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妄想 세상
모처럼 만난 손자 녀석과 뒤 공원 놀이터에서 장난을 친다. 유치원 다닐 성싶은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정겹다. 손자 놈 비둘기에게 준다고 들고 있던 과자를 제 또래들에게 건넨다. 친해지고 싶었던 건가 보다. 아이 둘 내게 일러바치듯 쫑알댄다.
노랑 모자 꼬마/ 조금 전 친구가 저기 도랑 건너다 넘어져 다쳤어요. 게 엄마가 놀라서 병원에 데려갔어요. 무릎에 피도 났어요. 놀이터 옆에 물 흐르는 도랑이 새로 생겼어요. 근데요, 위험하데요.
댕기머리 꼬마/ 돌 모서리가 뾰족하고 반들반들해요. 겁나요. 엄마가 놀이터 가면 조심하라며 걱정해요. 다른 엄마들은 나와서 지켜요.
손자 녀석/ 할아버지 다른 데 가요. 아까 건너뛰다가 미끄러질 뻔했잖아요. 물도 더러워요. 저쪽에 비둘기 많아요.
오십은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 둘 내 앞쪽에서 트랙을 돈다. 공원 한 바퀴 도는 우레탄 길인데 공사판에서 밀려온 모래더미로 몇 군데 막혔다. 걸음이 느려지니 내가 뒤에서 보폭을 맞추느라 애쓴다.
좀 뚱뚱이/ 봄부터 공사한다며 공원이 온통 먼지 구덩이야. 아파트 뒤 창문을 못 열어. 청소하면 걸레가 시커멓게 돼. 그 집에는 안 그런가? 두 달 만에 끝낸다고 해놓고는 넉 달째 묻었다가 다시 파 재끼고 야단이야.
좀 홀쭉이/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멀쩡한 바닥을 왜 바꿀까도 싶었지. 좋게 한다니 보고 있었는데 아닌 것 같아. 새 블록이 산뜻한 맛은 있지만 온통 회색빛이 우중충해. 블록을 덮지 않고 마사토를 깔아놓은 샛길이 처음엔 좋아 보였잖아. 공사하는 분 말로는 맨발로 걸을 수 있다고 했거든.
좀 뚱뚱이/ 그래, 그건 좋구나 싶었는데 공원을 한 바퀴 돌도록 연결된 것도 아니었어. 그런데 비 한번 내리자 다 쓸려 내려갔잖아. 움푹 파인 골이 여기저기 흉하게 드러났어. 다시 마사토를 깔던데, 비오니 또 쓸려가고 파였어.
좀 홀쭉이/ 비탈길에 굳이 마사토를 깔려는 일이 참 답답해. 그러다가 한 달 뒤엔 블록으로 그냥 덮어버리는 거 봤잖아. 먼저 덮은 곳 하고 결도 안 맞고 하니 화장발 안 받는 형님 얼굴 같아.
좀 뚱뚱이/ 거기다 와 날 찍어 붙이노. 우쨋든 일을 장난하는 것처럼 해. 세금 아깝다 아까워.
며칠 전에 만들어 세운 의자다. 노인장 둘이 앉는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날린다. 8월 끝 무렵의 아직은 두꺼운 볕이 느티나무 사이를 파고들며 파도처럼 일렁인다.
온통 흰머리/ 한동안 공사 때문에 갑갑했어. 그런데 새로 만든 의자가 영 그래. 졸대를 대어놓은 것 같은 폭 좁은 나무판 위에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하겠어. 엉덩이에 살이 없어 아파. 등도 배겨. 주로 늙은것들 앉아 쉬는 의자인데 왜 이리 만들었는지 모르겠어.
조금 흰머리/ 나무판이 넓었던 전에 것이 편안하고 좋았잖아. 생각을 안 하고 일하는 것 같아. 그것도 블록 덮인 산책로 연석 밖의 의자는 땅 위에 그냥 세웠지. 비 온 뒤엔 신발에 흙이 묻고, 벌레도 물고하여 불편해. 현장 소장이란 사람에게 말했지만 마이동풍이었어. 아 그래, 그쪽이 구청에 편지했다 그랬지.
온통 흰머리/ 열불이 나서 했지. 열흘이나 뒤에 의자 바로 밑 발 닿는 곳에만 처삼촌 벌초하듯이 엉성하게 블록을 깔아주데. 나는 못 들었는데 뭐 설계에 없는 것이라 하면서 선심 쓰듯 했다고 해.
조금 흰머리/ 사돈 남 말하듯 했네. 그것도 그렇지만, 큰 통로에 새로 놓은 저 긴 의자 좀 봐. 등받이 없이 나무판만 평평하게 해놓았는데, 애들이 놀이기구처럼 밟고 다녀 흙투성이야. 저길 어떻게 앉아. 개 올려놓고 엄마한테 오라며 훈련시키는 여자도 있었어. 그 집 아이는 골목에서 담배 물고 있던데.
온통 흰머리/ 나무 그늘에서, 조명등 아래에서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라고 제 딴에는 멋있게 한다고 만들었겠지. 말 그대로 책상머리 생각이지. 망상이야. 관청은 늘 망상을 하지. 아니, 거기에 휘둘려. 자기가 뱉은 말에도, 눈치 봐야 하는 말에도.
늦은 오후 트랙을 돌다 게이트볼장 옆을 지나는데 왁자했다. 아이들은 방과 후에 모여든 초등 또래들이고 60 중반도 넘어 보이는 여자는 게이트볼 회원인 모양이다. 구경거리가 생겼다.
좀 꾸부정한 할머니/ 야들아, 들어오지 말라 했잖아. 여기서 누가 축구하라 하더노? 새로 깐 인조 잔디 너거 때문에 다 망가진다 아이가. 빨리 밖에 안 나가나, 와 그래 악따밧노.
제법 큰 아이/ 전에는 여기서 축구 했는데요. 왜 하지 말라 하는데요. 할머니들 온종일 게이트볼 하는 거 아니잖아요.
통통한 아이/ 여기서 야구도 하고, 라켓볼도 하고 놀았는데 우리는 어디 가라고요. 우리 엄마가 운동해야 살 빠진다 했는데, 할머니들만 차지하면 어떻게 해요.
땅딸막한 할머니/ 야들이 뭐라 카노. 너거가 여기서 설쳐대면 잔디가 밀리고 부러져 게이트볼 공이 안 나간다 말이다. 알겠나. 우리가 구청에 사정사정 부탁해서 만든 거 아이가.
푸른 모자 쓴 홀쭉 할머니/ 저 옆에 현수막 안 봤나. 읽어봐라. 게이트볼장 전용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돼 있잖아. 너거들은 옆에 새로 잔디 깐 마당에 가서 놀면 되는데 왜 여기서 이카노.
깡마른 아이/ 저기서는 시합 못 해요. 여기처럼 철망이 없잖아요. 공을 차면 저 아래로 굴러가서 안 돼요. 야구도 할 수 없어요.
땅딸막한 할머니/ 그래도 여기서는 하지 말거라. 야, 니는 왜 밖으로 안 나가고 서 있노. 야 이놈들아, 집에 가서 공부나 해라. 여긴 할머니들 운동하는 데다.
끝까지 버티던 성깔 있어 보이는 아이/ 여기가 할머니들 땅이라요? 우리는 축구를 할래요. 할머니들은 집에 가서 낮잠이나 자세요.
아이들은 쉬 물러날 것 기세가 아니고 낮잠 자라는 말에 발끈하여 할머니들은 고함치며 삿대질까지 해댄다.
내 옆에 선 사십 대쯤 여자/ 아이고, 참. 자기 손자 같으면 저리하겠나. 잔디 좀 망가지면 어떠노. 조를 짜서 저렇게 지키고 있다 아이가. 요즘 매일 아이들하고 싸워요. 뭐 구의원한테 부탁해서 애를 먹고 새로 만들었다며 자기 회원들만 써야 한대요.
내 옆에 있던 수염 텁수룩한 남자/ 참 한심해요. 흙을 깔아놓았을 때는 동네 운동장 같았잖아요. 게이트볼 안 할 때는 야구, 축구 하는 아이들로 시끄럽기는 해도 공원에 생기가 돌았지요. 저녁엔 배드민턴을 하는 부부 모습도 보였고, 맨발로 걷는 사람도 있었지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더 잘 꾸민다며 해놓고 생긴 일이 이 모양이요. 축구공, 야구공이 넘어가 아파트 창문 깰까 봐 높은 철망 담장까지 구청에서 저지난해 세워놓고는 지금은 게이트볼 전용구장이라며 현수막 내거니 정신없는 양반들이지. 아이들도 숨 쉬어야지.
노틀 둘 내 건너 쪽 의자에 앉는다. 이내 아파트 한 계단 사람이 반갑게 내 옆에 앉는다. 한철 지났건만 모두 밤더위가 만만치 않아 나온 모양이다. 느티나무 잎을 스치는 바람엔 이미 가을 냄새가 묻었다.
반바지 차림 남자/ 밤에 잠을 못 자 애를 먹겠어. 안 그래도 갈수록 짧아지는 잠이 조명등 때문에 더 그래요. 물도랑 벽면 가장자리와 주변 느티나무 밑동에서 밝은 빛을 하늘로 쏘아 올리니 나뭇잎에 빛이 산란하며 흔들려 현란해요.
슬리퍼 신은 남자/ 나도 그래요. 외등조차 수면에 방해가 되었는데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백색 조명등 불빛에 방이 훤하니 늙은 사람은 자지 말라는 말 같아요. 가리던 잎마저 떨어지니 5층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눈이 부셔요. 구청장 자는 방에 이런 빛 들어가게 하면 어떻게 할지 궁금해요.
반바지 차림 남자/ 우리 앞집 남자가 구청에다 전화했다고 했는데, 그 후로 약한 붉은색 조명으로 바뀌었다고 해요. 아파트에 붙어있는 도심 공원에다 조명시설로 밤새 불을 밝힌다는 그 발상이 한심하기보다 겁나요.
내 옆 남자/ 이런 조명을 누가 보러 올까요. 앞뒤 아파트 사는 주민들 말고는. 야외 큰 공원처럼 구경만 하고 잠은 집에 돌아가서 자면 되는 곳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 씁쓸해요. 바로 옆에서 자는 사람은 어쩌라고.
개를 안고 앞에서 서성거리던 젊은 여자/ 근데, 전에 없이 모기가 많아졌어요. 물도랑이 문제라고 해요. 발도 담그며 시원하게 쉴 수 있게 한다더니 빈말이었어요. 몇 번 물 내려보내더니 안 해요. 되레 고인 물에 나뭇잎이 떨어져 보기 흉하고 악취가 나요. 모기 번식지로 딱 맞은 조건인걸요. 청소한다며 몇 번 사람들이 보이기는 하던데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것 같아요.
슬리퍼 신은 남자/ 물도랑이 조명등만 켜는 시커먼 돌 등잔이 되었어요. 백여 미터는 되는데 참 멋이 없어요. 누군지 옆 계단 사는 한 남자가 공사 터파기하는 것을 보고 구청에 이야기했데요. 무슨 운하처럼 직선으로 하기보단 나무 사이를 따라 곡선으로 하면 보기 좋겠다고요. 이름도 그냥 수조라 하지 말고 용산동龍山洞 지명을 따라 용소龍沼라고 하면 더 어울리지 않느냐고요. 그런데 예산에 맞춘 설계라며 나무까지 다 뽑아내고 길고 좁은 직각의 물도랑을 만들어 대리석으로 마감했지요. 공중목욕탕 느낌이 들고 밤에는 활주로 유도등 같아요. 어느 누가 발 담그며 유유자적하고 싶겠어요. 위쪽 면이 너무 미끄러워 아이들이 넘어지고 다치자 이번엔 마찰이 있게 한다며 꺼칠꺼칠한 뭘 갖다 붙이고 법석을 떨데요.
내 옆 남자/ 지금은 그것도 닳아 버짐처럼 벗겨져 미끄럼 방지도 못 해요. 하는 일이 왜 그럴까 싶어요. 차라리 원래 나무가 섰던 비탈 그대로가 정감이 갔는데. 물도 안 흘려보낼 걸 누구 주머니 차게 하자고 한 건지 모르겠어요.
집 뒤 공원에 가을 색이 짙어졌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벤치에 앉아 나뭇잎 서걱대는 소리, 오가는 사람 말소리,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귀뚜라미 소리조차 물러났다. 갑자기 밀려온 냉기가 엷은 안개를 불렀다. 외등과 조명등이 빛무리를 달며 바람을 받는다. 불편해하는 사람들 입심에도 아랑곳없이 자리 잡던 시설이 잘못된 수술 자국처럼 끈적거린다.
‘용산근린공원 정비공사’란 현수막을 내걸고 공원을 새로 단장한 일이었다. 5월 초에 시작해 6월 중순에 마친다고 적어 놓았다. 중간에 날짜를 두 번이나 고쳐 붙이더니 9월 초에야 끝이 났다. 공원에서 어정거리며 바라본 일 모양새가 내 눈에도 차지 않았다. 지난 내 시절엔 모르고 지났던 관청 일의 허함이 도들 새김으로 드러나 흔들린다. 일 요량이 있기는 한가 싶었다. 사람들 입 틀어진 말이 흘러 다녔건만 현장의 일손들은 무심했다.
구청에다 물었다. 아파트 한 계단에 사는 노장들이 나보고 나서라고 해서였다. “당신도 시에서 밥 벌어먹었으니까.” 그 말이 켕겼다. 내 허물도 있어 너덜대는 것 같았다. 편지를 썼다. 공원길 돌다 귀동냥한 말을 전했고, 주민들 생각을 들어보지 그랬느냐고 했다. 답이 왔다. 주민 의견 듣는 공청회를 했다고 했다. 주민센터에서 통장, 반장과 주민 몇 사람이 모였고 참석한 구의회 의원, 시의원 의견도 있었다고 써놓았다. 돈에 맞추어서 공사를 했다고도 했다. 그러니 하자도 없고 별 잘못이 없다며 에두른 말이 발길질 같았다.
공원에서 세월 타고 어슬렁대는 사람에게 답을 구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훨씬 박수받을 다른 모습이 되었지 않을까 싶다. 작은 자치단체의 일도 이러하거늘, 오만 입이 얽혀 나라 곳곳을 파헤치는 현장은 어떨까. 너무 밝다고 푸념한 외등도, 조명등도 꺼야 하는 일이 생길까도 싶어 요즘 저릴 때가 있다.
모두 망상하는 건가.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란 이름을 내세운 망상인지, 망상의 욕심이 만들어 내는 아둔한 세상인지 가늠할 눈도 어렴풋하다. 그래도 세상은 멸하지 않고 돌아가니 기도를 해야겠다.
첫댓글 수필쓰기의 새로운 시도로 보여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글이 조금 긴 것 같습니다.
엊그제 수필집담회 때 '수필은 재미가 먼저다'라는 선생님의 발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재미있게'를 살려내려 희곡적 수필 쓰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재미있게'란 글쓰기 형식의 다변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참 어려운 일이란 걸 느낍니다.
등장인물 설정이 기가 막힙니다.(좋다는 뜻입니다)
모르는 사람의 특징을 드러내려니 어려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