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40
3월26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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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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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mb6pV7K09E
[서울대교구 그레고리오(신도림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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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시시때때로 우리의 고통을 그분께 드립시다!>
사순시기가 깊어가고 있습니다. 그간 계속 봉독해온 요한복음서도 이제 슬슬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서서히 당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절정의 장소,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의 결정적인 죽음 이전에 이미 셀수도 없이 많은 작은 죽음을 체험하셨습니다. 오늘만 해도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유다인들은 손에 손에 묵직한 돌 하나씩 쥐고 던지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몰아 현장에서 사형에 처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순간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게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울 정도의 배은망덕이요 배신이 아닐 없습니다.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당신의 자리를 버리시고 이 질퍽질퍽한 진흙땅까지 내려오신 메시아, 백번 천번 감사드려도 부족할터인데, 그분을 살상하려고 돌을 드는 동족을 향한 예수님의 비애는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예수님께서 체험하셨던 극심한 영적,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지금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과 죽음에 가장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존재, 풍성한 은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요즘 영성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 소속 부활의 로랑 수사(1614~1691)는 생애내내 고통을 많이 받기도 유명했다. 첫서원후 그는 즉시 파리 공동체의 요리사가 됩니다.
15년간 대수도원의 수많은 수도자들의 식생활을 책임지느라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졌습니다. 전쟁 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좌골 통풍이 점점 심해져 결국 제대로 걷지 못하는 지체장애를 얻게 됩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주방에서 봉사할 수 없게 된 로랑 수사에게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인 신발 수선의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200명이나 되는 수사들의 샌들을 만들고, 수선하고를 반복했습니다.
25년간 로랑 수사를 괴롭힌 좌골 통풍은 결국 다리 궤양으로 악화되었는데, 죽음과도 같이 끔찍한 통증을 동반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로랑 수사는 영적생활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을 끊임없이 예수님의 고통과 일치시키고 수렴시키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인생의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과의 친밀한 대화만큼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대화를 계속하다보면 육신의 모든 질병이 훨씬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종종 우리 영혼을 정화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머물도록 강권하시기 위해 육신의 질병을 허락하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분만을 원하는 사람이 어떻게 괴로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그분께 경배하고, 시시때때로 우리의 고통을 그분께 드립시다.”(부활의 로랑 수사, 하느님의 현존 연습,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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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K84IDoUD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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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비로소 하느님을 참으로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아버지를 아는 것"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십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느님을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요한 8,55) 그러시면서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나는 있는 나다." (요한 8,58) 여기서 '나는 있는 나다'는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인 '에고 에이미(Ego Eimi)'입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의 본성이 하느님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같은 본성'을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원숭이의 본성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하루 종일 나무 위를 다니며 바나나를 까먹고, 본능적인 욕구에만 충실합니다. 그런데 그의 품속에는 위엄 넘치는 사자의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그 사진을 보며 "이분이 내 아버지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사자의 용맹함, 사자의 포효, 사자의 고귀한 기질은 전혀 닮지 않은 채 원숭이처럼 살면서 사진 한 장 가졌다고 사자를 아버지로 안다고 우기는 것은 기만입니다.
유다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지만, 본성은 인간이거나 거의 짐승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본성은 자기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모든 욕구는 본성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본성은 ‘두려움’ 속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사자 가죽을 쓴 당나귀』 이야기는 이 위선의 결말을 잘 보여줍니다. 어느 날 당나귀가 사냥꾼이 버리고 간 사자 가죽을 발견합니다. 그는 그것을 뒤집어쓰고 마을로 내려가 모든 동물을 겁주며 사자의 권위를 즐깁니다. 나중엔 자신이 정말 사자가 된 줄 알았고, 사자를 정복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들켜 귀를 잡히고, 사자 가죽이 벗겨지며 결정적인 순간에 사자의 포효가 아닌 당나귀의 울음소리를 내뱉고 맙니다. 우리가 두려움이 생긴다면 그만큼 거짓의 정체성 가죽이 벗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버지를 참 아버지로 알아갈까요?
이것을 알면 됩니다. 아버지는 ‘다~’ 주신다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영화 '닥터 지바고' (1965)의 마지막 장면은 이를 눈물겹게 보여줍니다.
예브그라프 장군은 조카인 타냐를 찾아냅니다. 타냐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모를 잃고 거칠게 살아온 노동자 소녀였습니다. 예브그라프가 묻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언제 잃었지?" 타냐가 대답합니다. "불이 났을 때요... 모든 게 혼란스러웠던 그날 밤이었죠."
예브그라프가 다시 묻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니?" 타냐는 고개를 떨굽니다. "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뛰었는데... 제가 그만 아버지의 손을 놓쳐버렸어요. 군중 속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죠."
이때 예브그라프는 타냐의 눈을 똑바로 보며 진실을 말해줍니다. "아니, 타냐. 너의 아버지는 유리 지바고란다. 그는 위대한 의사였고 시인이었지. 그리고 하나만 기억해라. 아버지는 절대로 딸의 손을 놓지 않는단다. 네가 무서워서 아버지의 손을 놓은 것이지, 아버지가 너를 버린 게 아니야."
자신이 그저 길거리에 버려진 이름 없는 노동자가 아니라, 고결한 영혼을 가졌던 유리 지바고의
혈육임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전율합니다. 이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첫 발을 내딛습니다. 어쩌면 시를 쓰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출처: 영화 '닥터 지바고' 1965)
저도 성체를 영할 때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고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다~”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다 주시는 분 앞에서 “당신은 하느님이시지만, 나에겐 하느님이라고 할 본성은 주지 않셨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그렇게 다 줄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이 하느님이 된다는 말을 금지시켰습니다.
성경에서 이 정체성의 회복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가에 서 계실 때, 마리아는 그분을 보고도 정원지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마리아야!"(요한 20,16)
이 짧은 부름은 창세기의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던 그 권능의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이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가 같은 본성 안에서 소통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마리아의 영적 시력은 하느님 수준으로 격상됩니다. 그녀는 즉시 "라뽀니!"라고 외칩니다. 이 말은 '나의 스승님'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고, 오직 하느님의 자녀만이 하느님을 스승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의 아버지가 같음을 선포하시며, 마리아를 '죽은 자를 찾는 여인'에서 '부활을 전하는 사도'로 재창조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알게 된 마리아는 이제 더 이상 죄인의 본성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딸이라는 본성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출처: 『주석 성경』 요한 복음 20장)
우리는 내 정체성이 진짜 하느님임을 깨닫고, "나도 하느님처럼 할 수 있다"고 고백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하느님 능력을 발휘할 때 비로소 하느님을 진정으로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다고 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해?", "어떻게 기적을 믿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아직 아버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원숭이 본성에 갇혀 사진만 구경하는 상태입니다.
서기 452년, ‘하느님의 채찍’이라 불리던 잔인한 정복자 아틸라가 훈족 대군을 이끌고 로마 턱밑까지 쳐들어왔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와 군대는 겁에 질려 도망쳤습니다. 그때 레오 대교황은 무기도 없이, 군대도 없이 홀로 아틸라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교황은 아틸라 앞에 서서 눈을 똑바로 보며 꾸짖었습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일을 멈추시오!" 놀랍게도 그 잔인한 아틸라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습니다. 훗날 부하들이 왜 도망쳤느냐고 묻자 아틸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의 등 뒤에서 칼을 든 거대한 천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인간 레오가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자의 위엄에 압도당했다." 레오 대교황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에, 하느님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결과 제국을 구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출처: 체사레 바로니오, 『교회 사략』; 몬테소리, 『성인전』)
입으로만 아버지를 부르는 가식에서 벗어납시다. "아버지는 결코 내 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고, 내 안에 감추어진 신적인 본성을 일깨웁시다. 진정으로 아버지께 “다~” 받았다고 믿고 고백하고 행동할 수 있을 때, 그래서 세상을 이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참 자녀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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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울대교구 사제 모임이 6월에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을 예정입니다. 숙소는 남미 주교회의 건물로 정했습니다. 담당 주교님께서 기꺼이 장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미국 내에서 모임할 때는 개최 본당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은 맛있는 한식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개최 본당 교우들과 미사도 함께 하면서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콜롬비아는 선교지역이고, 미국처럼 한인 신자가 많지 않습니다. 주일 미사도 10명 미만 참석합니다. 음식 때문에 걱정하였는데 다행히 달라스 성당에서 봉사자가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봉사자들은 항공료도 본인들이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저녁 식사는 미국에서와 같이 맛있는 한식으로 준비해 주신다고 합니다. 외식하는 것은 가격도 부담이지만, 신부님들 입맛에도 맞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봉사자들이 함께하니 서울대교구 사제 모임이 더욱 풍성해질 것 같습니다. 기꺼이 시간을 내주시고, 사제들 모임이 잘 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시는 봉사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것에 익숙하지만 순환으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직선으로 자라는 나무에는 원으로 자라는 나이테가 있습니다. 나이테가 있기에 나무는 곧게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을 우리는 계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매년 우리를 찾아옵니다. 일출과 일몰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낮과 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도로와 순환 지하철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흘러가는 직선이 아닙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끊임없이 돌아오는 곡선입니다. 교회의 전례는 순환하는 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림을 통해서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사순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임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주님을 믿는 우리들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그 땅과 후손은 직선적인 시간에서의 땅과 후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과 후손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후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계절이 매년 바뀌면서 우리에게 오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도 직선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생명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집 앞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순간도 영원과 같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꿈꾸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사제들을 사랑하면서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 봉사자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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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안동교구 김재형 베드로 신부님]
성경에 나오는 개명 사건은 단순히 호칭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새롭게 정해지는 구원 사건입니다. 이러한 개명의 대표 사례가 바로 오늘 독서에 나오는 아브람 이야기입니다. ‘존귀한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이미 하느님 앞에서 귀하게 불린 한 인간의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며, 그의 존재가 한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인류 전체를 향하도록 이끄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향하여 당신 구원 계획을 펼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그 부르심을 받아들입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의 응답이자 ‘믿음의 조상’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감추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개명으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름 하나를 새롭게 부르시는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심을 다시 한번 세상에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결코 잊으시지 않고, 복을 내리시기로 한 이를 마침내 축복의 길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에도 아브라함과 같은 개명 사건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세례명을 정하거나 받습니다. 어떤 세례명이든 하느님께서 저마다 살아가야 할 방향을 그 세례명을 통하여 알려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세례명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응답해 봅시다. 새 이름을 품고 길을 나선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저마다 자신의 세례명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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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8,51-59: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약속을 주신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51절)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죽음을 늦출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단절, 곧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다.”(In Ioannem Tractatus 43,1)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힘이다. 우리가 말씀을 단순히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삶 속에서 지켜 살아낼 때, 말씀은 우리를 참된 생명에 머물게 한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56절)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떠났던 믿음의 아버지다. 그는 메시아의 날 곧,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날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다. 히브리서도 이렇게 증언한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히브 11,13).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해석한다. “아브라함은 예언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고 기뻐하였다.”(Adversus Haereses IV,5,1) 아브라함의 기쁨은 단순히 미래에 무언가 올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의 약속 안에서 이루어진 메시아의 현존을 신앙으로 바라본 기쁨이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있었다.”(58절) 이는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여기서 쓰인 “나는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밝히실 때 사용하신 표현(탈출 3,14: “나는 있는 나다.”)과 같은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느님과 하나이신 분, 영원으로부터 계신 분임을 계시하셨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나는 아브라함 이전에 있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있다.’라고 말씀하시어 당신의 영원성을 드러내셨다.”(In Ioannem Homilia 55,2) 이 말씀 앞에서 유다인들은 돌을 들어 치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하느님의 모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이는 하느님의 가장 충만한 자기 계시였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나는 있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자신께 적용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계신 하느님과 하나이심을 드러내신다.”(211)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말씀을 지키는 길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가르친다. 아브라함이 메시아의 날을 보며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을 지키며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있다.”하시는 영원하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결코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물게 될 것이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5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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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하여 영원할 테지요>
요한 8,51-59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그리하여 영원할 테지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오직 믿음을
오롯이 믿으면
끝내 믿음이 될 테지요
영원할 바로 그 믿음 말이에요
오직 희망을
오롯이 희망하면
끝내 희망이 될 테지요
영원할 바로 그 희망 말이에요
오직 사랑을
오롯이 사랑하면
끝내 사랑이 될 테지요
영원할 바로 그 사랑 말이에요
오직 섬김을
오롯이 섬기면
끝내 섬김이 될 테지요
영원할 바로 그 섬김 말이에요
오직 살림을
오롯이 살리면
끝내 살림이 될 테지요
영원할 바로 그 살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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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의 마음 둘 곳은>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사람보다 앞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다.
예수님은 창조 이전에, 더더욱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니 유다인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11,3) 깨닫지 못하였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이다.”(필리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이 있어서 주님을 따랐다기보다 따름으로써 믿음이 굳건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이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워야 한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한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길 소망한다.
우리의 마음 둘 곳은 어디인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주 하느님이시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 주님 말씀을 듣고 충실히 지켜야 한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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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요한 8,51-59)>
1)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유한함 속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영원’이라는 시간을 알 수 없습니다. <머리로만 상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영원’과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알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막연하게 “영원한 생명이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뿐인데, 믿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주어져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이 말씀에서 ‘알다.’라는 말은, ‘일치’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단순히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하느님,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행복과 기쁨이 없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과 성인 성녀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그 일치와 행복과 기쁨 속에서 사신 분들입니다.>
2) 51절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충실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사는 신앙인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52절의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라는 말은, “당신은 미쳤다.” 라는 뜻이고,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는다.”라는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5-17)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을 보게 되는 사람은, 살아 있는 채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들 가운데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살아 있는 채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3-14)
‘영원’이라는 시간과 ‘영원한 생명’이 실감나지 않는다 해도, 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도,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는 사람이고, 그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언제든지 때가 되면, 즉 심판의 날이 되면, 믿음과 희망 속에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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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요한 십자가의 요한 신부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해 알려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교리시간이나 강론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벌써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창조주께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셔서 우리를 위해 웃고, 울고, 즐거워하시고, 슬퍼하시고, 사랑해주시고, 측은해 하시며 마지막에는 고난을 기꺼이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고 감사하다며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비록 가끔 빼먹기도 하지만 아침, 저녁 기도를 드리고 주일이면 미사도 참석하고, 봉헌금이다 교무금이다, 여러 가지 어려운 가운데 충실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사순절은 어떤 기간입니까? 왜 이 기간을 참회와 회개의 기간이라고 하면서, 은총의 시기라고 하는 것일까요?
참회와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사실 어깨가 무거워지고 먼가 모르게 어두워지고, 잘못한 것 같고 반성과 후회가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저 또한 매일 하루를 마감하며 하루를 돌아보면 ‘아! 좀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래 내일은 좀 더 힘내서 잘 해보자’ 며 반성을 하게 됩니다.
왜 이런 마음 무거운 것을 하는 것이 은총의 시기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잠시 우리가 배웠던 하느님에 대해 알아봅시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어떤 분들은 교리시간에 배웠던 것을 설명하시는 분들과 계실 것이고, 내가 느끼고 체험했던 그 분에 대해 설명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설명하고 있는 그 분이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나와 무슨 관계가 있냐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이름을 “야훼” ‘나는 나다, 나는 있는 자 그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는 항상 현재를 사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는 시간은 항상 현재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과거를 후회하며, 미래를 꿈꾸며 현재로 부터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는 않는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현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을 사서 걱정하지는 않는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짐을 지워놓으시고 손을 놓고 멀리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우리를 위해 우리의 짐을 손수 지고 가시는 분이십니다.
사순절이 은총의 시기라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하루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와 참회의 시간을 기간을 가지는 것은 과거에 매여 후회하고 책망하고 낙심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민하고 힘들어 하며 살아가는 하루, 하루의 삶의 모습은 하느님께서는 잘 보고, 정말 속속들이 사랑의 눈으로 보고 계시며 어떻게 하면 도와주실까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짐은 가볍고, 우리의 멍에는 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도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나의 아들, 나의 딸이라는 누구도 줄 수 없는 사랑을 받으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이야 말로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진정한 힘이 아닌가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지켜보시며, 말씀하십니다.
“힘내라, 내가 언제나 함께 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사랑하는 나의 딸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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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믿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아브라함>
아브람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림으로써 하느님께 지극한 경외의 자세를 취한다. 그는 모든 잘못을 회개하며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와 새 계약을 맺으시며 새 이름을 주신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인들은 할례를 받을 때 이름을 지어준다.(21,3-4; 루카 1,59-60; 2,21)
아브람 역시 할례를 받기 전에 새 이름을 받음으로써(9-14,) 하느님과 새 계약을 맺었음을 상징한다.
구약에서 자손이 번성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 중 하나이다(시편 127,3-5)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많은 민족을 이루고, 그의 후손 가운데 뛰어난 통치자와 왕들이 많이 배출될 것과 그들이 정착할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계약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영원히 지속되며(13,15-16), 영적으로 하느님께서 택하신 모든 자녀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계약을 맺은 사람에게 많은 은총을 베푸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신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믿음과 순종으로 계약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셨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느님 앞에 뛰어난 공로가 있거나 자랑할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하느님 앞에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전혀 없었다.(로마 4,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뽑으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셨다. 이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만을 사랑하시고 그에게만 은총을 베푸신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로마 4,11)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다.”(로마 4,13)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지만, 이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뽑힌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는 믿음을 통해서 전달된다.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며 하느님께 지극한 예배를 드린다. 이는 지극한 경외의 자세일 뿐만 아니라 ‘통회, 속죄, 봉헌, 겸손’의 자세이다. 즉 자신의 모든 잘못과 죄를 하느님 앞에 드러내놓고 뉘우치며 회개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겸손한 자세이다.
아브라함은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하느님께 간구하는 신앙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인하여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갈라 3,6)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 믿지 못하는 사람과는 약속할 수 없다. 약속은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믿음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라고 말씀하셨는데,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란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슬러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믿지 못하며 거부하는 죄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믿기만 하면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성서는 미리 내다보았습니다.”(갈라 3,7-8)라고 말했다.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전달해주는 통로이며 길이다. 사람은 믿음을 통해서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약속의 유산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약속의 유산을 물려받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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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너희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어느 성당에서 본당 신부님이 강론을 하다가 불쑥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보세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손을 들고 신부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한 발짝 앞으로 나온 신부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 당장 가고 싶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그러자 신자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세상을 믿어도 이 세상이 그토록 좋은가 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 즉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제시하며, 우리의 삶이 이 세상으로만 끝나지 않고 죽은 후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영원한 세상을 믿고 사는 사람과 하느님과 영원한 삶을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지요. 죽은 후의 영원한 세상을 믿는 사람과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없고 이 세상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이 어떻게 같겠습니까?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세상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이 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흐름을 끌어가는 수많은 정치인과 경제인들, 또 방송과 신문 잡지를 포함한 언론매체들은 이 세상이 모두인 것처럼 가르치고 광고하며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재물과 건강과 자녀의 성공에 집중되어 삶의 중심이 점점 보여지는 것과 부의 축적으로 기울고 있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방송이 진행되고 여러 물건의 구매를 폭발시키는 세상의 흐름이 영원한 세상을 믿고 바라는 신자들에게는 큰 유혹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영원한 세상에 대한 희망보다는 이 세상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에 더 관심을 갖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도록 유혹을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하지만 깨어 있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삶을 살아가기 쉬운 세태에 우리는 밀려와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조사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영원한 세상을 믿는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불교 신자들이 사회 구성원의 7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흐름은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의 흐름이 아니라 얼마 되지 않는 영원한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소수의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다수의 믿는 자들이 끌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영원한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재물에 애착을 갖고 건강과 자녀 교육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요.
외모를 가꾸고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자들이 따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영원한 세상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쉬지 않고 달려온 결과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졌는가 하고 묻는다면 답은 부정적입니다. 역사 이래 지금처럼 혼란스럽고 각박하며 갈증으로 허덕이는 시대를 찾아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박해 시대의 우리 조상들의 삶이 훨씬 더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것 같습니다. 참혹한 박해로 세상살이는 험난했어도 영원한 세상에 대한 확신과 하느님 안에서의 평화는 그 무엇과 바꿀 수 없이 크고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 모두인 것처럼 살아가는 유다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8,51)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즉각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요.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요한 8,52-53)
못 믿고 거부하지요. 영원한 세상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삶의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세상은 그저 믿기만 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갖겠다고 욕심을 부려서 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고 말씀을 실천할 때 가능한 것이지요.
하느님을 모르고 영원한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요, 견디기 힘든 공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죽은 후의 영원한 삶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일생을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고 나서는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루카2,29-31)하고 노래한 시메온처럼 평화롭고 거룩하게 하느님께로 가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지금 나의 실제 행동들은 영원한 세상을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까? 또 믿지 않는 사람과는 무엇이 어떻게 다르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음은 실제로 제가 겪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나이 지긋한 어느 노인 한 분이 성당을 찾아와 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낯선 분이라 우리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어떻게 오셨습니까?"하고 말을 건네자 노인은 허리가 땅에 닿게 고개를 숙이며 말할 수 없이 겸손하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제 자식놈 때문에 이렇게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 젊은 청년이 노인의 뒤에 숨듯이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 온 저 자식놈이 직장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하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오늘은 이놈을 잡아서 이렇게 끌고 왔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믿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자식에 대해서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공부를 잘 하는지, 세상에서 성공은 할 수 있을지가 늘 걱정스럽고 시험 때가 되면 성당에 안 가려고 하는 아이를 슬그머니 방관하기도 합니다. 이는 영원한 세상을 믿는 부모의 모습이 아닙니다. 정말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세상을 소망한다면 제대로 가르쳐야지요.
저는 어렸을 때 주일 미사를 한 번만 빠져도 밥을 굶어야 했습니다. 하느님 섬길 줄도 모르는 놈이 무슨 밥을 먹으려고 하느냐는 불호령이 어김없이 떨어졌었지요. 우리 신자 중에도 판공성사를 안 보면 밥을 굶기라고 가르치는 분이 계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믿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세상은 꿈도 안 꾸고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숫자가 많기 에 이 세상이 이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 70% 이상의 영원한 세상을 믿는 사람들이 30%도 안 되는 이 세상만을 믿는 사람들의 흐름에 끌려가고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입으로만 믿은 결과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8,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누군가가 운명을 달리하면 '죽었다'고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갔고 우리가 가야 할 본고향을 의식하며, 하느님이 계신 영원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말씀을 두고서도 마치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찾아 헤매었던 것처럼 없는 것을 찾아 안간힘을 다하는 어리석은 모습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어제 들은 복음 말씀입니다. 신앙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삶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면 자유로워지지요. 하느님의 말씀과 영원한 생명을 담고 사는, 진리 안에 자유로운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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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찬미예수님
서품을 앞둔 신학생들은 해마다 겨울이 되면 많은 고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독신서약서와 함께 서품을 요청하는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데 내가 과연 서품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스도의 도구로써 그분의 일을 잘 수행하는데 합당한지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 과연 제가 서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당시 모셨던 주임신부님께서 저에게 한 가지 일화를 전해주셨습니다. 그 주임신부님 역시 서품을 앞두고 있을 때에 저와 같은 고민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기들 역시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저녁, 서품 전 서약서를 학장 신부님께 제출해야 하는데 서로 자신 없어 하다가 결국 정해진 시간에 아무도 서류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확인한 학장 신부님은 당시 부제들을 모두 불러서는 “이 교만한 것들”이라고 소리 지르며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겠다고 모인 젊은이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느낄수록 주님께 의지하며 힘을 얻고 용기를 내야지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고민하고 행하려 하니 그것이 곧 교만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러한 자세로 사제가 된다면 예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게 된다는 것 또한 당시 학장 신부님은 지적하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다시금 사제가 되는 일을 내 힘으로 하고자 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저도 이와 같은 오류를 종종 범하는 것 같습니다.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본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 교사들 혹은 자모회와 함께 하는 모든 일들이 자칫 제가 제 능력대로 하는 일만 같습니다.
그 와중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제 자신을 탓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사실 그럴수록 의지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인데 그럴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제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뒤돌아보면 교만해도 이렇게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어 그분의 이름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곧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한 확신과 사명감을 의미합니다. 모든 일의 뒤에는 이를 시작하신, 그리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아버지 하느님이 계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활동에 있어서 결정적인 원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최종 목적이 되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주겠다”
유다인들은 이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그들의 자부심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교만”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보다는 그것이 언제 가시적으로 이루어지나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마음 속에서 하느님은 사라지고 본인들의 힘으로 모든 성공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고집과 아집에 둘러싸여 있으니 정작 하느님의 아들이 눈앞에 나타났음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토록 기다리고 고대하던 구원자 예수님이 바로 앞에 서서 말씀하시는데 인간적인 권위와 개인의 능력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의를 준비하며 애쓰는 나의 노력에 조금 더 하느님께 대한 의지가 있었다면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들고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주님의 도움을 청했다면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모든 것이 저의 인간적 능력으로 하는 일이라고 여겼음이 참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이들과 신자분들을 볼 수 없는 때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힘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은 우리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분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라고 하지만 정말 나 자신이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는지,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잘 이뤄지지 않으면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나가 떨어지고 맙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를 계속해서 지지하고 뒷받침 하시던 손을 물리시며 꽤나 난처해 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내가 맡은 일들에 있어서 모든 것을 나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인간적인 한계와 주변에 대한 원망을 느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교만이 다소 섞여 있었음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진정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상처를 받을지언정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있더라도, 주변인들의 결함이 있을지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현실적인 상황이 힘들다면 특별히 더욱 주님께 의지하시며 모쪼록 힘내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아주시며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이 바로 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오늘의 영성체송과 같이, 그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마저 아낌없이 내어주셨는데 이제 와서 우리에게 내어주시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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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그제와 어제 복음에서, 당신의 신원과 함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는 생명을 얻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방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이”란 곧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이 너를 보호해 주리라.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잠언 4,6)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리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하지만 완고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아버지도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음을 들어 반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여기서, “태어나기 전”은 ‘지나간 시간’을 나타내고, “전부터 있었다.”는 ‘현재’를 나타냅니다. 그러니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시간과 관계없는 ‘지속적인 현존’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다가오시고, 먼저 건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펼치시는 이 사랑의 드라마에서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늘 함께 하는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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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심장에 와 타는 불이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바퀴(영)가 제 삶을 굴리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지키는 당신 사랑에 따라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사랑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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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50년대, 동물행동학자 니코 팀버겐은 갈매기 둥지에 ‘가짜 알’을 넣었습니다. 이 알은 진짜 알보다 더 크고 더 선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알이었습니다. 갈매기는 어떻게 했을까요? 이 가짜 알을 버렸을 것 같지만, 반대로 진짜 알을 버리고 품어도 아무런 결과를 낼 수 없는 가짜 알을 끝까지 품으려고 했습니다. 왜 이런 멍청한 행동을 할까요?
본능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연에서는 ‘더 큰 알이 곧 더 건강한 새끼’라는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진짜 알보다 큰 가짜 알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본능이 자기의 진짜 알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 인간도 그렇습니다. 본능적으로 물질이 좋아하고, 풍요롭고 편안함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미움과 다툼을 만들었고, 물질만능주의의 생각으로 나의 이익만 있자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이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살아도 떵떵거리며 잘 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 나라에서도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생활을 했던 사람이 떵떵거리며 잘 살까요? 아마 땅을 치며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너그러울걸, 더 나눌걸, 더 사랑할걸….’ 이런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기준이 아닌 하느님 기준으로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라는 엄청난 약속을 하십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영적 죽음인데,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생물학적인 죽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 들린 자의 헛소리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이 스스로에게서 나오지 않고, 유다인들이 ‘우리의 하느님’이라 부르는 아버지에게서 온다고 명확히 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자부했지만, 실제로는 하느님 뜻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알고, 그분 말씀을 철저히 지키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하고 완전한 관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아무리 설명해도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요한 8,57)라고 말하면서 조롱할 뿐입니다. 유한한 시간의 틀에만 갇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 유다인의 모습을 따를 때가 참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현세적인 이익이나 세속적인 잣대로만 해석하는 모습이 드러날 때입니다. 그래서 정작 내 삶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또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전환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분 뜻에 집중한 삶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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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참되게 사는 신앙인!>
오늘 복음(요한8,51-59)의 제목은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믿음의 조상이요 민족들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끝내는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두루 갖추신 분'이십니다. 곧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유다인들은 육에 갇혀 있었습니다. 보이는 것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메시아요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란과의 전쟁을 일으킨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민족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못하는 민족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보다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더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약성경만 있을 뿐 신약성경이 없는 민족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믿는 민족이 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전쟁은 일으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슬람교인 이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믿는 그리스도인들인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구세주로 믿고 있는가? 죽음이 아닌 생명, 그것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완전한 복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있는가?
생각과 말이 아닌 몸으로 믿는, 행동으로 믿는, 삶으로 믿는, 그런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참되게 사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참스승으로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처럼 사목하는 사제들, 예수님을 닮은 사제들이 이 땅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자비를 바라는 저희를 자애로이 보호하시어,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한결같이 거룩하게 살아 영원한 상속을 받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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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요한 8,56)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요?
같은 현실 속에서도
누군가는 불가능만 보고,
누군가는
하느님의 가능성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향한
여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기쁨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쁨은
모든 것이
이루어진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시작하셨음을
알아보는 순간
기쁨은 더욱
구체화됩니다.
억지로 보려 하면
보이지 않고,
내려놓을 때 드러나는
참된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재입니다.
기쁨은 결과가 아니라
신뢰에서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의 기쁨은
미래를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 안에
이미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기쁨입니다.
이는 일상의 모든 순간을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의 날을
이미 오늘로
살아내며 기뻐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완성이며
삶의 가장 깊은 진리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기다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희망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과
그 완성의 참된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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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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