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특집
안돼! 에서 안 돼? 까지 도착한 아기의 말
김나리
조카는 아직 스스로 서지 못할 만큼 어릴 때부터 저녁노을을 보는걸 좋아했다. 장난감을 혼자 갖고 놀 만큼 조금 더 자란 지금도 여전히 노을이 지나가는 시간이면 베이비가드에 매달려 창밖을 본다. 오늘도 베란다 창 앞에 까치발로 서서 한참 밖을 보던 조카가 아창아창 달려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임머, 임머, 하고 이모를 부르는 아기의 손을 잡고 함께 창문 앞으로 갔다. 자신을 안아달라고 해 번쩍 안아주니까, 하늘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꽁!” “우와. 달이다. 하늘에 달이 있네.” 조카는 그게 아니라는 듯이 다시 말했다. “꽁! 공!” “저 공 갖고 싶어요?” “녜!” 순간 나는 마음이 일렁여 깜짝 놀랐다. 하늘에 있는 별도 달도 따 준다는 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런 마음이었구나! 나는 조카를 안고 폴짝폴짝 뛰며 달을 손으로 잡는 시늉을 했다. 조카는 내가 정말 달을 딸 수 있다고 믿는 듯 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쿠, 이모는 못 잡겠다.” 몇 번 뛰다가 포기하려는 내게 조카는 연신 간절한 응원을 보낸다. “꽁! 꽁!” 나는 한참을 더 창문 앞에서 가까스로 달을 못 잡는 시늉을 했다.
내가 요즘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태어난 지 23개월이 된 동생의 아기다. 아기는 세상에 있는 모든 동그라미를 찾아내며 공이라고 부른다. 공을 찾아낸 걸 기뻐하고, 다른 날 다시 그 자리를 지나게 될 때, 지난번 보았던 ‘공’을 다시 찾아내며 기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그란 무언가들을. 길바닥에 지저분하게 난사되어 있는 버찌 열매들, 낙하한 솔방울, 구슬, 자동차 바퀴, 내 팔에 있는 작은 점과 같은 것들을 온종일 찾아내고 기뻐한다. 그 동그란 것들의 이름을 매번 알려주다가도 아기가 계속 그게 공이라고 말하면, 왠지 네 말도 맞다는 대답을 해주고 싶어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사전에는 여러 ‘공’에 대한 뜻이 적혀있다.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모든 점으로 이루어진 입체.
이 의미라면 아기가 찾아낸 모든 공들도 대략의 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그 밑에, 밑에 있는 다른 공의 의미에 눈이 간다.
애써서 들이는 정성과 힘.
나는 또 깜짝 놀랐다. 아기가 자라는 데 필요한 숱한 공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기는 “이거 뭐야?”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아기 주변의 친밀한 어른들은 모두 수없이 연속적으로 계속되는 “이거 뭐야?”의 답변을 마련하느라 공을 들이고 있다. 아기가 좋아하는 공 안에는 아기 주변의 애씀과 정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니 조금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아기를 돌보는 일은 자꾸 나의 어린 시절을 들추게 한다. 그 시절 나의 구멍들이 이 사랑스러운 아기에게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아기를 대하는 태도에 더 공을 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나는 사랑을 구걸하느라 영악해져서, 당연한 질문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당연히 그렇게 하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귀찮게 물어보는 것이다. 지금 양치해도 돼? 책 읽어도 돼? 학교 가도 돼? 숙제해도 돼? 같은 것들 말이다. 100%의 확률로 거절 받지 않을 수 있는 질문을 하곤 했다. 답이 궁금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수용해 주는 반응을 얻고 싶어서 말을 걸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관종’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놀림의 뉘앙스로 사용하는 것이 참 마음 아프게 느껴지는데, 내가 바로 그 배고픔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중요한 시절에 생겨버린 이 구멍은 나중에 아무리 관심과 사랑을 받아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 관심도 받지 않는 혼자가 되고 싶어진다. 사랑받고 있는지 눈치 보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이다.
아기를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성악설이니 성선설이니 하는 말들이 아이를 두고 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악하고 선한 것과 상관없이 아기는 주어진 세계에 투명하게 반응하고, 굉장히 힘이 세다. 얼마나 힘이 세냐면 부딪치거나 넘어지면 아프다고 잠깐 울 뿐, 다시 또 달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다시 다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즐거운 것을 한다. 저렇게 하는 거구나, 하고 나는 늘 신기하게 아기를 본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중에 <뽀롱뽀롱 뽀로로>가 있다. <뽀롱뽀롱 뽀로로>에는 ‘크롱’이라는 아기 공룡이 등장한다. 말을 잘하는 다른 등장인물과 다르게 크롱은 말을 하지 못하고 늘 “크롱크롱~” 하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크롱이 가진 특징이라고만 생각하고 말았는데 어느 날 동생이 말해주었다.
“언니 그거 알아? 크롱도 나중에는 말할 수 있게 된대. 아직 아기여서 옹알이를 크롱크롱 하는 거래.”
나는 이 이야기가 좋았다. 시즌이 거듭되어도 아직 크롱은 옹알이만 할 수 있는 아기공룡이지만, 이 세계관 속에서의 크롱은 ‘언젠가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음 이야기가 생기면 인물은 훨씬 입체감을 얻는다. 엽서 속 그려진 풍경을 보다가도, 이 엽서의 그림 속 등장인물들이 이제 다 죽고 없는 사람들이라는 상상을 하면 불현듯 더 쓸쓸하고 애틋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처럼.
아기의 회복력과 명랑함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어쩌다 이런 인간이 되었나 하는 자기연민과 한탄이 어리숙하게 느껴진다. 먼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덜 생각하고 싶어진다. 왜 사랑하는 상대를 만날 때 그 상대와 미래를 그릴 수 있어야 하는지를 또, 또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건강한 사랑은 더 이상 상처를 파먹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나를 떼어낸다.
내가 읽던 책에 붙어 있었던 인덱스 스티커들을 “지지”라며 다 떼어놓거나, 노트북 키보드 위에 마우스를 올려둔 채 뚜껑을 닫아버리기도 하지만, 그런 것이 나를 화나게 하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가 아기가 악하거나, 선하지 않고, 투명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기 곁에서 함께 투명해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언가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안돼!”하고 울던 아기가 요즘은 내가 뭔가 집중해서 만지고 있으면 옆에 와서 말한다. “안 돼?” 아기 곁에서 내가 무럭무럭 자란다. 더 자상한 방식으로 말을 다시 배운다. 나는 내가 아주 많이 변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