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 그리고 축제 / 한동희
동료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C선생이 두통을 호소했다. 머리 속을 굵은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심한 통증으로 밤잠을 설치고, 그로 인해 직장생활도 원만치 않은 모양이다. 종합검진을 받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니 미칠 지경이란다.
그는 꼼꼼하고 성실하다.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해 시간의 틈새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간 쌓인 스트레스로 머리 속 회로가 엉킨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누적된 피로를 풀기 위해 휴식을 취해도 몸은 바쁘게 움직이던 때와 같은 주파수로 돌아간다니, 인체의 구조가 두렵고 신비롭기만 하다. C선생의 병명은 ‘현대 문명병’이라 해야 할 것 같다.
현대 의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병을 무엇으로 풀어야 할까. 내가 “연애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마디 던지니, 동료 하나가 맞는 말이라며 훈수를 둔다.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 연애를 종용하다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도 환갑을 넘겼으니 내 말뜻을 이해할 것이다. ‘나이 이순을 넘으면 어떤 행동을 한다 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다’는 옛 선인의 말에 개대어 던진 농담 속의 진담, 사랑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라 본다.
나도 생각이 바뀌고 있다. 젊었을 때는 열정이 동반된 사랑을 꿈꾸었지만, 느낌과 교감만으로도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차츰 알겠다. 이제부터라도 좋은 감정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표현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다.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겸연쩍어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꺼내며 살아야겠다. ‘좋아한다, 보고 싶다. 기다렸다.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 이성에게 이런 말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연륜에 이르렀다는 신호가 나의 뇌를 자극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고 정신을 놔버린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이다.
인생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고독한 레이스다. 한 평생을 평탄한 길만 걸어온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름의 고통과 슬픔, 외로움을 안고 험한 길을 걸어오느라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을까.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몇 해 전 여행길에 올랐다. 호주 여행을 마치고 뉴질랜드로 향하는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잠을 청했는데, 그 길로 깊은 수면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뉴질랜드 병원의 응급실로 이송돼서도 무의식 상태에 빠진 채로 동행한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다가 10사간 만에 깨어났다. 각종 검사를 했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당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의 두뇌 회로가 가동을 멈추고 수면상태로 들어갔던 게 아니었나 싶다. 전기 콘센트에 여러 개의 플러그를 꽂으면 과부하가 일어나듯, C선생의 머릿속 회로도 이런 상태가 아닌지 염려스럽다.
이후, 나는 해결 못한 인생의 숙제로 더욱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인생의 해답을 얻지 못해 가슴 아파하는 내게 가까운 분이 또 하나의 문제를 던져 주었다. 인생을 숙제(걱정, 근심)로 살 것인가, 축제(꿈, 희망)로 살 것인가?
그렇다 인생을 숙제로만 살 게 아니라 축제로 살아야 한다. 숙제가 없는 인생은 무의미하지만, 풀리지 않는 걱정거리를 끌어안고 애태우며 귀한 날들을 소진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삶이 설레거나 기쁘지 않아도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축제의 마당으로 밀어 넣어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축제 속에 살다 보면 자연히 숙제도 풀린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