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가슴에서 온다
네이버 블로그 - 마음아 놀자~ ~~ ~아들러‘격려’연구소/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법정스님
☆ 마중물 생각
서옹스님께서 살아생전에 내게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어도 산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직도 나에게는 유효한 말씀이다. 주변을 돌아보건대 한국불교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물론 모든 수행자들이 세속화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존경할 만한, 마땅히 공양할 만한 맑고 향기로운 수행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진승(眞僧)은 하산하고 가승(假僧)은 입산한다’는 진묵대사의 말씀이 가슴을 친다.
어쩌면 미래의 불자들은 낙심하고 절망한 나머지 스님이 있는 절로 가지 않고 부처를 모시는 ‘절이 없는 불자’들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잔고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나부터도 그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중국의 당나라 사람 양보는 부처님은 집 안에 있다는 ‘불재가중(佛在家中)’이란 말을 남겼다. 평생 불교 관련 소설과 산문집을 발표해온 나는 양보를 떠올릴 때마다 참으로 우울하다. 오늘은 비록 꼭두새벽이라도 마주쳤지만 내일의 둥근 보름달은 부끄러워서 차마 우러러볼 수 없을 것 같다. 어찌 한국불교만의 일이겠는가.
☆ 스님의 말씀과 침묵
#
깨달음이 개인적인 체험이라면
닦음은 사회적인 의무와 나누어 가짐(廻向)으로 이어진다.
종교가 어느 문화현상보다도 값질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체험에 그치지 않고 되돌리고 나누어 가지는
대사회적인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 시대와 후세까지 모범이 된 신앙인들은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믿음의 꽃을 피우고 그 열매를 맺었다.
불교 경전에 수도자는 먼저 가난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보리심이나 어떤 진리에 대한
자각이 이우러지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
믿음은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슴에서 나온다.
머리에서 오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머리는 늘 따지고 의심한다.
그러나 가슴은 받아들인다.
열린 가슴으로 믿을 때 그 믿음은
진실한 것이고 또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
종교의 존재 이유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주는 데 있다.
그러한 통로를 열어주지 못한 종교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종교가 할 일은 무엇인가?
인간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비인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
그 어떤 과학과 기술이라도 인간 회복과 생명 존중에 대한
종교의 기능을 대신할 수는 없다.
종교적인 신조는
과학 용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의문에 대한 회답이다.
종교의 가르침은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시나 신화로 표현되어 있다.
#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종교라 해서 예외일 수 있겠는가.
어떤 종교든지 좋은 면이 있는가 하면
그 그늘 아래 좋지 못한 면도 있게 마련이다.
종교도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마련한 여러 가지
문화현상 중의 하나다.
#
우리가 종교에 접근하려면 힌두교, 유태교, 이슬람교, 불교 등
부득이 종파적인 관문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파의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되면
드넓은 종교의 지평을 내다볼 시력을 잃는다.
#
집이 크고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거룩한 교회와 큰절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상업주의와 허세에 물들지 않은
신앙인들인지 아닌지, 참으로 발심한 수행자들인지 아닌지에 따라
거룩한 교회나 큰절이 될 수 있다.
아니면 허울 좋은 장사꾼의 장터로 전락할 수도 있다.
#
모든 종교적인 집회에서 그 알맹이는
깨어 있는 맑은 혼이다.
이런 알맹이가 없는 교회와 절은
혼이 나가버린 시가 얼마짜리의
싸늘한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다.
☆ 갈무리 생각
오래전에 발표한 글의 일부이다. 그대로 옮겨 본다.
‘이불재로 이사하면서 스스로 약속한 것 중에 하나는 아래 절의 새벽예불에 꼭 참여하리라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내가 내 자신에게 한 약속은 산중생활을 하는 동안 무효가 되고 말았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아버지는 심장이 나빠 하루에 약을 세 번 드시고, 오십 세 이후부터 육식을 해본 적이 없는 분이셨다. 계란마저 잡수시지 않았다. 나는 옷을 갈아입는 아버지의 몸을 자주 보곤 했는데, 육탈한 듯 살은 없고 거죽뿐이었다. 낡은 수레 같기도 하고 뼈만 앙상한 부처의 고행상(苦行像)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절대로 방에 드러눕는 일이 없었다. 낮에는 조금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묵은 밭을 일궈 무씨와 배추씨를 뿌려놓고 정성을 다해 가꾸셨다. 아침마다 무가 굵어지고 배춧잎이 파래지는 것을 보고는 즐거워하셨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기쁨이나 찾을 뿐 아무런 욕심이 없는 분이셨다. 귀가 어두워 소리치지 않으면 듣지 못하셨지만 세상의 소리를 멀리하니 시비에 휘말리는 일도 없었다.
문득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부처를 모시고 산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그러니 절만 법당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불재가 바로 법당이라는 자각이 왔다. 이후 나는 다시 부처를 밖에서 찾는 따위의 부질없는 짓은 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가 부처이고 머무는 집이 법당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찌 내 아버지만 부처이고 내 상방인 이불재만 법당이겠는가. 너나없이 우리는 가까이 부처를 모시고 있으며 날마다 휴식을 주는 법당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까지도 모두가 부처이고 보살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부처이고, 어머니는 관세음보살, 아내는 보현보살, 아들은 문수동자, 딸은 미륵이다. 다만 미완(未完)의 부처이고 보살일 뿐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지 10년이 됐다. 그러나 그 덕화의 그림자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밖에 나가면 텃밭에서 허리를 구부린 채 일하고 계실 것만 같다. 그런 날은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라는 소리가 목구멍 안에서 절로 나온다. <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정찬주 명상록(정찬주, 다연, 2020)’에서 옮겨 적음. (2020.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