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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교산&그너머 <1191> 경남 함양 황석산
왜군과 맞서 싸운 황석산성 위로 ‘칼날’ 같은 암봉 우뚝
국제신문 기사 입력일 : 2020-08-26
글 : 이창우 산행대장
- 경남알프스 다섯봉우리 중 하나
- 정상 조망·산세 황홀해 인기
- 약 10㎞ 원점회귀 5시간여 소요
- 10m 높이 용추폭포 물줄기 시원
- 붉은 색 띠는 암반 ‘피바위’ 이색
- 하산 때 북봉 우회 로프길 주의
부산과 가까운 경남에는 1000m 봉우리를 묶어 스위스의 알프스에 빗대어 명명한 곳이 두 곳 있다. 동부 경남에는 가지산(1241m)을 정점으로 한 영남알프스가 있다면 서부 경남에는 금원산(1353m)을 정점으로 한 경남알프스가 있다. 백두대간에 속한 남덕유산(1507m)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이 남령을 지나 월봉산(1279m)에서 솟아오른 뒤 두 갈래로 갈라진다. 동쪽으로 뻗은 능선은 수망령을 지나 거창군의 금원산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기백산(1331m)을 빚었고 또 다른 능선은 남쪽으로 곧장 뻗어 거망산(1184m)을 거쳐 헌걸찬 황석산(1192m)에서 다시 솟구쳤다. 이들 다섯 산을 묶어 경남알프스라 칭한다.
이들 산 가운데로 용추계곡이라 불리는 지우천이 흐른다. 10m 높이에서 떨어지는 용추폭포는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심장을 오그라들게 한다. 용추폭포는 이번 코스의 출발지인 유동마을에서 지우천 상류로 4㎞가량 올라가면 나온다. 월봉·황석·거망·금원·기백산은 1박 2일 종주 산행과 당일 산행 등 다양한 등산로가 열려 있어 사계절 산꾼의 사랑을 받는 명산으로 영남알프스와 쌍벽을 이룬다. ‘근교산&그 너머’ 취재팀은 경남알프스의 미봉(美峯)으로 정상부는 ‘예리한 칼날’을 품었다는 경남 함양의 황석산(黃石山)을 찾았다. 황석산은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쌓은 황석산성과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정유재란 때 ‘성을 비우면 모두 살려 주겠다’는 왜군의 회유를 거부하며 결사 항전했지만 성이 함락되면서 끝까지 싸웠던 백성은 모두 도륙되고 부녀자는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이로 인해 함양 사람은 황석산을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산으로 여긴다.
황석산 산행은 함양군 안의면 유동마을회관에서 시작해 연촌마을~CCTV·황석산 등산 안내도~망월대~황암사·황석산 정상 갈림길~황석산성 동북문지~황석산 정상~거북바위~북장대 추정지~뫼재~령암사~탁현 기점 삼거리를 거쳐 유동마을회관으로 돌아오는 원점 회귀다. 산행 거리는 약 10㎞에 시간은 5시간 안팎이 걸린다.
유동마을회관에서 출발해 마을 입구 방향으로 70m를 되돌아간 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는다. ‘황석산 정상(4㎞)’ 방향으로 연촌마을 표석을 지난다. 마을 길을 따라가면 정면에 황석산 전위봉인 970m봉 능선이 부채를 펼친 듯 가파르게 치솟았고 뒤돌아보면 건너에 삼각형을 한 기백산이 우뚝하다.
연촌마을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콘크리트 길을 오른다. 곧 철망이 쳐진 흙길 임도로 바뀐다. CCTV와 황석산 등산 안내도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꺾어 취수시설에서 오른쪽 ‘황석산 정상(3.2㎞)’ 방향으로 향한다. 여기서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산길은 작은감작골을 따라 가파르게 올라간다.
물소리가 차츰 잦아들 즈음 유동마을(2.1㎞)보다 황석산 정상(1.9㎞)이 더 가까워진다. 유동마을에서 약 1시간30분이면 지능선에 올라선다. 왼쪽 철쭉 터널을 빠져나가 970m봉 아래 안부에서 황석산 정상은 오른쪽이다. 시원한 조망이 곳곳에서 열린다.
망월대 직전 전망대에서 조망은 더욱더 넓게 열린다. 남봉과 북봉 사이의 닭 볏처럼 돋아난 암봉이 황석산 정상이다. 영락없는 뫼 산 자를 빚었다. 망월대를 지나 갈림길에서 황석산은 직진한다. 왼쪽은 황암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북봉 아래 비탈진 암반이 붉은색을 띤다. 부녀자들이 몸을 던져 붉은 피로 물들었다는 피바위다. 피바위는 황석산 서쪽 우전마을 쪽에 한 곳 더 있다. 황석산성의 동북문지에 들어선 뒤 갈림길에서 오른쪽 황석산 정상(0.1㎞)으로 간다. 지난주 답사 때는 황석산 정상까지 바위 구간에 덱 계단 공사를 하고 있었다. 공사로 인해 정상은 오를 수 없어 그대로 직진해 거북바위로 향했다. 현장 관계자는 다음 달 초면 모든 공사가 끝난다고 한다.
황석산 정상에서는 북쪽의 남덕유산에서 시계 방향으로 덕유산 능선, 수도산~가야산 능선, 우두산, 오두산, 황매산, 웅석봉, 지리산 천왕봉, 대봉산, 백운산 등 1000m가 넘는 산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안부의 복원한 산성과 경주 이씨 무덤을 지나 거북바위 석문을 빠져나가면 거북바위 전망대에서 다시 조망을 즐긴다. 여기서 보면 황석산 정상부가 예리한 칼날처럼 보인다. 북장대 추정지에서 길이 위험한 북봉을 오르지 않고 왼쪽으로 돌아간다. 길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로프를 잡고 5m 바위를 내려서면 산길은 완만해진다.
폐헬기장을 지나 거북바위에서 30분이면 ‘현 위치번호(함양 황석산 1-5)’ 표지목이 서 있는 뫼재 갈림길에서 오른쪽 산내골로 하산한다. 직진은 거망산 방향. 20분이면 이정표가 있는 공터에서 오른쪽 유동(탁현)마을로 내려간다. 산죽 터널을 벗어나면 물소리가 들린다. 여기서부터 계곡을 따라간다. 철조망이 나오면 곧 넓은 길과 만나고 령암사부터는 콘크리트 길을 간다. 탁현 기점 삼거리에서 오른쪽 도로를 따라간다. 뫼재에서 1시간30분이면 출발지인 유동마을회관에 닿는다.
◆교통편
- 부산~거창~용추행 버스, 시간 맞추기 쉽지 않아…당일산행 승용차 이용을
이번 산행은 부산에서 거창행 직행버스와 거창에서 용추행 농어촌버스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아 승용차 이용을 권한다.
대중교통은 경남 함양보다 거창에서 용추계곡이 있는 함양군 안의면 유동마을로 들어가는 게 더 편리하다. 부산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거창행 버스는 오전 7시10분, 10시30분 등에 있으며 2시간40분 소요. 서흥여객터미널에서 삼산·안의선인 용추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 8시, 9시30분, 11시에 출발한다. 산행을 마친 후 용추에서 거창으로 나가는 버스는 오후 3시, 4시30분, 6시, 7시15분(막차)에 출발하며 유동 버스정류장에 곧 도착하니 미리 기다린다. 거창에서 부산 서부터미널행은 오후 5시, 7시(막차)에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때는 경남 함양군 안의면 유동길 56-21 유동마을회관을 내비게이션 목적지로 하면 된다.
문의=생활레포츠부 (051)500-5147 이창우 프리랜서 010-3563-0254
글·사진=이창우 프리랜서
경남 함양 황석산
경향신문 기사 입력일 : 2007.10.04.
김한태 기자
황석산(1190m)은 경남 함양군 서하면과 안의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백두대간 줄기에서 뻗어내린 기백·금원·거망·황석 가운데 끝자락에 솟구친 이 산의 정상은 2개의 커다란 암봉으로 이뤄져 있다. 삼각뿔 형태의 이들 암봉은 수십개의 바위들이 서로 물고물린 듯 쌓여있다.
이들 암봉이 바로 이 산의 묘미 중 하나로 꼽힌다. 국내 암봉 가운데 이처럼 위태로우면서도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산은 찾아보기 어렵다. 얼핏 보면 피라미드를 연상케도 한다.
정상에 오르면 조망이 장관이다, 북쪽으로는 백두대간의 덕유산이 보이며, 동남쪽으로는 감악산, 남동쪽으로는 황매산, 남쪽으로는 지리산 등이 보인다. 금원산과 기백산 사이에는 유명한 용추계곡이 있다.
6·25 때 빨치산 여장군 정순덕이 활약했던 곳이 바로 이웃하고 있는 거망산이다. 가을철에는 거망에서 황석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펼쳐진 광활한 억세밭 풍경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황석산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함양 안의면 사람들이 성이 무너지자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천길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는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 곳은 지금껏 피바위로 불린다.
주 능선에서 용추계곡 쪽으로는 4개의 등산로가, 화림동 계곡 쪽으로는 2곳의 등산로가 나 있다. 화림동 계곡 쪽은 전북 남원으로 넘어가는 육십령으로 연결된다. 이 구간 계곡에는 농월·거연·동호·군자란 이름을 가진 정자도 유명하다.
황석산은 황색과 석산의 거친 이미지가 겹쳐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산은 그런 이미지와 다르다. 황석산을 이루는 모암의 색깔은 우윳빛이다. 특히 여러 계곡의 암석들은 희고 부드럽다. 돌의 무늬도 나뭇잎을 겹겹이 쌓은 듯 가지런하다. 이 산은 전체가 화강암질이다. 여러 암석이 뒤섞인 여느 산과 달리 골짜기나 정상이나 모두 동일한 암질이다. 황석산 정상이 단순한 형태미를 보이는 것도 모암의 균질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거진 숲도 이 산의 자랑거리다. 최정상을 제외하고 대부분 부식토가 두껍게 쌓여 있다. 특이하게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마사와 부식된 낙엽이 뒤섞인 토양이 많다.
용추계곡에서 출발해 탁현마을을 거쳐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에는 30년생 안팎의 낙우송이 많다. 또 3부능선쯤에 있는 영암사에서 중턱까지는 통통하고 곧게 뻗은 낙우송 숲이다.
등산로는 6개가 있다. 등산로마다 계곡이 있다. 오르내리는 데 가장 짧은 코스가 3시간30분이고 7시간이 걸리는 코스도 있다. 지장골과 용추계곡으로 연결된 등산로는 비가 많이 온 뒤에는 피해야 한다. 7번 정도 계곡을 건너야 하므로 위험하고 우회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하산은 동쪽 능선을 타고 연촌을 지나 유동마을로 하는 것이 좋다.
▲영호남 관문 천년 군사 요충
황석산성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대치했고, 정유재란 때는 조선과 왜군이 접전한 곳이다. 경남 함양군 서하면에 있는 이 산성이 1000년을 두고 군사요충이 된 것은 영·호남의 관문이기 때문이다.
산성은 황석산 정상 아래에 있다. 경남 함양과 전북 남원의 경계는 육십령이다. 삼국시대에는 가야를 병합한 신라가 이 고개를 두고 백제와 다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유재란의 상황은 좀더 구체적이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을 보면 왜군이 진주성을 공략한 뒤 전주 방면으로 진출하려하자 민·관·군이 황석산성에서 막아섰다. 이 전투에서 무관 출신 김해부사 백사림은 첫날 접전 뒤 퇴각해 버렸고, 문관인 안음현감 곽준이 절명시를 남기고 아들 2명과 싸우다 전사했다.
이 성의 기초는 삼국시대에 축조됐다. 험한 산세를 이용한 이 성은 둘레가 2.5㎞이고 높이가 3m이다. 성안에는 시냇물이 흘렀고 군사용 창고 흔적이 있다. 정유재란 때 2박3일 동안 전투에서 민·관·군 353명이 전사한 곳으로 밝혀져 1987년 국가문화재 사적지로 지정됐다.
[에피소드로 읽는 전쟁 톡톡] 황석산성 전투, 피바위는 알고 있다
특집부 weekly@imaeil.com
매일신문 기사 입력일 : 2022-11-04
글 : 김정식 육군삼사관학교 명예교수
황석산 고갯길, 함양의 육십령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칼날 같은 화강암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는 황석산은 냉정과 위엄이 서려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덕유산과 거망산 등 동서남북이 구름에 맞닿을 듯 높고 험한 바위산들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그 7, 8부 능선을 따라 축성된 천혜의 요새지, 황석산성을 물들인 가을빛은 피를 토한 듯 붉다.
1597년 팔월 초이레, 이순신이 떠난 한산도가 무너졌다. 임란 이후 조선 수군이 장악해 왔던 제해권이 왜군에게 넘어간 것이다. 파죽지세의 왜군은 여세를 몰아 곡창지대인 호남을 노렸다.
서생포에서 전라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화왕산성(창녕)을 지키는 곽재우를 피해 함양의 황석산성으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온 고을에 전운이 감돌았다.
거창의 유덕한 선비 유명개는 지난 임란 때부터 항전의 결기를 북돋우기 위해 '조상 대대로 살았고 후손들이 살아야 할 우리 고을을 우리가 아닌 그 누가 지켜주겠는가. 나를 던져 처자식과 부모 그리고 우리 이웃을 지키자'고 격문을 내걸었는데 또다시 왜군과 맞닥뜨리자 '지금까지 잘 싸웠던 것처럼 적이 성 안에 오르지 못하도록 싸워라. 적은 식량이 부족하여 오래 버티지 못한다. 우리는 한 달을 먹고도 남을 식량이 있으니 무엇이 걱정이냐!'고 하며 병기와 물자를 넉넉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팔월 열엿샛날, 황석산성을 지키고 있던 안음(함양군 안의) 현감 곽준은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왜군의 주력과 맞선다. 아들과 사위가 울면서 아버지를 피신시키려 했지만 "나는 왜놈의 목을 베고 산성에서 죽을 것이다. 다른 계략이 없다"고 외치며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하자 두 아들도 따라 전장에서 죽고 사위마저 포로로 잡혀 참살을 면치 못한다. 함양군수를 지낸 조종도 또한 "일찍이 대부였던 나는 도망쳐 숨는 무리들과 같이 풀섶에서 죽을 수 없다. 죽는다면 단연코 당당하게 죽을 뿐이다" 하며 곽준을 따랐다.
더군다나 조종도는 구차하게 남을 처자식이 왜군에게 욕을 볼 게 뻔하리라 예측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자신의 손으로 부인과 어린 자식의 목을 베고 의연히 진중에 들어왔으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했겠는가. 최후를 선택하고 전장에 나선 것이다. 곽준과 조종도는 안의와 인접한 함양, 합천, 거창, 김해, 삼가, 초계, 산음 등 7개 고을 남녀노소 3천500여 명과 합세하여 왜군 2만7천 명을 대적했다.
관리들과 의병 그리고 피난민에 이르기까지 성안으로 모인 남녀노소 모두 전투사가 되었다. 날아드는 왜군의 조총 앞에서 활과 창칼, 돌덩이는 물론 뜨거운 기름과 끓는 물로 대항하고 육박전을 벌였다. 아녀자들은 물과 기름을 끓이고 노인들과 아이들은 돌을 날라 굴렸지만 전세는 턱없이 열세했다. 마침 김해부사를 지낸 백사림이 전투에 참전하여 힘을 보태는가 하더니 접전 하루 만에 그만 겁을 먹고 도망쳐 버렸다.
무관 출신이던 그에게 의지했던 향민들의 전투 의지가 순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모든 부대가 사기를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명개의 지원 아래 곽준과 조종도가 향민들과 함께 끝까지 분전하였지만 중과부적이었던 것이다.
3일 밤낮을 피를 토하며 밀고 당긴 황석산성 전투가 맥없이 끝이 났다. 헤아릴 수 없는 장렬한 주검들이 성벽의 돌 틈마다 널브러져 있었다. 하늘도 슬픈 듯 어두운 구름을 드리우고 이른 낙엽들만 수의를 대신해 주검 위로 덧쌓였다.
성이 함락되고 고을의 수령과 순한 백성들이 모두 피를 토하면서 죽음에 이른 것을 본 부녀자들은 비분을 감추지 못했다. 곽준의 딸은 "적들이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갔고 나의 남편 유문호마저 포로로 잡혀 죽었으니 나도 따라 죽으리라"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따라 울던 다른 부녀자들도 '지아비는 죽고 우리가 살아남아 어찌 왜적들의 모욕을 견디랴' 하며 하얀 치마폭으로 얼굴을 감싼 채 벼랑으로 몸을 던졌다. 수많은 부인들이 하나둘 꽃잎이 되어 산성 아래로 떨어져 내리자 순식간에 황석산성은 피로 얼룩졌다. 산성의 바위들은 황석산의 가을빛보다 더 붉은 핏자국으로 선명하게 각색(刻色)되었다.
언젠가부터 안의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도록 비바람에 씻어지지 않은 그 핏자국이 밴 바위들을 피바위라 부르기 시작했다. 피바위는 왜군에 맞서 자신의 삶터를 지키려 한 저항과 의분의 기록이다. 전설보다 더 짙은 피바위를 만든 백성들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택한 희생이었기에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내 나라와 내 이웃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한 그들의 의로움이 팍팍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욱 경이롭게 다가온다. 역사는 크고 작은 희생으로 이어져간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인물들과 이야기는 우리 곁에서 영생을 누린다. 황석산성의 피바위가 올해따라 더 붉기만 하다.
경남 함양 황석산
산행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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