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여름에 이르러 일본(日本, Japen)은 동(東)쪽으로 웨이크(wake) 제도(諸島), 서(西)쪽으로 미얀마(Myanmar), 남(南)쪽으로 뉴기니(New Guinea)그리고 북(北)쪽으로 아무르(Amur) 강(江)에 이르는 거대(巨大)한 지역(地域)을 지배(支配)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 전력(戰力)은 생각만큼 충실(充實)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해군(海軍)은 태평양(太平洋)만 놓고 보면 수적(數的)으로 미국, 영국보다 우위(優位)에 있었고 진주만(眞珠灣, Pearl Harbor)을 급습(急襲)한 후 연합국(聯合國)을 거세게 몰아붙이고는 있었으나 전쟁 지속 능력(戰爭持續能力)이나 질적(質的)으로 열세(劣勢)였기에 시간(時間)이 갈수록 불리(不利)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이 최대로 팽창했던 1942년 6월 당시의 지도
육군(陸軍)은 상황(狀況)이 더욱 심각(深刻)했습니다.
문제(問題)는 연전연승(連戰連勝)하다 보니 현실(現實)을 직시(直視)하지 못하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전과(戰果)의 대부분은 중국군(中國軍)과 동남아(東南亞)에 주둔(駐屯)한 미국, 영국, 네덜란드(Nederlands)의 식민지(植民地) 관리부대(管理部隊)를 상대(相對)로 거둔 것이었습니다.
즉, 일본이 강(强)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약(弱)해서 잘 싸운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1939년 있었던 할힌골(Khalkhin Gol) 전투에서 소련군(蘇聯軍)에 호되게 당했을 때 깨달을 법도 했지만 일본은 애써 현실(現實)을 외면(外面)했습니다.
↑일본의 초기 연승은 상대가 약한 덕분이었습니다
일단 여타 열강(列强)에 비교(比較)하면 소총(小銃) 정도만 대등(對等)한 수준(水尊)이었고 공용화기(公用火器) 이상부터는 질적 차이(質的差異)가 컸습니다.
그러한 지상군(地上軍) 무기 중에서 제2차 대전을 치르면서 지상전의 왕자(王者)가 된 전차(戰車)의 경우는 유독 격차(格差)가 심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성능(性能)이 바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일본은 격차를 줄일 기회(期會)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 개발(開發)된 전차는 모두 비슷한 수준이어서 제2차 대전 초기에는 성능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할힌골 전투 당시 격파된 95식 전차를 살펴보는 소련군, 일본의 반격에 맞서 싸우는 몽골군
그러나 전쟁 발발(戰爭勃發) 후 관련 기술(關聯技術)이 비약적(飛躍的)으로 발전(發展)하면서 진정(眞定)한 전차(戰車)의 역사(歷史)가 그때부터 시작(始作)되었습니다.
반면 할힌골에서 뼈아픈 경험(經驗)을 했음에도 이를 애써 무시(無視)하고 자만(自慢)에 빠져 일본은 계속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독일처럼 좋은 제휴선(提携線)이 있었지만 기술 도입(技術導入)에 소극적(消極的)이었습니다.
결국 독일 중(重)전차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던 미국의 M4가 태평양 전역(太平洋全域)에서 일본 전차에게 저승사자(儲承死者) 노릇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유럽에서 M4는 독일 기갑부대의 손쉬운 밥이었습니다
당장 대항마(對抗馬)가 없던 일본은 독일로부터 중전차 도입을 검토(檢討)했으나 독일도 부족(不足)한 상황(狀況)이었습니다.
설령 물량(物量)이 있어도 일본까지 가지고 올 방법도 없었습니다.
결국 종전 직전에 소련이 대규모 기갑부대(大規模機甲部隊)를 앞세워 만주(滿洲)를 공격했을 때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그렇게 현실 파악(現實破惡)을 게을리한 대가(代價)로 전쟁에서 패하고 군은 해체(解體)되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시작된 냉전(冷戰)은 상황을 묘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 전차에게 M4는 저승사자로 군림했습니다
1950년에 한국전쟁(韓國戰爭)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자위대(自衛隊)라는 이름으로 무력(武力)을 재건(再建)하는 데 성공(成功)했습니다.
자위대 창설(創設) 직후 일본은 미국에서 M47 전차를 도입(導入)하려 했으나 동서 대립(東西對立)이 심각(深刻)한 유럽에 우선 공급(優先供給)이 결정(決定)되었습니다.
그러자 1955년부터 미쓰비시 중공업(三菱重工業)의 주도(主導)로 국산 전차 개발(國産戰車開發)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탄생(誕生)해서 1961년부터 배치(配置)된 전후 일본 최초의 전차가 61식 전차입니다.
↑일본의 제1세대 전차인 61식 전차
하지만 배치 직후(配置直後)부터 최악(最惡) 소리를 들었습니다.
1930년대 방식(方式)인 볼트로 마감(磨勘)해서 방어력(防禦力)이 형편(形便)없던 데다 엔진과 변속기(變速器)가 분리(分離)되어 보수(保手)가 어려웠습니다.
만일 61식이 10년 정도 빨리 등장(登場)했다면 중간 정도의 평가를 받았을지 모르나 배치가 시작되었을 때는 제2세대 전차의 등장이 목적(目的)이던 시점(始點)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제1세대 전차인 61식은 등장과 동시(同視)에 구형(舊型)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運命)이었습니다.
↑61식 전차는 등장 시점이 어중간해서 실패작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자력 개발을 자신했지만 정작 시대(時代)의 흐름을 오판(誤判)했던 실수(失手)를 반복(反復)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미쓰비시 중공업은 당시까지 개발된 최신 전차들을 면밀히 참조해 1970년대 중반 배치를 목표로 후속(後屬) 전차 개발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후속 전차가 74식 전차입니다.
이처럼 시대 흐름을 간과(看過)하는 실수를 반복한 결과 61식은 혹평(酷評)만 받다가 사라진 전차로 무기사(武器史)에 기록(記錄)되었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