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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칠기로 돈 번 청년, 석유회사 ‘셸’ 창업해 유럽·아시아 석권
[유대인의 역경 교육]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39] 세계 석유산업 전설 영국 마커스 새뮤얼
입력 2022.07.12
한 유대인 소년이 나전칠기 등으로 돈을 번 뒤 석유회사를 세워 세계 경제사에 큰 획을 그었다. 런던의 한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1853년 마커스 새뮤얼(Marcus Samuel)이 태어났다.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모르드카’였다. 새뮤얼의 부모는 골동품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11명의 자식들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고생하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로 자기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 매사에 밝고 긍정적이었다. 특히 열째 아들 새뮤얼은 꾀가 많고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학교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에게 무역업을 권했다.
새뮤얼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그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유대인들은 한 시기를 매듭지을 때 선물을 하는 관습이 있다. 아버지의 선물은 아시아행 편도 배편 한 장이었다. 돌아오는 표는 없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건을 달았다. 아버지가 이제 늙었으니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될 만한 장사거리를 여행 중에 궁리해 보라는 부탁이었다. 1871년 18세의 새뮤얼은 인도, 스리랑카, 태국, 싱가포르, 대만, 필리핀, 중국을 두루 거쳐 여행한 후 마지막 기항지 요코하마 항구에 내렸다. 그의 재산이라곤 5파운드가 전부였다. 일본에 아는 사람도 없고 기거할 집도 없었다.
세계적 정유회사가 된 셸 - 마커스 새뮤얼은 유조선을 활용한 대량 수송으로 석유 판매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 해변에서 조개를 주웠던 경험을 담아 조개 모양 상표를 유조선에 붙였다. 이는 오늘날 세계적 석유 에너지 기업 셸(Shell)의 상표가 됐다. 그는 “낯선 일본의 해안에서 혼자 조개를 줍던 과거를 결코 잊지 않겠다”며 어려웠던 시절을 삶의 거울로 삼았다.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미국 뉴욕의 셸 주유소에서 여성이 주유하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요코하마에 갔을 땐 달랑 5파운드뿐
새뮤얼은 ‘쇼난’이라는 해안의 빈 판잣집에 들어가 며칠 지냈다. 거기에서 그는 일본인들이 갯벌에서 조개 캐는 모습을 보았다. 조개껍데기를 보니 굉장히 아름다웠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런 조개껍데기로 단추나 장식품을 만들면 아름다운 상품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조개껍데기를 열심히 주워 이를 가공해 단추 등을 만들어 영국으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이걸 자신의 골동품 가게에서 팔았다. 영국인들은 처음 보는 조개 장식품을 진기하게 여겼다. 조개 장식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가게가 번창해 빈민가에 있던 점포를 번화가로 옮겼다. 장사가 잘되자 새뮤얼은 화장대 등 나전칠기 제품을 대량으로 보냈고, 아버지는 이를 도매로 팔았다. 마커스 새뮤얼은 23세인 1876년에 요코하마에 ‘새뮤얼 상회’를 설립했다.
1897년 셸(Shell) 운송·무역회사를 세운 마커스 새뮤얼. 그가 세운 회사는 1907년 네덜란드 왕립석유회사와 합병을 통해
로열더치셸이 됐고, 오늘날 세계 2위 석유회사로 성장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나전칠기 장사로 성공한 새뮤얼은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꿈꿨다. 그는 영국과 일본을 오가며 동생 샘을 끌어들여 무역 회사를 차렸다. 영국산 기계, 직물, 공구를 일본과 극동에 팔고, 일본의 쌀, 비단, 도자기, 구리, 석탄 등을 유럽과 중동에 팔았다. 그 무렵 기업인들 사이의 화제는 단연 석유였다. 새뮤얼 역시 1890년 코카서스 지역을 탐사하는 동안 석유의 잠재력을 깨달았다. 때마침 내연기관이 등장해 석유 수요가 급증했다. 록펠러가 석유왕이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무렵 일본은 난방 연료로 목탄을 쓰고 있었다. 새뮤얼은 이에 착안해 코카서스의 등유와 경유를 일본과 극동에 팔았다. 그때부터 일본과 극동은 석유로 난방하고 조명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 사업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새뮤얼은 동남아 시장을 놓고 미국의 록펠러와 경쟁이 붙었다. 그는 물류 비용을 줄일 방법을 찾았다. 바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일이었다. 그는 증기선 몇 척을 빌려 석유통을 가득 채우고 최초로 수에즈운하를 이용한 석유의 대량 운송에 성공했다. 이후 새뮤얼은 극동 항구에 대규모 석유 저장고를 건설하고, 1891년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브니토 석유 회사와 9년간의 독점 계약을 맺어 등유를 극동에 판매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일본까지 석유를 운반하는 게 쉽지 않았다. 석유를 담은 5갤런 통이 쓰러져 석유가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면 더러워진 배를 청소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화재 위험이 큰 석유 운송을 선박 회사들이 꺼려 운송 비용도 엄청 비쌌다. 새뮤얼은 고민 끝에 아예 배 전체를 기름 탱크로 만드는 유조선을 착안했다. 그는 전문가에게 설계를 의뢰해 영국 조선 회사에 유조선을 발주했다. 그리고 1892년 유조선 선주가 되었다. 새뮤얼의 유조선은 수에즈운하 통과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 무렵 러시아는 러시아산 석유를 외국 배가 운반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서 새뮤얼은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석유 탐사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왕립 석유 회사를 설립해 수마트라 유전을 개발하고 있었다. 새뮤얼은 운 좋게 인도네시아 최대 유전 개발에 성공해 한꺼번에 8척의 유조선을 발주했다. 이 배들이 세계 최초의 유조선단이었다. 그리고 유조선마다 조개 모양 상표를 붙였다. 요코하마 해변에서 조개를 주웠던 추억을 배에 붙인 것이다. 이후 3년 사이에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유조선이 69척이었는데 그중 65척이 새뮤얼 소유 선박이거나 전세 선박이었다. 새뮤얼은 유조선을 활용한 대량 수송으로 석유 가격을 크게 낮췄다. 록펠러의 해외 독점이 무너진 이유도 수에즈운하로 러시아산 원유를 수송하는 새뮤얼의 유조선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뒤 유조선 사업이 잘되어 1897년 ‘셸(Shell) 운송·무역 회사’를 만들었다.
이후 새뮤얼은 보르네오와 영국에 정유 공장을 지어 유럽과 아시아 석유 시장을 석권해 선박왕 별명을 얻었다. 그 뒤 그는 상업 은행가가 되어 일본 지방채를 팔아 영국 자본의 일본 진출을 도왔다.
새뮤얼은 정계에도 진출해 1891년 런던시 의원이 되었고, 1902년 49세에 런던 시장에 취임해 런던 항만청을 설립했다. 그는 영국의 석유 산업을 일으킨 공로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
“혼자 조개 줍던 때를 잊은 적 없다”
당시 새뮤얼은 영국 함대에도 석유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의 사업이 성공할수록 영국인들은 유대인이 석유 산업을 좌우한다며 반발했다. 압력이 심하게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석유 회사를 팔 수밖에 없었던 그는 회사를 매각, 합병할 때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비록 소액 주주일지라도 반드시 그의 자손이 회사 임원이 될 것과 회사가 존속하는 한 조개 모양 상표를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후 셸은 1907년 네덜란드 왕립석유회사(로열더치페트롤리엄)와 합병해 세계 2위 규모의 ‘로열더치셸’이 된다. 최근 회사명을 셸로 변경한 로열더치셸의 상표는 지금도 조개 모양이다.
새뮤얼은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며 삶의 거울로 삼았다. 그는 “나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런던으로 피란 온 가난한 유대인 집안의 아들로서, 낯선 일본의 해안에 도착해 혼자 조개를 줍던 과거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말하곤 했다.
유럽과 아시아 정복한 새뮤얼의 유조선단 - 러시아 석유를 일본에 팔던 마커스 새뮤얼은
배 전체를 기름 탱크로 만드는 유조선을 발주했다.
인도네시아 유전 개발에 성공한 새뮤얼은 8척의 유조선으로 유조선단을 꾸리고 배에 조개 모양 상표를 붙였다.
사진은 1960년대 유조선. /위키피디아
[유대인의 역경 교육]
삶의 시련 이겨낼 수 있게 부모가 일부러 역경을 선물 “어려워도 포기하면 안 된다”
삶에 설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부모가 인내심을 가지고 침착하게 대응하면 이를 지켜본 아이 역시 시련을 이겨내겠다는 굳은 결심과 강인한 의지를 품게 된다. 어려운 환경 아래서도 부모의 이러한 태도는 자녀 교육에 아주 좋은 것이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의 행복을 결코 거두어 갈 수 없다는 믿음을 아이들에게 안겨준다. 부모가 강인한 의지로 삶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 아이는 부모의 모습에서 더 큰 자각을 느끼며 성숙해진다. 부모가 어떤 자세로 곤경을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오히려 힘든 환경이 가족끼리의 단합과 우애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를 ‘역경 지수(adversity quotient)’라 하여 중요하게 생각한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절대로 낙관적인 삶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 자세이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역경 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운명은 세찬 파도 가운데 있는 ‘조각배’이며 역경 지수는 이를 뚫고 나아가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녀들이 졸업 등 인생의 한 매듭을 지을 때마다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역경을 선물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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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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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순반대순관심순최신순
2022.07.12 07:43:11
참 좋은 글. 중 고교 교과서에 싣자. 북한 찬양 글들을 빼내고. 다큐를 만드는 것도 좋을 듯. 유대인 배우들을 고용하고 촬영도 영국, 일본, 인도네시아 등으로 넓힐 수 있다. 영화도 이제 세계시장을 상대로 만들 때가 되었다. 뉴욕 한 복판 센트럴 파크에서 K-팝이 부르는 노래에 5천여 관객들이 한국어가 섞인 노래를 열창하는 시대가 되었다. 뭉가 시대가 가고 윤통 시대가 도래하였다. 허준이 교수의 수학 노벨상 수상,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밴 클리번 국제콩쿨 우승. 바야흐로 한국인들의 재능이 전 세계로 뻗혀 나가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중고등 학교를 다닌 1950년대에 셀 석유회사를 세운 유대인 이야기를 읽었다면 인생이 바뀌었을 것이다. 아니, 더 중요한 점은 아우디 자동차를 몰고 바다로 돌진하여 11살 딸과 부인을 죽게한 가장의 무자비 함. 우리나라의 자녀교육, 유대인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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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6
2022.07.12 07:08:31
유대인들의 이런 생활철학은 꼭 배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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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1
2022.07.12 08:13:49
그의 성공은 가난 극복의 욕망과 함께, 아버지의 가게에서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의 첫 사업은 하 찮은 물건(조개 껍질)을 가공하여 새로운 용도 (새로운 가치창조)를 찾아낸것이고, 그 것이 성공하자 취급 상품을 하나, 둘씩 늘려 간 것이다. 그리고 각종 제약 조건들을 돌하파는 끊임 없는 혁신과 도전을 통하여 크게 성공을 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성공의 과정과 방법을 알아도 따라하기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능력이 탁월 한 것 같으나, 일반인은 이 같은 사례들의 분석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것 같다. 단순히 역경지수라는 설명만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할지 막막할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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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0
2022.07.12 09:46:32
쉘 로고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역경의 상징이군요. 참 좋은 기사입니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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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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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08:07:29
이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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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06:27:16
나전 칠기… 개가 웃고감.
답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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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09:33:17
와..그래서 저 주요회사 표시가 조개 모양이였군요 쉘..! 역경을 이겨낼수 있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니..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런거 했다가는 .. 학대라고 신고받거나 아이들이 부모에게 인권유린당했다고 신고당할거 같네요.. 씁슬하다.. 너무 좋은글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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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09:06:22
셸 선박을 만들던 중에 선장실 벽 유리 커버된 장식장에 바닷가 아무곳에서 나 볼 수 있는 볼폼없는 조개 하나를 모셔둔 것을 이상하게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 심오한 뜻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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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10:44:27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교과서에서 북한 찬양글을 읽고 노조에 가입해서 부자들을 범죄자 취급하고 그들의 것을 ?壺耭티?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배운다...... 나때만 하더라도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되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던것 같은데 말이다..... 좌파들은 절대 부자가 되지 말고 거지처럼 부자들것을 빼앗아 먹고 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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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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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10:28:33
입지전적인 그의 삶에서 많은걸 배우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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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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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07:56:40
진작에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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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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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13:01:41
유대인 가 마커스 새뮤얼이 사업을 일으킨 이야기는 가슴을 웅장하게 합니다. 조개껍질 장식품을 팔아서 사업 기반을 마련하여, 영국과 일본의 특산물을 교역하는 무역상으로 발전하고, 내연기관의 발명으로 석유 수요가 폭발하자 카스피해 유전을 탐사하여 일본과 극동 아시아에 석유를 파는 석유상으로 사업을 전환하고, 석유 운송비를 줄이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이용했으며 세계 최초로 영국에 유조선을 발주하여 운송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추었고, 러시아가 카스피해 석유 수입을 제한할려고 하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유전을 계발하여 위기를 헤쳐 나가서 셀 석유운송회사를 세웠다. 영국 군데에도 석유를 공급했으나 유대인 배척 분위기가 있어 회사를 매각했다. 참 재미있고도 유익한 이야기 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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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12:52:43
농사짓고 장원에 묶여 농사짓고 교회다니는 예수쟁이들과 예수를 죽이고 장삿길로 나선 유대인. 답은 뻔하죠' 장사는 초대박이 날 수 있으나 농사는 잘되야 풍년 빵좀 더 먹는 거지. 애들 교육시킬 때 멍청한 삼류대학 보내지말고 그시간 그돈이면 포장마차 장사라도 4년시켜봐라. 세상을 크게 배운다. 그러다 운터지면 초대박나는 거고 망하면 세상공부 진하게 하는 거고 바보는 공무원 시험공부. 그다음이 공무원 그다음이 부모돈 받아 처먹고 노는 놈! 애들 학원끊고 살길 찾아라. 큰 공부는 재능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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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23:55:03
요즈음 세대들은 자신의 삶에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恐怖狀態와 自暴自棄에 빠지고 만다. 부모들이 逆境에 대한 對處訓鍊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苦難이 없는 인생은 없다'를 이제 부터 잘 가르치고 訓鍊시키기 위해서라도 어려움에 직면한 자식을 잠자코 지켜보고 勇氣만 북돋아 주는 게 좋으며 決定的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에 돕는 것이 자녀의 精神的 成長에 有益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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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12:44:32
선진국은 사업을 일으켜 나라를 이롭게 하면 귀족작위를 주지만 우리나라는 사업으로 성공하면 적폐가 되어 교도소에 집어넣고 해외방문때마다 꺼내서 부려먹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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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2022.07.12 12:40:33
하루의 일과 좋은 글을 읽고 기분 좋게 나아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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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12:37:21
유대인이 초대박이 나는이유 유럽은 유대인에게 농사못짓게 했죠. 농토를 구입 불가? 장사길 아니면 돈놀이. 그게 한번 터지면 초대박이고 농사짓던 기독교인들은 잘되야 풍년이다. ㅋㅋ 그래서 돈벌고 싶으면 장사하든지 금융하든지 해라. 망하든 초대박이 나든 하죠. 내 공짜로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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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12:45:00
유대인이 돈버는 이유는 단 하나 농사짓는 유대인은 없다. 수천년간 장시 무역 금융만 했다. 왜 농사는 기독교인들의 전유물이다. 어디 유대아인 농사를 큰일나죠. 길드는 더하고 공예장인들 중 유대인있냐? 없지' 유대인은 그래서 장사로 망해 가난한 거지들도 많지만 초대박난 유대인들이 많은 거야 돈을 버니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지식기반 산업은 더 잘 하지! 우리가 갈길은 회사원 공장돌이 순이가 아닌 사업하는 창업교육을 시켜야 100명ㅇ 망해도 1명만 초대박나면 집안을 구하고 나라를 구한다. 김범수 카카오봐라.' 그가 삼성회사원으로 남았으면 임원이나 해먹다 끝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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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6 09:20:36
한 마디로 ..대단한 인물이며. 하늘이 내린 사람같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