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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창세기 2:1-3 “ 안식 ”
안식이 무엇입니까? 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이유는 힘들어서 쉬었겠습니까? 아니겠지요.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죠? 하나님께서 실수 없이 잘 만드셨기에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시기에 그 창조 세계가 보시기에 선한 것입니다. 좋더라는 표현이 그냥 눈으로 보기에 좋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힘이 들어서 쉬신 것이 아니라 더 손될 것이 없도록 완성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완성된 상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기에 이 날을 복주고 거룩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날을 나중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제 4계명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안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율법으로 받아 자신들이 법조문처럼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창조의 완성된 그 안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날 지키는 일에만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도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안식교인 들이지요? 이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들 끼리 모여서 삼육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만들어 토요일은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무엇을 보여 주는지를 모르고 아직도 그림자인 날짜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교인만 날을 붙들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 외의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인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믿고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일성수 한다니까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에서 어떤 전도지를 만들었는가 하면, 교회사 역사 중에서 로마 황제가 태양 숭배하는 날을 예배하는 날로 바꾸었기에 주일을 지키는 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이방신의 날이다 하면서 교회사 몇 페이지 하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평생 훈련받은 것이 주일성수 십일조만 하면 예수 믿는 것이고 천국 가는 것처럼 배웠으니 이들의 말에 현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모입니까? 날마다 모이죠? 그래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이지요. 이 말을 전에 청년회에서 하였는데 마침 그 주에 친구집에 갔는데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주일을 지키는 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날인데 당신은 무슨 날 지키느냐고 해서 나는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언제 모이느냐고 해서 초대교회처럼 날마다 모인다고 하였더니 그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하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기 보다는 자기가 지키는 날짜를 붙들다 보니 이런 이단들 앞에 말 한마디 제대로 대답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안식과 우리로 하여금 안식하라신 그 뜻을 성경에서 찾아보고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사람들에게도 안식케 하신 이유는 노동을 그치고 쉬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신의 활동에 둡니다. 그래서 활동을 잘하면 제대로 된 인간으로 여기지만, 활동을 못하는 식물인간은 인간 대접을 잘 못받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엿새는 일하고 7일째는 쉬라고 하신 것은 쉼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근거가 자신들의 노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에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창조 하실 때 사람의 손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그 상태, 보시기에 좋으신 그 상태를 쉼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식일이 앞으로 어떻게 영원한 안식으로 올 것인지를 나타내는 안식입니다. 이 안식일이 율법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의 안식이 방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안식에서 이제 재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안식이 구원의 안식으로 발전하고 있음이 이미 구약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8-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창조를 말씀하면서 안식일을 쉬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5장 12-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15절) 이 말씀은 애굽에서 구원 받았음을 인하여 안식일을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창조와 구원 모두가 사람의 노동과 상관없이 주어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도 우리가 그 선하신 분의 일하심으로 받는 것처럼, 구원도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이 구원하였다는 것이 사람의 일함이 아니라는 뜻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의 날 지킴을 통하여 앞으로 참된 안식을 주러 오실 분을 내다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오히려 안식일 날 지킨다고 참된 안식의 주인을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에서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안식일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이기에 이제는 날과 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왜 날과 달과 안식일지킴이 아닌지를 신약 두 곳의 말씀만 찾아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10-11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하노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나서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라 하니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바울이 수고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데 그 십자가의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것이지요?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림자의 역할은 실체가 옴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림자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시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날에 붙들려 있는지, 일요일 낮예배는 많이 오면서 밤과 수요일은 등한시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는 날을 정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날마다 모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법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의 교제가 좋아서 모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날짜를 지키기 위한 모임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 것은 누구를 위한 안식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안식을 먼저 생각하시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안식을 먼저 챙기시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구원도 내 중심의 구원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위한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최종적인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도 하나님의 안식에 우리가 동원되어짐으로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이 최종 목표가 되어 버리면 지금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올 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천사들이 열심히 우리집을 짓고 있다는 것을 보고 왔다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공력에 따라 평수가 결정된다고 하면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내신 것은 하나님의 안식하실 처소를 만드시기 위하여 구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손으로 직접 거처할 처소를 만드시는데 그 일을 위하여 구속하여 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좀 보신 분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처소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말씀을 아실 것입니다. 이 처소도 우리가 거할 집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처소로 삼으신다는 말씀이 출애굽 직후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구속하여 내신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 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의 처소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처소가 완성되면 하나님은 안식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처음 창조의 안식과 달리 영원한 안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안식 역시 힘들어서 쉬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재창조가 하나님의 손으로 온전하게 완전하게 마무리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재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주님의 처소가 다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완성되었으나 지금도 주의 처소를 찾아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요청하자 아직 순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 수가 다 차면 하나님의 처소가 완성되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에 동원된 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9-22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거대한 건물을 연상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주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즉 성전이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성될 때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 된 자라면 이 안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날짜를 지킴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안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안식을 얻지 못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4:11, 13절에 보면 밤낮 쉬지 못하는 자와 쉬는 자가 나옵니다. 주안에서 죽는 자는 쉼이 있는데 그렇지 못한 자는 쉼이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안식에 참여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안식을 선물로 받은 자는 이 안식의 소중함을 알고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보고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 4:1-11절 “함께 봉독”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 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04. 창세기 2:4-25 “ 사람됨 ”
창세기 1장은 창조를 순서적으로 나타낸데 비하여 2장은 사람의 창조를 우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조의 마무리가 인간의 창조라는 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창세기 1장 2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이, 같은 흙으로 만든 동물과 새들과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며 보살피는 것을 수행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이것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사람이 창조세계를 다스림을 통하여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한 가지 기준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한가지의 법을 통하여 자신의 피조물됨을, 즉 사람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당합니까? 아니지요 지극히 당연하시고 마땅한 것입니다. 100가지를 금한들 안지키면 안되는 것이 지음받은 자의 자세이지요?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텐데 하는 말을 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요? 그러한 생각은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죄된 속성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상태가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뱀의 유혹을 받아 따 먹게 되지요? 이때 뱀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너도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셔야 하는 선악의 기준을 이제 사람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한 의미가 아니라 타락한 죄인으로서 선악의 체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불행의 시작입니다. 아니 선악을 알아서 잘 대처를 해야 하는데 왜 선악을 아는게 잘못 되었고 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입니까?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선과 악이 결정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사람의 입장에서 선악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됨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름이 사람됨인데 이제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자기중심적인 선악체계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자기의 기쁨, 자기의 이익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기쁘고 이익이 되면 선이고 나에게 손해가 오면 악인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선악체계가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창세기 3장에서 바로 증명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실 때 아담이 숨어 있다가 하나님께서 내가 먹지 말라한 것을 네가 먹었느냐? 물으실 때 아담이 뭐라고 합니까? 창세기 2장 23절에서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해놓고는 이 여자 때문에 따먹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이 여자가 내게 주어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진리관이 들어 나지요? 자신에게 손해가 오는 것을 악으로 여기고 그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는데도 똑같은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니까 부인할 수 없는 아담의 후손인 것입니다. 아담만 그렇습니까? 하와도 꼭 같이 뱀에게 전가를 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잘되면 자기탓 못되면 조상탓 하는 것도 역시 선악과 따먹은 후손의 표시입니다. 그러면 자기탓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하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탓이라고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대부분 “그래 알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래!” 이러는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더러워서 내 잘못이라고 해준다는 것이지요. 워낙 세상이 남의 탓만 하다가 보니 카토릭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차에다가 스티카를 붙여 다니는데 어디에 붙여야 내 탓이요가 됩니까? 운전적 앞에 붙여야지요 그래야 볼 때 마다 내탓이구나 할텐데 차유리 뒤에다 붙여 놓으니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됨에서 멀어진 그 값을 우리가 함께 주고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이익에 따라 선악을 결정하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여 악을 행하면 자신의 선한 행위로 악을 상쇄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양심이다, 도덕이다, 인간의 이성이다 라고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선악의 구조를 사람들이 스스로 정하여 놓고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착한일 하면 복받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고, 나쁜 일 하면 벌받고 죽어서도 지옥에 간다고 모두가 말합니다. 전도를 해보면 거의다가 예수믿어서 천국가는게 아니라 자기 행위로 지옥도 천국도 간다고 말합니다. 이건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아이든 어른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실감이 안되면 전도를 해 보십시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 그러면 뭐라고 그래요 예수믿는 니나 잘해라 그러지요 니가 천당가면 나는 만당간다 그러지요 예수믿는 니보다 내가 양심 더 바로 쓰고 산다 내걱정말고 니 걱정이나 해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소리를 듣는 우리가 잘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보다 더 독하고 더 악착같고 사기꾼 거짓말쟁이가 많으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좁은 문 좁은 길이 되어야 합니다. 넓은 문 넓은 길로 자가용타고 쑥쑥 들어가는 그런 곳 말고 좀 수구려서 겨우 들어가는 그런 교회가 되면 사람이 좀 적게 올련지,,, 어떤 사람이 불고기 집과 교회의 공통점이 주차장이 넓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욕을 얻어 먹는 일은 우리가 회개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변하지 아니하는 사고방식, 내 죄는 내가 책임져야지 어떻게 남이 책임지느냐는 이 생각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어느 시골의 할머니가 짐을 이고 길을 가는데 경운기를 몰고 가든 아저씨가 할머니를 태워 주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할머니가 잘 타고 있는지 돌아보니 한 손으로는 경운기 난간을 붙들고 한손으로는 여전히 머리의 짐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짐을 내려놓으세요. 아이고 내가 탄 것만 해도 고마운데 짐까지 어떻게 내려놓는감.... 이게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이 선악의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피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인과율이라고도 하지요. 온통 세상이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에 은혜란 너무나 낯선 말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은혜란 들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뻔뻔스럽게 지옥갈 죄도 용서 받았다고 믿고 있으니 이게 세상의 윈리로는 불가능 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 선악을 책임지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체계로 가득 차 있으니 사람이 주님을 믿을 수가 없지요. 자기행위를 믿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다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많이 자신의 선악의 원리를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배를 빼먹고 어디 가다가 교통위반으로 순경에게 걸려서 딱지를 받게 되면 뭐라고 생각합니까? 예배 빼 먹었니 이랬구나 하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어떤 손해가 오면 내가 뭘 잘못했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생각도 때로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너무 농땡이 부렸더니 하나님이 손대시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생각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매사를 인과율로 계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여서 아무른 어려움 없이 지낸다면 어느 정도를 하여야 할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대로 갚으신다면 오늘도 우리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인과율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고 계산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노림수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선악의 기준을 따라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을 쌓아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한 예수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됨이란 자신의 선악체계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부터 자신의 행위를 믿지 아니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되므로 스스로 선과 악을 조율하여 살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단절, 이것이 죽음입니다. 물론 육신의 죽음도 죽음입니다만 더욱 심각한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라고 하십니다. 범죄의 결과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요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홍수로 온 세상이 심판아래 하나님께로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완성이 바로 새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됨이란 인간의 범죄로 단절되었으나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렘 31:31-34입니다. “봉독” 새 언약은 옛언약과 같지 아니합니다. 이제는 마음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언약은 죄를 사하되 그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는 그런 용서의 언약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흘리신 언약의 피입니다. 이 피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킴으로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창조된 자들은 이제 원래의 하나님의 사람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악의 체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욥기서입니다.
욥과 욥의 세 친구의 논쟁을 우리가 잘 압니다. 욥의 세 친구의 반박은 무엇입니까? 네가 죄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 받는다고 공격합니다. 우리가 욥기서를 보면 욥의 세 친구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을 만큼 논리 정연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의로와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가 없다 그러니 욥의 너의 시련은 죄 때문에 왔으니 회개하라. 그런데 욥은 나 죄 지은것 때문에 이런 재앙이 온 것이 아니다 라고 항변 하지요 그러니 욥을 보고 너 교만하다 그러면서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욥이 죄 때문에 고난 온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설명하시지 않고 다른 말로서 입을 막아 버립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욥이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간구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아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내려있는 선악체계가 뽑혀 나가고 주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범사에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 나의 공로가 전혀 없도다 라는 진정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됨이 더욱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