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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목포 고하도 용오름 둘레길
영남일보 인터넷뉴스팀
영남일보 기사 입력일 : 2018-03-09
생명 가득한 길에서 보는 봄 바다
섬과 별은 영혼을 돌리는 바람개비다. 언제나 그러하듯 섬과 별은 꿈과 미래다. 섬과 별을 추적하는 것은 꿈과 미래를 현실에 당겨 영혼을 경험하는 일이다. 목포 유달산에서 보면, 고하도는 대낮의 반달이 바다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달산보다 더 낮은 곳, 감청색 바다에 떠 있는 섬을 고하도라 불렀다. 고하도로 가는 목포대교가 2012년 6월29일 개통되어 섬은 육지와 다름이 없다. 버스가 목포대교를 건너간다. 마치 현악기 하프를 연상케 하는 교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한다. 이제 다리도 예술의 한 분야가 되었다.
고하도에 들어서자 우측에 세월호가 보인다. 박무에 서서히 드러나는 세월호의 선체는 비스듬히 누워 아직도 바로서지 못하고 있다. 어디서 온 누가 붙였는지, 부두를 경계 짓는 철망에 무수한 노란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노란 리본은 위험한 상황에 부딪힌 사람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인식리본이다. 세월호 사건은 전대미문의 선박침몰사건이다. 세월호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을 포함한 476명의 승객을 태우고 2014년 4월15일 밤 9시 인천을 출발, 제주도로 항해했다. 원래 출발시각은 오후 6시30분이었으나 기후가 나빠 시간이 늦춰졌다. 다음 날 16일 오전 8시49분 진도군 앞바다 조류가 거센 맹골수도에서 급격하게 변침했고, 세월호는 곧 중심을 잃고 기울어져 침몰하기 시작했다. 단원고 학생이 119에 구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체 안에서는 “이동하지 마라”고 연신 방송이 흘러 나왔다.
오전 9시35분 해경 123함정과 부근 어선 등이 도착하여 침몰 전까지 172명을 구조하였으나, 10시30분께 침몰 이후는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 끔직한 대형사고에 대처하는 구조대는 우왕좌왕하여 혼선을 빚었고, 세월호를 책임져야 하는 이준석 선장과 선원 15명은 승객을 버리고 먼저 탈출하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동하지 마라”는 방송을 하지나 말지. 참으로 가슴을 치고 통곡해야 할 불행한 사건이었다. 누구라도 다 귀중한 것이 생명이지만 고 2학년, 채 피지도 못한 봄의 꽃 몽우리 같은 학생들이 한을 머금고 이승을 떠났다. 그 흰 쌀밥 같은 영혼들, 하느님께서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무슨 말로 나타낼 수 있으랴. 초봄의 한숨 같은 바닷바람이 분다. 노란 리본이 물결치듯이 일렁인다. 노란 리본의 펄럭이는 소리가 수장당한 영혼들의 울부짖음처럼 들린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물질만능, 인명경시, 안전 불감증 등 타락한 윤리, 무책임한 사회국가가 악마였다. 여기에 오래 있기가 참담하여 용오름 길로 떠난다. 이 아픔 , 이 슬픔 모두가 세월이 약이겠지요.
박무에 드러난 세월호·노란 리본에 눈물 그렁
늠름한 자태의 솔숲 지나 만난 충무공 모충각
13척으로 日 함대 133척 격파 명량해전 경외심
바다를 눈에 담아 걷는 용오름 길 감동 이어져
용머리 올라 소유의 욕망 벗어나 우주와 소통
◆이충무공을 기념하는 모충각 답사
고하도 모충각으로 걸음을 뗀다. 해풍에 시달리면서도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솔숲은 정갈하고 범치 못할 위엄이 있다. 이충무공을 기리는 비각에 선다. 명량해전의 승리 후 이곳에 통제영을 설치했다는 내용이다. 명량해전은 어떠한 해전이었을까. 1597년 9월16일은 조선의 해전사에 기적을 이룬 날이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13척의 보잘 것 없는 조선함대가 명량해전에서 133척의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 이순신은 명량대첩 후 “이것은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10배의 일본 함대를 대적한 힘겨운 해전이었다. 그 승리 요인을 무엇이었을까. 첫째, 이순신 함대의 13척 전선은 수적으로 보잘것없었으나, 전투력이 우위에 있었고 조선 수군은 정예병이었다. 그에 비해 일본 함대는 명량의 협수로 때문에 주력함인 아다케는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고 세키부네만으로 해전을 치렀다. 둘째, 이순신 장군은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장소에서 싸운다. 즉 명량의 지형지물과 조류를 이용하고 해로를 차단하는 뛰어난 전략전술로 승리를 하였다. 셋째, 바다의 의병과 주변 피난선들의 역동적인 협조와 전투 참여가 이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명량해전에서 조선군은 전사자가 한 명도 없었으나 13척 전선 모두 선체가 손상되었다. 이제 이순신 함대는 적당한 군항에 정박하여 휴식을 취하고 전선을 수리하고 군량을 확보하여 전력을 재정비해야만 했다. 그러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이후 이순신 함대는 암태도, 법성포, 위도, 고군산 열도까지 북상했다가 다시 남하, 전략적 요충지인 고하도에 통제영을 설치했다. 1597년 10월29일이었다. 이순신은 1598년 2월17일, 새로운 근거지인 고금도로 떠날 때까지 근 107일 동안 이 섬에서 조선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명량대첩 이후 약 1천명에 불과하던 수군을 8천명으로 증강했고, 40척의 군선을 건조하여 53척의 대함대로 재편했다. 그리고 인근 바다를 지나는 어선을 대상으로 해로 통행 첩을 발행하여 군량미를 마련했다. 그야말로 수군, 전선, 군량까지 여기 고하도에서 확충했고 임진왜란의 대미인 노량해전의 전투력을 고하도에서 비축하였다. 그중 이순신의 조선 능력은 경이로웠다. 조선소별로 분업과 협업으로 1척 건조에 40일이 소요되었는데, 이 전선 건조능력은 매우 놀랄 만한 것이었다. 모충각 아랫길을 거쳐 바닷가로 나간다. 봄 바다는 희뿌연 연무를 토하며 굽이굽이 휘돌아 흘러온 영산강의 신비를 껴안으며, 잔잔하게 파도치고 있다. 일제강점기 대동아 전쟁 말기 미군함의 상륙에 대비해 수병이 직접 어뢰를 조종해 미 군함에 돌진하고자 하는 어뢰가미카제를 숨긴 동굴을 관람한다. 약 50개의 동굴이 있었다고 한다. 해안을 떠나 본격적인 용오름 길로 접어든다.
◆용오름 길 트레킹
이른 봄임에도 푸른 잎을 가진 나무들이 길손을 반긴다. 이렇게 수려하고 편안한 길이 있을 수 있을까. 기우제를 지내던 탕건바위에서 사방을 조망한다. 천사의 섬으로 부르는 신안 쪽의 작은 섬들이 낮별처럼 선명하다. 트레킹 로드는 가슴에 희열을 분출시킨다. 청정한 공기는 머리까지 맑게 하고, 잡념을 사라지게 한다. 나지막한 숲은 연이어지고, 바다를 눈에 담아 걷는 능선 길, 즉 용오름 길은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렁저렁 뫼막개를 지난다. 목포대교가 점점 가까워진다. ‘아 이렇게 감성적인 길이, 꿈을 헤집어 꺼내드는 보석 같은 길이 있다니.’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오솔길은 환상의 푸른 나무들 사이에서 감동으로 계속된다. 숲길 삼거리에 도착한다. 여기서 능선 아랫길을 선택하면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길이 다할 때까지 걸을 수밖에 없다.
길에서 보는 봄 바다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겠는가. 자연의 생명이 넘치는 이 길은, 나의 내면으로 걷는 길이다. 바다와 섬, 육지와 하늘이 하나의 그림을 그리며, 닫힌 자아를 열어준다.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왜 섬이 착각을 깨트리는 거울이 되는지 알 것 같다. 국기봉을 통과하고 더 나아가 드디어 용머리에 도착한다. 길의 마침인 여기서 용의 여의주가 되어 하나의 전설을 완성하고 싶다. 그 환희와 생명으로 가득 찬 길을 걸어오면서 자신을 다시 만나고,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 우주와 소통을 할 수 있었다.
글=김찬일<시인·대구힐링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김석 <대구힐링트레킹 사무국장>
☞여행정보
▶트레킹 코스: 세월호 선창 - 모충각 - 어뢰동굴 - 등산로 입구 - 말바우 - 뫼막개 - 용머리 돌아나옴 - 숲길 삼거리 - 대숲 삼거리 - 둘레숲길 입구 - 등산로 입구
▶문의: 목포시 종합관광 안내소 (061)270-8598
▶내비 주소: 전남 목포시 고하도 달동 780-18
▶주위 볼거리: 갓바위권, 목포근대 역사관1관, 목포근대역사관 2관, 삼학도, 목포문학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상케이블카 타고 날아가 즐기는 목포 고하도 트레킹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목포=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세계일보 기사 입력일 : 2022-10-15
잠시 덜컹거리더니 사뿐하게 날아오른 해상케이블카. 순식간에 고도를 높여 산보다 높이 솟구치자 간담이 서늘하다. 더구나 투명한 유리바닥으로 시퍼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찔한 풍경이라니. 용처럼 길게 누운 고하도의 신비한 섬 자락과 학처럼 솟아오른 목포대교의 부드러운 곡선. 그리고 조금씩 고운 단풍으로 물들어갈 유달산 일등바위와 이등바위가 다가왔다 멀어지는 모습까지. 새처럼 훨훨 날아 즐기는 ‘낭만항구’ 목포의 바다는 아찔하고도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추억이 살아 숨 쉬는 낭만 항구
목포에 간다고 하자 아내가 학창시절 아지트였던 오거리의 빵집을 꼭 들러보란다. 목포 여행을 하는데 홍어나 세발낙지가 아니고 빵이라니. 목포역에서 나와 왼쪽 영산로로 접어들자 걸어서 5분 만에 목포오거리가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의 경계 지역이던 곳이다. 오거리 동남쪽 유달·대의·중앙·서산·만호동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오거리 북서쪽 만호진과 북교·죽교동 등 유달산 기슭에는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일본 청년들이 한국 처녀를 희롱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오거리에선 한국 청년과 일본 청년들의 격렬한 패싸움이 벌어졌다. 오거리문화센터는 1897년 개항해 교역, 물류, 교통의 중심지로 과거 전국 3대항, 6대도시의 영광을 누렸던 목포의 옛 역사를 전한다.
한 여자가 물지게를 진 그림이 담긴 ‘옥단이길’ 표지판도 보인다. 물장수 옥단이는 실존 인물로 물이 귀하던 시절 지게로 집집마다 물을 날랐단다. 그가 누비고 다녔던 목포의 심장, 목원동 골목을 따라 100년의 근대문화역사를 전하는 옥단이길이 조성됐다. 오거리의 코롬방제과점으로 들어서자 손님들이 바게트를 사느라 줄이 길다. 1949년 빵을 좋아하던 신혼부부가 문을 연 코롬방은 반세기가 넘도록 오거리를 한결같이 지킨 터줏대감. 부부는 이제 백발이 성성한 80대가 됐고 그들만큼 나이 든 손님들도 여전히 학창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이곳을 찾는다. 목화솜빵 한입 베어 물자 몽글몽글한 우유크림과 쫀득한 찰떡이 어우러지더니 눈처럼 사라진다.
그래도 목포인데 홍어 한 점이라도 먹고 가야지. 물어물어 목포 사람들만 간다는 오거리의 덕인집을 찾아냈다. 입구에 서자 쿰쿰한 홍어 냄새가 문밖까지 새어 나오며 식욕을 자극한다. 칠레산은 아예 없고 흑산 홍어만 상에 낸다. 의심 많은 기자가 흑산 홍어가 맞느냐고 묻자, 주인장이 QR코드 담긴 증명서를 내민다. 신안군 수협 흑산지점 위판장에서 판매한 ‘신안 흑산도 참홍어’라는 원산지가 표기됐고 이력 번호도 담겼으니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겠다. 삭힌 홍어 한 점을 초고추장에 찍어 입안에 밀어 넣자 퀴퀴한 향이 비강을 찌르더니 기도까지 자극해 헛기침이 나온다. 그래 이 맛이지. 목포 막걸리 한잔 곁들이니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이 밀려온다. 홍어전과 홍어애탕까지 먹고 나자 식당을 나서도 옷에서 홍어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유달산과 목포대교 함께 즐기는 스카이워크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목포 유람에 나선다. 요즘 인기 높은 유달유원지의 스카이워크에 서자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고하도와 목포대교가 어우러지는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뒤를 돌아보면 높고 푸른 가을 하늘 덕분에 유달산이 더욱 선명하다. 목포 스카이워크를 영문 글자로 꾸민 알록달록한 포토존에선 젊은 연인이 서로 예쁜 사진을 찍으며 웃음꽃을 활짝 피운다. 2020년 문을 연 목포스카이워크는 바다 위 12∼15m 높이로 54m를 쭉 뻗어나간다. 스카이워크치고는 아담하지만 바닥이 그물망 구조와 강화유리로 꾸며 목포 바다 풍경을 색다르게 즐기기 충분하다. 전망대 아래 건물에는 카페와 횟집이 들어섰다. 목포대교와 바다를 오가는 배들과 불타는 저녁노을이 환상적으로 어울리는 풍경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다. 바다를 따라 해안 산책로가 조성돼 시원한 가을바람을 즐기며 걷기도 좋은 곳이다.
이제 목포의 명물 해상케이블카를 타고 날아오를 시간. 북항스테이션을 떠난 케이블카는 유달산 이등바위와 일등바위를 눈앞에 선사하며 유달산스테이션을 지나 바다를 향해 빠르게 나아간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아 환상적인 풍경은 볼 수 없지만 파란 하늘과 바다 덕분에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볍다. 목포의 가을은 아주 늦게 온다. 유달산 단풍은 11월 말은 돼야 절정에 이르니 그때쯤 케이블카를 타면 평생 잊지 못할 환상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유달산을 지나자 용처럼 길게 누운 고하도와 섬 끝인 용머리에 걸친 목포대교가 항구의 낭만을 더한다. 학이 날아오르는 형상으로 디자인했다는데 금세 훨훨 날아가버릴 것 같다. 최고 높이 155m, 총길이 3.23㎞로 국내 최장 해상케이블카이다.
◆목포 바다 짜릿하게 즐기는 고하도 트레킹
고하도스테이션에 내리면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 고하도(高下島). 높은 유달산 아래에 있는 섬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칼섬으로도 불리는 고하도는 예전에 배로만 드나들 수 있었지만 목포대교에 해상케이블카까지 더해지면서 목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로 인기를 끄는 중이다. 등산로는 6㎞로 약 2시간40분 정도 걸린다. 등산로입구에서 둘레숲길입구∼말바우(정상)∼뫼막개∼용머리∼숲길삼거리∼대숲삼거리∼큰덕골저수지를 거쳐 둘레숲길입구로 돌아오는 코스. 등산로보다는 바다를 아찔하게 즐기는 해안데크길이 인기가 높다. 스테이션에서 내려와 ‘150세 힐링건강계단’을 오른다. 1세, 2세, 3세 등이 적혀 있는 나무계단은 수명을 다한 철길 침목을 재활용했다. 계단을 끝까지 오르기 힘들면 40세 계단쯤에서 왼쪽 ‘보행약자용 둘레길’로 접어들면 된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500m쯤 걸으면 판옥선 13척을 쌓아올린 듯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만든 고하도 전망대가 등장한다. 명량해전에서 13척으로 일본 함대 133척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은 고하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106일 동안 머물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군선 40척을 건조해 모두 53척으로 늘렸고 1000명에 불과하던 병사도 8000명으로 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고하도 전망대에 오르자 서쪽으로 고하도 용머리와 목포대교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반대쪽으로는 유달산과 해상케이블카가 목포 바다를 꾸미고 있다. 해안 절벽을 따라 놓인 데크길은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전망대에서 바다 쪽으로 계단을 내려가면 해안데크길이 양쪽으로 약 1.8㎞가량 이어진다. 3년 전 왔을 때는 용머리로 이어지는 용머리탐방로만 있었는데 그사이에 반대쪽으로 해안동굴탐방로가 추가됐다. 쪽빛 바다와 절벽을 때리는 파도 소리를 즐기며 해안동굴탐방로를 걷는다. 중간 중간 투명한 강화유리가 설치돼 아찔하다. 끝까지 가면 일제강점기 말기에 특공정을 감추기 위한 위장 벙커용으로 뚫은 인공 해안동굴 2개가 등장한다. 일제가 태평양전쟁 때 연합군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시설로 고하도에는 이런 동굴이 14개나 있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고하도를 후대가 지키지 못하고 이런 흔적을 남겼다니 참담하다.
발길을 돌려 용머리탐방로를 따라가면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나고 길 끝에 용머리 조형물과 목포대교가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풍경도 기다린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보배로운 꽃’이라는 뜻을 담아 고하도를 ‘보화도(寶花島)’로 적었다. 트레킹을 직접 해보니 역시 고하도는 목포의 보물이 맞다.
돌아올 때는 용오름 둘레숲길을 추천한다. 용머리에서 나무계단을 오르면 완만한 능선이 이어진다. 고하도는 승천하는 용을 닮았는데 둘레숲길은 용의 등허리쯤이다. 피톤치드로 샤워하며 걸으니 하늘을 날아오르는 용의 등허리에 올라탄 듯 기운이 샘솟는다. 오솔길은 고하도전망대와 말바위를 지나 500년 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이 충무공 유적지로 이어진다. 이번 주말 14∼16일에 목포항과 삼학도 일원에선 목포항구축제가 펼쳐지는 중이다. 풍부한 수산물과 함께하는 파시장터, 만선의 기원을 담은 목포항 풍어제, 풍어 길놀이 오채 퍼레이드 등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된다.
국내 최장 해상케이블카로 용틀임처럼 휘감겨 오는 섬…섬…섬…
한국일보 기사 입력일 : 2019.11.26.
목포=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자박자박 소읍탐방]<44>용틀임하는 섬, 목포 고하도
목포는 항구다. 육지와 연결하는 해상 교량이 늘면서 사정이 달라지고 있지만, 천사(1004) 개나 된다는 신안의 섬으로 가는 출발점은 여전히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이다. 사람도 물자도 목포항에 모였다 흩어진다. 목포 앞바다에 흔한 게 섬이고 제각기 아름다움을 품고 있어 다도해국립공원이라 불린다. 하지만 정작 행정구역상 목포시에 속하는 유인도는 6개에 불과하다. 가장 가까운 고하도는 목포의 자연 방파제 같은 섬이다.
◇목포해상케이블카로 연결로 변신하는 고하도
고하도(高下島)는 높은 산(유달산, 228m) 바로 아래 있는 섬이라는 의미다. 용처럼 길쭉하게 목포항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용머리라고도 불린다. 덕분에 목포 내항은 강물처럼 잔잔하다. 목포 앞바다에서 고하도까지 가까운 곳은 직선 거리 1km도 되지 않는다. 섬 주민 중에는 뱃삯을 아끼려고 헤엄을 쳐서 건너는 이들도 있었다 한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고하도는 2012년 6월 목포대교가 개통하면서 진작에 섬 신세를 면했다. 지난 9월에는 목포해상케이블카가 개통해 새로운 관광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3,230m(해상 820m, 육상 2,410m)로 국내에서 가장 길다. 북항스테이션(정거장이라는 말 대신 굳이 ‘스테이션’이라 이름 붙였다)에서 출발해 유달산 정상 부근의 유달스테이션을 지나 고하도스테이션까지 약 20분이 걸린다. 육상 구간을 지날 때는 목포 구도심이 까마득하게 펼쳐지고 유달산의 기암괴석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높이 155m에 이르는 주탑을 통과할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아찔하다. 지난해 이맘때 온금동 마을 뒤편에 까마득하게 솟은 탑을 보고 흉물이라 여겼는데, 막상 고공에 매달린 케이블카에서 사방으로 펼쳐지는 풍광에 감탄을 연발하고 있으니 사람 마음이 이토록 간사하다. 이용 요금은 성인 왕복 2만2,000원이다.
고하도에 도착하면 정거장을 중심으로 좌우로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섬의 양 끝을 연결하는 ‘고하도 둘레길’로 전 구간을 왕복하면 약 6km, 2시간40분가량 걸린다. 먼저 섬 북측으로 길을 잡았다. 능선에 오르자마자 좁은 바다 건너 유달산과 산자락에 붙은 서산ㆍ온금동 마을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서산ㆍ온금동은 목포의 대표적인 달동네로 주로 신안의 섬 주민들이 이주해 형성한 마을이다. 가난의 흔적이 짙게 밴 서산동의 좁은 골목은 최근 주민들의 애환을 구수한 사투리로 담은 ‘시화골목’으로 단장했다. 영화 ‘1987’을 촬영한 ‘연희네슈퍼’에서 출발해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올랐던 언덕배기에는 전망 좋은 카페도 들어서고 있다.
섬 북측 해안을 따라 개설한 목재 산책로를 걷는 내내 유달산 풍경과 마주한다. 약 1km 해안 산책로 끝자락에는 은빛 용 한 마리가 세워져 있다. 꿈틀대며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형상이다. 조각은 기념 사진을 찍기 좋도록 산책로 쪽을 향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용틀임처럼 휘어진 섬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목포대교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해안 산책로 초입에는 전망대, 중간에는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전망대는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판옥선 12척을 겹쳐놓은 형상의 5층 건물이다. 1층의 카페를 시작으로 각 층마다 목포와 고하도의 역사, 목포의 주요 관광지를 소개하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층마다 창을 다른 방향으로 배치해 고하도가 품은 풍광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다.
◇임진왜란부터 세월호까지 역사의 아픔 서린 섬
케이블카 정거장을 기준으로 풍광은 북측 산책로가 뛰어나지만, 고하도의 역사를 품은 유적은 반대편 길에 몰려 있다. 섬 남측은 그나마 농사지을 땅이 있고, 30여가구의 마을도 이들 농경지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된 유적도 행정구역상 목포시 달동에 속하는 섬 아래쪽에 있다. 고하도는 임진왜란 당시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이 106일간 머물며 조선 수군을 재정비한 곳이다. 바다에서 목포 내항으로 이어지는 물길, 현재 목포대교가 세워진 해협을 통과하는 배에서 통행세를 받아 군량미 2만석을 비축하고, 판옥선 40척을 확보했다고 전해진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고하도에 대해 ‘서북풍을 막아 전선(戰船)을 감추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적었다. 보물 같은 섬, ‘보화도’라고도 썼다. 둘레 12km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호남의 곡창인 영산강 유역을 잃게 되니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섬 남쪽 끝자락 진성(鎭城)이 있던 자리에 ‘고하도 이충무공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722년 삼도수군통제사 오중주와 충무공의 5대손 이상봉이 세웠다. 이순신이 고하도를 전진기지로 선정한 경위와 인조 25년(1647) 진영을 당곶진(현 목포시 하당 일대)으로 옮긴 후 후대에게 고하도 진 터를 알리기 위해 비를 세운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비문은 남구만(1629~1711)이 지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조를 지은 문인이다. 높이 227cm에 이르는 화강암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야산에 버려진 것을 광복 후 현 위치에 세우고 비각을 씌웠다. 하단의 비문은 일제에 의해 훼손돼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비각으로 오르는 길 주변에는 아름드리 솔숲이 형성돼 있고, 뒤뜰에는 최근 심은 듯한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그윽하다. 정면으로 보면 쪽빛 바다 뒤로 목포 시내 풍경이 아른거린다. 일종의 사당이나 마찬가지인데 엄숙하기보다 편안하게 쉬어가기 좋은 분위기다.
충무공 기념비에서 직선 거리로 불과 100m 떨어진 비탈밭 한 귀퉁이에는 ‘조선육지면발상지지('朝鮮陸地綿發祥之地)’라 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육지면은 국수 면발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널리 재배되는 목화 품종이다. 미국이 원산지로 ‘Continental cotton’, 즉 대륙에서 건너온 면화를 가리킨다. 미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일본 영사 와카마쓰 우사부로(若松兎三郞)가 1904년 미국산 육지면을 들여와 처음으로 재배한 곳이 고하도다. 이곳에서 시험 재배에 성공한 육지면은 전국으로 보급된다. 결과만 놓고 보면 와카마쓰는 제2의 문익점이라 할 수도 있는데, 일제의 폭압적 수탈에 육지면 재배 30년을 기념해 세운 비석에는 고마움보다 분노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비석 후면의 글자는 해방 후 주민들에 의해 상당 부분 훼손돼 있다.
고하도 마을 초입에는 목화정원과 체험장이 있어 실제 목화를 볼 수 있다. 수확이 끝난 밭에는 뒤늦게 코스모스만 만발해 있지만, 비닐하우스 안에는 싱싱하게 열매를 맺은 목화가 자라고 있다. 크리스마스 장식에나 쓰는 인공 솜털이 아니라 뽀얗고 폭신폭신한 천연 솜 뭉치가 목화 대궁에 매달린 모습이 볼수록 신기하다. 목화는 세 번 꽃을 피운다고 한다. 처음 하얗게 핀 꽃잎이 발그스름하게 변하고, 열매가 맺힌 꽃봉오리는 다시 하얀 솜 꽃을 세상에 내놓는다. 솜털로 변하기 전 봉우리는 ‘다래’라고 해 간식으로 먹기도 한다. 하얗게 목화 꽃이 피어나던 고하도의 비탈밭은 지금 온통 무화과 밭으로 변했다. 붉은 과육 안에 꽃을 숨긴 과일, 다디단 무화과는 희한하게도 맛과 모양이 목화 다래와 많이 닮았다.
고하도 해안에도 일제 침략의 상흔이 짙게 남아 있다. 바다에서 보면 해안 바위 여러 곳에 구멍이 나 있다. 약 20여개가 남아 있는데 길이 없어 여행객이 가 볼 수는 없다. 고재석 목포 문화관광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굴을 겨우 찾아 갔다. 입구는 지름 5m가 넘을 듯하고, 깊이는 20m 정도 될 듯하다. 어두 컴컴한 동굴에 파도에 쓸려온 쓰레기만 더러 보인다. 해안 동굴은 일제가 연합군 함정을 공격하기 위해 어뢰정을 숨긴 곳이다. 일제의 어뢰정 부대는 해상자살특공대에 비유된다. 명분 없는 전쟁에 내몰려 어두운 굴 속에서 죽을 날만 기다린 어린 군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동굴 주변 해안엔 멀구슬나무 노란 열매가 늦가을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고하도 바깥쪽에는 현재 목포신항만 공사가 한창이다. 기존 섬보다 넓은 땅이 새로 생겼다. 마을에서 큰 도로로 나오면 멀리 목포 외항에 녹슬어 가는 세월호가 덩그러니 얹혀진 모습이 보인다. 질곡의 역사를 벗고 해상케이블카로 용틀임하는 섬, 고하도의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고하도 용오름 둘레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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