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만 딱 한번 갔다 온 내 말을 믿고 친구들은 지리산 종주를 위해 짐을 꾸렸다.
나침판과 등고선지도 호루라기를 챙겨 여자 4명이서 4박 5일 산행을 떠났다.
말없이 그냥 묵묵히 걸었다.
이른 아침 첫 기차로 구례에 온 우리들보다 나중 기차로 온 팀들이 우리를 앞서 갔다.
우리는 가다가 쉬고 또 가다가 쉬고를 반복하며 걸었다.
노고단 가까이 가니 원추리 밭이 안개에 쌓여 나타났다.
그 때부터 환상적인 노고단의 풍경에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흔들흔들 걸었다.
문제는 텐트를 쳐야 하는데 이미 도착한 팀들이 자리를 차지해버려서
텐트 칠 공간을 찾지 못했다.
걱정스럽지 않았다.
넓은 노고단 캠핑장과 앞뒤로 보이는 산맥은 보는 것으로 좋았다.
약간씩만 좁혀주면 텐트를 칠 것 같은 곳에 멍청하게 앉아있었다.
도움을 청할 기운이 없었다.
일찍 도착해서 저녁 밥도 다 해 먹고 딱히 할 일 없는 총각 4명이서 우리를 걱정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텐트를 조금 옮겨 줄 테니 어서 저녁 준비를 하라고 일의 순서도 정해줬다.
우린 하라는 대로 저녁 준비를 했다.
고마운 마음에 코펠을 씻어서 거기에 커피를 끓여 한 대접 줬다.
한여름이라 삼베 이불을 챙겨온 우리는 자다가 일어나 가져온 옷을 다 껴입었다.
극심한 추위에 몰려서 결국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텐트 속에서 석유 바나에 불을 붙이면서 잘못하면 텐트가 꼬실라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스프를 끓였다
. 용감한 행동이었다.
새벽 두시나 세시였을 거다. 우린 스프를 먹고 누구랄 것 없이 조용하게 노래를 불렀다.
아주 작게...
묘한 치유였다.
내가 아는 노래는 다 나왔다.
옆집 남학생들은 아마도 우리가 심도 깊은 종교 집단에서 온 학생들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가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새벽을 맞이하고 난 뒤
추위가 가시자 잠이 들었다
. 일어나 텐트를 열고 나가보니 꽉 찼던 텐트는 간데없고
어제 자리를 비켜준 학생들만 남아서 짐 싸고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 분들은 둘은 서울 가야하고 둘은 산행이 가능하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신은 묘하게 사람을 위로하는 분이다.
우린 노고단에서 하루 더 있어도 되는데 갑자기 바빠졌다.
6인용 쇠뽈대 텐트를 내가 지고 왔었는데 그 텐트를 남학생이 자신의 배낭 위에 올려놓고 걷기 시작했다
. 산길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내 무릎 가까이로 기웃거렸다.
산 위의 꽃들이 이뻐서 가다가 멈추기를 여러 번 했다.
저녁은 연화천에서 잠을 자야는데 비가 줄줄 왔다.
늦게 도착하니 다시 텐트 칠 자리가 없어 물길 위에 텐트를 치고 잤다.
이 모든 것이 지리산이라 가능했다.
비에 푹 젖은 청바지를 다시 입고 세석을 향해 걸었다.
느긋한 산행 이었다.
내 안의 두려움이나 기억이 다 작아져버리고 산위의 풍경이 쑥 쑥 자리잡았다.
세석 평전은 지리산 마지막 밤이었다.
별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을 보았다.
저 쪽 남자 텐트에서 노래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노래를 불렀다
. 하산하는 날 천왕봉을 찍고 백무동으로 향해 걸었다.
두시간이면 내려간다기에 넉넉한 마음으로 한가롭게 시작했으니 길은 끝나지 않았다.
결국 깜깜한 밤이 되었고 적당한 곳에다가 텐트를 쳤다.
가진 것을 다 남들 주고 와서 밥에 마가린과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었다.
꿀맛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그분들 이야기를 들었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너무나 슬퍼서 울었다는 말을 했다. 신기했다.
아침에 주변이 환해지니 동네 바로 코 앞에서 우린 멈춘 꼴이 되었다.
오늘은 전주에 도착 할 것이라는 한가한 마음으로 마천까지 긴 길을 걸었다.
커피 프림과 캡틴큐 한 모금씩 털어 넣었다. 비상용으로 가져간 술이었다.
지리산 종주는 보석처럼 반짝이며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수첩에 지리산 종주에 물이 있는 곳을 적어가지고 다녔다.
마음 깊은 친구처럼 지리산은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