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28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루카 21,5-11
귀신이 보이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왜 조심해야 할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일이 벌어질 때의 표징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속이게 될 것이고, 전쟁과 반란, 그리고 큰 지진과 기근이나 전염병, 심지어 하늘에도 무서운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성전이 힘을 발휘한다면 감히 거짓 예언자들이 설치지 못하고 세상에 평화와 번영이 깃들이게 할 것이란 뜻도 됩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몸이 약해집니다.
몸이 약해진다는 말은 이제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세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축물이 세워지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교회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가 충만하면 세상에 영향을 줍니다.
선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러나 그 힘이 떨어지면 무질서와 파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전에 군대에 가서 귀신을 본다는 청년의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이 친구는 악령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것 자체가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허물어지고 있다는 말은 성령께서 함께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에게 귀신이 자꾸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척하라고 했습니다.
자꾸 반응하면 그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당에 나가서 다시 성체를 영하라고도 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귀신은 ‘흥 재미없어!’하고 가버렸습니다.
한 사람이나 성당, 교회 전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표징은 내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세상의 영향을 받을 때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이고 교회를 박해하고 멸망하기 직전 로마에 포위되었습니다.
이는 법칙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이를 살리고 악령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한 영향력을 스스로 거부하니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세상에 영향을 주던지, 아니면 세상에 영향을 받으며 세상 탓을 하며 살던지. 절대 귀신이 보이거나 소리를 듣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무너지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유튜브 채널 ‘돈키호테 박서홍’을 운영하는 60대 몸짱이 있습니다. 60대이지만, 신체 나이는 30대와 같습니다.
이분은 10년 동안 감기를 앓아본 적도 없었고
그래서 병원에도 가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젊었을 때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면서 흥청망청 살 때가 있었습니다.
투자도 잘 못하고 동업하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이때 우울증도 오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삶을 포기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여기고 새벽마다 운동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운동만큼 기도와 비슷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육체를 괴롭히며 성령께서 들어오십니다.
이분은 사업엔 재능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노동으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으려 했고 지금은 거의 되찾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용접 일을 하는데 몸을 많이 써야 합니다.
그래서 체력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몸을 단련하였습니다.
그때가 50대 초반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술 담배를 끊고 시작했던 기술을 배움과 체력을 단련하였습니다.
지금은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거나 둘밖에 없습니다.
영향을 받기만 한다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애벌레 때는 영향을 받는 삶을 삽니다. 경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비가 되면 영향을 주는 삶을 삽니다. 나비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애벌레로만 사는 동료들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는 이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나비로 새로 태어난 이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그의 주위에는 생명력이 넘치고 좋은 일만 일어납니다. 성령으로 사는 삶이 이런 삶입니다.
짓거나 허물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영향을 줍니다.
죽어가는 것은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이 허물어지는 이유는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죄는 믿음이 없음에서 비롯됩니다.
구마 영화에 보면 마귀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먼저 사제들이 서로 고해성사를 보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도 악한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선한 영향을 미쳐야 하는데 그러면 믿음으로 죄를 이기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8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루카 21,5-11
혹독한 고통은 영원한 나라를 보다 적극적으로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아직까지도 교회 교도권에 대한 철저한 불순명과 황당무계한 교리, 유치찬란하면서도 이상야릇한 현상을 강조하며, 점점 더 보편 교회와 멀어져가고 있는 한 단체를,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외치는 것이 치유요 기적이더군요. 모든 가르침이나 간증의 전개 방식은 대동소이했습니다.
중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였다.
절망과 두려움 속에 오늘 내일 하고 있던 중, 은혜롭게도 그분을 만나뵙게 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중, 강렬한 한 줄기 치유의 빛이 내게 다가왔다.
갑자기 끔찍했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박수와 함께 아멘!)
들어올 때 타고 왔던 휠체어는 필요없게 되어 내 발로 걷어 차버렸다! (아멘!)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는데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었는데, 주치의 선생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하시는 말씀!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함성과 함께 아멘!)
나약한 한 사람을 철저하게도 신격화시키고 우상화시키며 교회 분열을 획책하고, 교묘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선량한 교우들을 현혹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경고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복음 21장 8절)
물론 매일같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사람들, 불치병이나 병이 깊어감에 따라 백약이 무효인 사람들에게 있어 치유라는 것, 너무나 달콤하고 큰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여기 저기 나대고 있는 사이비 교주들은 이런 우리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심각한 병고로 인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혹독한 고통, 기도빨이 센 누군가를 만나 순식간에 치유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경우는 로또 맞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갑작스레 찾아온 병고 앞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노력을 하는게 정답입니다.
첨단 의학의 도움을 받아, 빨리 원인을 찾아야겠습니다.
병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해야겠습니다.
전문성을 지닌 의료진들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적극적인 치료와 함께 슬기로운 투병생활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치료 과정에서 신앙은 큰 도움을 줍니다.
난데없이 찾아온 병고를 수용하지 못하고 억울해 하며 밤낮없이 울부짖고 있는다면, 병세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병상에서 보다 열심히 기도하며, 모든 것을 주님 손에 의탁하고 마음 편히 지낼 때,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크게, 낙관적으로 먹고, 이왕 다가온 병고를 친구처럼 맞아들이며, 어떻게 하면 잘 다스릴까 고민하고, 의료진들의 권고에 따라 최선을 다해 성실히 환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노력이 곧 치유의 기적을 불러올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전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임을 자처하고 등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마지막 예언자라고 외쳤습니다.
기원후 44~45년경 로마 총독 시대에는 테우다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한 바탕 난리를 쳤습니다.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 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명 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사도행전 5장 36절)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한번 당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워낙 교묘하고 달콤해서 진의를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그럴듯 하게 자신을 포장합니다.
따라서 어딘가를 갔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고 애매할 때는 즉시 사목자들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 묵시 문학은 세상 끝날을 꽤나 무시무시하게 표현합니다.
전쟁과 반란, 파괴와 질병 등 참담한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그와 유사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한 가지!
전쟁과 반란, 파괴와 질병 같은 대참사들도 크신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질병이 곧 종말의 징조는 아닙니다.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지만 이 또한 다 지나갑니다.
그런 혹독한 고통은 다가올 영원한 나라를 보다 적극적으로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강론>
(2023. 11. 28. 화)(루카 21,5-11)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여기서 ‘몇몇 사람’은 ‘제자들’입니다(마태 24,1; 마르 13,1).
“그것이(성전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라는 말은, 성전이 대단히 아름답고 장엄하다고 감탄했다는 뜻입니다(마르 13,1).
열왕기 하권을 보면,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때에 바빌론의 친위대장인 ‘느부자르아단’이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과 성벽과 모든 집을 파괴했습니다(2열왕 25,8-10).
그랬는데, 성전은 페르시아 임금 ‘다리우스’ 때에(기원전 515년) 복구되었고(에즈 6,14-15), 성벽은 기원전 445년, 페르시아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때에 복구되었습니다(느헤 6,15).
그 뒤에, 헤로데 임금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했는데, 46년이나 걸린 큰 공사였습니다(요한 2,20).
헤로데가 재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규모도 컸고,
보석을 많이 사용해서, 대단히 화려하고 장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로마제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때에(서기 70년) 로마군대에 의해 성전과 성벽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오늘날까지 복구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일을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나서 하느님께 봉헌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은 폐허가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몹시 놀라고 휘파람을 불어 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찌하여 주님이 이 땅과 이 집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러면 사람들이 대답할 것이다.
‘자기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 그들의 하느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끌어들여
그 신들을 예배하고 섬겼기 때문이지.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모든 재앙을 그들 위에 내리셨다네.’(1열왕 9,6-9)”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일을 두 번이나 겪은 이스라엘은 회개했을까?
하느님께서는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시면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성전 파괴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면, 성전을 파괴한 바빌론 임금과
로마 황제는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그 벌을 집행한 것일까?”
그것은 아닙니다.
성전 파괴가 정말로 ‘하느님의 벌’이라 하더라도,
감히 하느님의 집을 파괴한 바빌론 임금과 로마 황제는 하느님을 모독한 대역죄인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뜻에 의한 일이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은 ‘살인죄’를 지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는, “너희는 지금 성전 건물의 화려함과 장엄함만 보면서 감탄하지만”입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면, 영원한 것은 없다.”입니다.
성전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보면서 감탄한 그 건물은, 사실 헤로데가 자기의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서 세운 건물이었습니다.
성전이긴 했지만,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으로(신앙심으로) 세운 건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실 때,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강도들의 소굴’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도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뿐만 아니라 전체 인류의 모든 활동에 다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이 자랑하는 업적들, 학문이든 예술이든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고,
모두 먼지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영원하기를 바란다면, 영원하신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인간들은, 허무하게 사라질 먼지만 쌓으면서
너무 오만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