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3년(세종 15) 10월28일이었습니다. 세종이 술의 폐해와 훈계를 담은 글을 발표합니다. “술은 몸과 마음을 해친다.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리고,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한다.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하게 만들며, 성품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잃게 한다.” 세종은 이 교서를 족자로 만들어 서울을 물론 전국의 관청에 걸어두게 했습니다.
세종이 특히 개인과 나라를 망칠 술로 지목한 것은 바로 소주였습니다. 7개월 전인 3월23일 이조판서 허조(1369~1439)가 세종에게 소주의 폐해를 열거하면서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종은 섣불리 금주령을 내렸다가는 범죄자만 양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임금이 금한다고 무슨 소용이겠느냐. 막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대신 술의 폐해를 알리는 교서를 만들어 족자 형태로 배포한 겁니다.
역사적으로 간과되는 가장 극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소주가 조선의 운명을 바꿔놓은 이야기입니다.. “술을 좋아한 진안대군 이방우는 날마다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태조실록> 1393년 12월13일조) 이방우(1354~1393)는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 1392~1398)의 맏아들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효자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습니다. 고려 말에 예의판서(예조판서·정2품)라는 고위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위화도 회군(1388) 이후 역성혁명이 노골화하자 운명이 갈립니다.
이방우는 고려의 충신이 되기를 자처하고 철원으로 은거합니다. 그곳에서 소주를 마시며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술병에 걸려 죽고 만 겁니다. 만약 이방우가 소주에 취해 죽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태조가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1396)와 낳은 어린 아들(방석·1392~1398)을 세자로 세웠을까. 설령 세웠다 해도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태종·1367~1422, 재위 1400~1418)이 1·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까.
설사 일으켰다 해도 13살 연상인 큰 형인 방우가, 즉 적장자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방원이 왕위에 올랐을까.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이방우가 왕위를 계승했다면 어땠을까. 조선의 역사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그려졌을 겁니다. 이방우 뿐이 아닙니다. 소주 때문에 사망하는 사례가 실록에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1417년(태종 17) 윤 5월4일 금천 현감 김문이 인근 수령들이 마련해준 전별연에서 마신 소주 때문에 사망한 일도 있었습니다. 1515년(중종 10) 4월23일 제주목사 성수재(?~1515)가 죽자 <중종실록>의 사관은 “성수재는 일찍 무과에 장원급제했고, 청렴하고 유능해서 임금이 크게 쓰려고 했지만 소주를 너무 좋아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또한 소주를 독극물처럼 사용해서 일으킨 살인사건도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1491년(성종 22) 2월19일 <성종실록>은 내연남(강위량)과 짜고 남편에게 소주를 먹여 취하게 한 뒤 몽둥이로 때려죽인 여인(소은금)의 사연을 실었습니다. 아버지의 첩과 짜고 아버지에게 폭탄주(‘소주+백화주’)를 마시게 해서 죽인 비정한 아들의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중종실록> 1536년 4월23일자는 황간현(충북 영동) 사람인 오여정이 넘지 못할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오찬)의 첩(돌지)과 정을 통한 통행각이 드러나자 남녀가 소주와 백화주를 섞어 아비에게 마시게 했답니다. 백화주는 철쭉을 담가 만든 술입니다. 철쭉에는 그레이아노톡신이라는 독성분이 들어있습니다. 불륜남녀는 독성성분이 든 백화주와 소주로 폭탄주를 만들어 아버지를 살해한 겁니다.
원래 전통적인 소주는 안동소주와 같은 증류식 소주였습니다. 증류를 시작하면 알코올 도수가 80~70% 정도인 독주가 나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10%까지 알코올 도수가 내려가게 되고 이것이 섞이면서 45%의 소주가 되는 겁니다. 1924년 소주의 도수는 35도였습니다. 이후 30도(1965)-25도(1973)-23도(1998)-20도(2006)-15.5도(2019)에 이어 최근에는 14.9도 소주까지 출시되었습니다.
소주는 원래 우리의 전통술이 아니었습니다. 소주를 처음 만든 것은 기원전 3000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랍지역에서 ‘아라끄’라는 명칭으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1258년 몽골 정벌군이 압바스 왕조를 공략할 때 이 술의 제조법을 배워갔다고 합니다. 그 후 고려를 침범한 몽골군은 고려의 개경과 안동, 제주도에 양조장을 만들었습니다.
고려인들은 ‘물처럼 맑고. 맛은 매우 진하고 강렬한’(<본초강목>) 소주에 매혹됐습니다. 한번 매혹된 소주의 유혹은 나랏님의 추상같은 금주령에도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1489(성종 20) 12월29일 전연사(궁궐 수리 및 청소 담당)의 노비인 비라가 내의원의 홍소주를 훔쳐 마셨다는 혐의로 사형 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성종은 ‘소주 한 잔에 무슨 사형이냐’면서 감형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임금은 어땠을까. <영조실록> 1736년 4월24일자를 보면 영조가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자 6품 관리인 조명겸은 “세간의 여론에 성상(임금)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하는데 진짜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영조는 “그저 목마를 때 간혹 오미자차를 마실뿐이다. 아마도 남들이 그걸 소주라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라고 변명했다.
세종은 부왕(태종)이 서거한 뒤 보름이 넘도록 수라를 제대로 들지 못하자 “음식과 함께 소주 한 잔이라도 드시어 옥체를 보호하시라”고 권합니다. 세종은 이때 “나는 원체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대신들이 그리 청하니 한잔 들겠다”며 “소주를 올리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들인 소주를 반 잔 쯤 마시고 내려놓았습니다.
소주로 대표되는 술은 왜 그렇게 사랑받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술은 풍류의 상징이었습니다. <효종실록> 1657년 9월26일자를 보면 효종이 사대부들의 못된 술버릇을 지적합니다. “이름난 벼슬아치라는 자들이 음주를 풍류로 여긴다. 심지어 술을 마시지 않고 국사에만 전념하는 사람을 도리어 ‘잗단(하찮은) 무리’라고 지목하며 폄훼한다. 참 한심한 일이다.” 효종이 사대부들을 향해 손가락질했지만 임금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실록은 ‘군주=풍류남아’임을 강조하면서 술 관련 일화를 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와 신숙주(1417~1478)의 일화가 유명합니다. 두 사람은 군주와 신하가 아니었다면 동갑내기(1417년생) 친구가 되었을 겁니다. 세조는 1461년 6월4일 소주 5병과 함께 술잔을 신숙주(당시 좌의정)에게 하사했습니다. 술잔에는 덩굴에 박이 매달려 있는 형상을 그리고, 안쪽에는 임금이 지은 시(詩)를 썼습니다. 그 시가 재미있습니다. “경이 비록 나를 보고 웃을 것이나 내 박이 이미 익었으니 쪼개서 잔을 만들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세조는 2년 전인 1459년 야인(여진족) 토벌에 나선 신숙주를 교태전에서 독대하고 격려의 술자리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세조는 교태전 담장 아래 심은 덩굴 박을 바라보며 “저 박이 열매가 열릴까”하고 물었습니다. 잔뜩 술에 취한 신숙주는 “아무래도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박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세조는 “박이 열리지 않겠다”고 한 신숙주에게 그와 같은 ‘희롱시’를 보낸 겁니다. 이튿날(5일) 임금이 하사한 명문 술잔과 소주를 받은 신숙주가 “성은이 망극하다”고 아뢰었습니다.
3300년전 중국 상(은)나라 때 갑골에서 발견된 글입니다. “필(상나라 대신)이 과음 때문에 술병이 걸렸는데, 대왕의 분부를 받들 수 있을까요.(畢酒才病 不從王古)” 얼마나 술을 마셨으면 왕의 명령까지 이행할 수 없을 정도였을까. 상나라는 동이족의 일파가 세운 왕조입니다. “무리가 모여 밤낮으로 쉼 없이 음주가무를 즐긴다(群醉歌舞飮酒 晝夜無休)”(<삼국지> 위서·동이전)는 동이족의 술사랑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술은 과유불급(過猶不及)입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질타가 귓전을 때립니다.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소가 물마시듯 목구멍으로 들이붓는다면 어찌 술 마시는 정취를 알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