기에 그들의 억센 기질이 엘리에게도 유전자로 전해지지 말라는 법이 없겠다. 우리와 이웃이 된지 3년 만에 엘리는 회사에서 정년 퇴직을 한다. 그 사이에도 간간히 우리 모텔일을 여러모로 도와 주었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도와줄 타이밍이 된 것이다.
- 사실 그는 20대 부터 65세 정년이 될 때까지 그곳의 큰 제지회사에서 일을 했기때문에 그가 받는 노후연금으로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한 우크라이나 농민의 후예였다. 우리는 저녁모임이 있을때면 엘리를 불러 사무실을 봐 달라고 하고 우리 한인 3가구의 회식이나 나중에 친구가된 변호사 번즈와 회계사 마이크 가족과의 회식에 참석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곤 했다.
- 한번은 집사람이 백내장수술을 받아야하는데 그곳은 병원도 워낙 작아 그런 수술은 위니펙 종합병원에서 받곤했다. 내가 동행해야 했으나엘리가 위니펙까지( 편도400킬로 왕복800킬로. 자그만치 서울/부산간 거리다) 자기차로 함께 가주겠다고 했다. 그의 차는 미국 포드사의 엑스플로러로 얼마전에 구매해 반짝반짝했다. 그들이 떠나고 얼마후 위니펙에서 연락이 왔는데 수술은 잘 끝났는데 다음날 의사를 한번 더 보고가라고해서 부득이 그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오후에나 돌아올 것 이라고했다.
- 다음날 집사람과 함께 돌아온 엘리에게 감사를 표하며 왕복 기름값과 그의 시간당 임금을 계산해 얼마를 주려고 하자 필요가 없다고 한다. 환자를 동행해서 병원까지 데려다 주고 데려올 경우 드라이덴 시 (市) 당국에 신청하면 실비정산이 된다고 했다. 그래도 받으라고 했으나 결국 사양했다. 나와 아내는 우린 정말 좋은 나라에 살고 있다고 말하며 행복해 했다. 그 후에도 엘리는 우리가 7년 반 이라는 기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이곳 밴쿠버로 올 때까지 음으로 양으로 우리를 계속 도와 주곤 했다.
- 성경에 나와 있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묵묵히 실천하는 듯 한 엘리를 보며 이곳 속담이 생각 났다. 우리에게 딱 들어 맞는 말이었다.
- A good neighbour is better than a brother far off. ( 좋은 이웃은 멀리 있는 형제 보다 낫다 )
첫댓글 심성이 고우신 정선생님을 아낌없이 도운
수호천사님들을 뵙네요.
텃세를 거의 안 부리는 캐나다의 좋은 점 중에 하나이기도 ...
다음 글 고대하며, 건강하시길...
- 아마 그곳이 깡촌이라서 사람들이 모두 순박한듯.
- 도시가 커지면 인심도 야박해지지요.
- 이곳 밴쿠버는 이젠 살벌(?)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20여년 전과 비교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