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는 산불처럼 / 이원영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기아 타이거스의 팬이다. 야구 중계를 보고 있으면 투수가 직구를 던지는지, 커브를 던지는지, 슬라이더를 던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야구는 느리게 진행되는 경기이므로 플레이 하나하나를 세밀히 볼 수 있다. 해설자가 경기의 흐름이나 분위기까지 이야기해주면 재미는 두 배가 된다.
야구보다는 덜 하지만 축구도 좋아한다.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월드컵 때부터 축구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계 일류 선수들이 공을 차는 것을 보니 멋지기도 하고 팀워크와 개인기도 볼 만 했다. 전·후반 내내 계속되는 일진일퇴는 다른 생각을 못하게 했다.
내친김에 영국의 프리미어리그도 보기 시작했다. 저녁 늦게 경기가 시작되어서 밤잠을 설치는 게 문제였지만 속도감 있는 경기는 과히 예술이라 할 수 있었다. 플레이도 플레이지만, 응원 열기도 볼만했다. 자기 팀 선수가 골을 넣으면 팬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 없다. 일어서서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른다. 고함을 지르며 생난리를 친다. 사형수가 사형 직전에 사면 받았다면 저렇게 좋아할까? 골보다는 팬들의 열광이 더 볼만했다. 성격이 조용한 편인 나에게 경기 결과보다는 그게 더 흥미로웠다.
영국 축구팬들의 응원 열기는 유명하다. 시합 몇 시간 전부터 경기장에 모여서 자기 팀 응원가를 부르고, 상대팀을 비하하는 노래를 부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경기가 열리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응원단은 박지성 노래를 부른다.
“박지성 너희 나라는 개고기를 먹는다지, 리버풀 선수들은 싸구리 주택에서 쥐고기를 먹어.”
그 정도면 상당히 모욕적인 험담이다. 그만큼 응원 열기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두 팀의 라이벌 의식은 유명하다. 승패는 지역감정과 맞물린다. 서로 만나면 금세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라이벌을 누르고 자기 팀이 이기면 축제가 벌어진다. 경기가 끝나면 펍(pub, 술집)에 몰려가서 밤새 이야기하고 마시고 노래 부른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영국 팬들만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남미 팬들은 그보다 더하다. 아르헨티나에서는 2018년에 자국 축구리그의 결승전을 자기 나라에서 치르지 않았다. 결승전이 끝나면 두 팀의 팬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경기는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경기가 끝난 후 응원단 사이에 돌과 주먹이 오가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여자와 어린이들도 싸움에 참가한 사진이 보도되었다.
축구는 종교다. 가장 열렬한 신도를 가진 종교다. 스타플레이어는 살아있는 신이다. 신도들은 경기장 내외에서 신들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를 보내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 1년 시청자는 전 세계적으로 46억 명이다. 경기가 열리면 그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붙박이가 된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광적인 열정도 그들에게는 미치지 못 할 것이다.
나이가 들면 감정을 자제하는 것이 수월할 것 같지만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골을 넣으면 응원단은 열광한다. 나이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너무 좋아한다. 온몸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감정만큼은 노소의 구분이 없다.
왜 그럴까? 자기 팀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팀이라고 하면 팀은 나의 소유격인데, 팀은 소유격이 아니라 나와 동격이다. 나 자신이다. 팀이 승리하면 내가 이긴 것이고, 세상에서 나는 무시 못 할 존재가 된다. 가슴에 환희가 넘친다. 패배하면 절망의 강물이 흐른다.
감정은 힘이 세다. 성취나 파괴의 밑바탕에는 언제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감정은 만리장성을 세우기도 하고 로마를 불태우기도 했다. 진시황의 흉노에 대한 두려움, 네로황제의 광기는 그 극한을 보여주었다. 트로이 전쟁은 아내를 빼앗긴 분노에서 시작되었다. 오디세우스가 배의 마스트에 몸을 묶은 것은 사이렌의 노래에 감정의 자제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은 본능적이고 길들여질 수 없다. 동물적 본성이다. 인간의 진화에서 이성 보다 감정이 먼저 발달했다. 평상시에 감정은 이성의 제어를 받는다. 그러나 이성의 힘이 약해지면, 체면의 가면이 벗겨지면 누구도 감정의 폭주를 멈출 수 없다. 그럴 때 여러 사람의 감정이 모이면 서부영화 속의 질주하는 소떼처럼 난폭해질 수 있다.
감정은 쉽게 전염되기도 한다. 그 속도는 KTX 열차보다 빠르다. 웃는 모습을 보면 바로 기분이 좋아지고, 찡그린 얼굴을 보면 화가 난다. 모임에서 명랑하게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이 있으면 덩달아 즐거워진다. 축구장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갖고 흥분하기 시작하면 그 감정은 응원단 전체에 곧장 퍼진다.
감정의 강렬함에 소름끼치기도 한다. 산불이 한번 붙기 시작하면 그 안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 비극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사랑의 강렬함, 아니, 감정의 심연에 있는 용암을 보여준다. 남편이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자, 그와 함께 낳은 두 아들을 죽이는 메데이아. 자기 자식을 죽이는 고통을 견디면서 남편에게 감정적 복수를 하는 처절한 광기! 복수의 감정이 모정까지도 넘어섰다. 그토록 감정에는 한계가 없다.
승패가 있는 경기에서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이다. 자기 팀에 대한 사랑은 존재감을 갖게 하고, 삶에 기쁨과 활력을 준다. 반면 그 사랑은 상대 팀에 대한 미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경기 중에 적대감이 고조되어 패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비극적인 종말도 가끔 나타난다.
비단 스포츠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불필요한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제문제, 남북문제, 한일관계 등에서도 감정적 접근은 하지 않는지 깊게 숙고할 일이다.*